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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약사암의 상징적 풍경을 보여주는 범종각 일원. 이 사찰이 얼마나 산꼭대기에, 그리고 가파른 위치에 지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풍경이다.
 금오산 약사암의 상징적 풍경을 보여주는 범종각 일원. 이 사찰이 얼마나 산꼭대기에, 그리고 가파른 위치에 지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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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불교 유적은 금오산성 대혜문 바로 앞의 해운사, 산정 절벽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약사암, 그리고 보물 490호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이 세 가지다. 그 중 '금오산성 유적비'에서 출발해 20여 분이면 닿는 해운사는 금오산 주등산로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불교 유적이다. 물론 신라 고찰이지만, 그렇다고 당대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어서 찾아온 답사자들을 아쉽게 한다.

천 길 낭떠러지에 있는 도선굴

그래도 해운사에는 그곳 아니면 답사자들을 만족하게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사찰 경내의 보유물은 아니지만, 해운사의 것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 무엇. 대웅전 바로 뒤로 올려다보이는 도선굴이 바로 그것이다. 도선굴 자체가 천 길 낭떠러지에 있어 금오산에서 이곳만큼 도선굴을 정면으로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은 달리 없다.

해운사 뜰에 서서 도선굴을 바라보면, 어째서 이 사찰이 신라 고찰인지 저절로 헤아려진다. 도선이 이 절 뒤 까마득한 자연 동굴에서 수도 생활을 한 까닭도 자연스레 이해가 된다. 길재가 이성계의 권세를 거부하고, 도선굴에 숨어지낸 것도 곧장 수긍이 된다. 이만한 위치면 절을 세우고, 도를 닦으며 숨어지내기에 딱 적격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가을빛을 받은 신라 고찰 해운사의 아름다운 풍경. 특히 법당 뒤로 보이는 절벽이 인상적이다. 대웅전 좌후쪽으로 보이는 암벽의 움푹 패인 곳이 길재가 머물렀다는 도선굴(사진의 흰 동그라미)이다. 그런데 사진에서는 대웅전과 도선굴이 아주 가깝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절 왼쪽으로 돌아 대혜문을 지나 대혜폭포 앞에서 오른쪽으로 절벽을 타고 들어가는 데에는 15분가량 걸린다.
 가을빛을 받은 신라 고찰 해운사의 아름다운 풍경. 특히 법당 뒤로 보이는 절벽이 인상적이다. 대웅전 좌후쪽으로 보이는 암벽의 움푹 패인 곳이 길재가 머물렀다는 도선굴(사진의 흰 동그라미)이다. 그런데 사진에서는 대웅전과 도선굴이 아주 가깝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절 왼쪽으로 돌아 대혜문을 지나 대혜폭포 앞에서 오른쪽으로 절벽을 타고 들어가는 데에는 15분가량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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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암은 산 정상 바로 뒤편 절벽에 있다. 주 등산로를 타고 정상을 답사한 후 약사암을 찾은 답사자는 우리나라 최고 문이라는 뜻의 '동국제일문' 현판이 붙은 일주문을 지나 내리막 계단을 걸어 약사암을 방문하게 된다. 이 일주문만 없으면 정상부 아래 절벽에 사찰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렵다. 약사암은 정말 가파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약사암 최고의 풍경은 산신각 앞에서 범종각을 바라보는 전망이다. 도대체 어떻게 스님들은 저 곳까지 가서 종을 칠 생각을 했을까? 사찰과 범종각 사이는 천 길 낭떠러지이고, 그 둘을 잇는 구름다리에는 지금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출입 금지' 패찰이 붙어 있는데... 

하지만 해운사도, 약사암도 국가 지정 문화재는 아니다. 문화재가 되려면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야 하고, 역사적 또는 문화적 가치가 뚜렷해야 하는데, 해운사도 약사암도 신라 고찰이기는 하지만 오래된 옛것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운사에서는 도선굴을 보는 것으로, 약사암에서는 아찔한 절벽 풍광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비록 문화재는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것들이니 땀 흘려 올라온 보람은 충분히 맛볼 수 있다. 

금오산 최고의 문화재는? 보물 490호 마애보살상

신라에 불교가 들어올 때 아도화상이 처음 출현한 곳은 선산 도개 모례(毛禮)네 집이었다. 아도화상은 그곳에서 불교를 전파했다. 최초의 불교 신자 모례에 이어 불자가 된 사람들은 "어디 가노?" 하고 인사하면 "절(毛)에(禮) 간다"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불교 법당이 우리말로 '절'이 되었다.

'모례>절에'는 절의 어원에 대한 일설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는 선산(구미) 지역이 우리나라 불교의 모태 중 한 곳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즉, 신라 최초의 사찰인 구미시 도개면 도리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구미의 금오산에도 불교 유적이 상당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금오산에는 불교 유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신라 고찰을 자칭하는 해운사와 약사암 정도가 현존 사찰의 대강이다. 그래서 답사자들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도리사 인근인데 이렇게 불교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인가?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바로 보물 490호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이다.

금오산 약사암 뒤편에서 산줄기 바깥쪽을 타고 줄곧 걸으면 마애보살입상이 나타난다. 높이가 5.5m에 이르는 이 불상이 국가 지정 보물로 지정된 데에는 세 가지 특징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입상이 보물로 지정받은 세 가지 이유

보물 490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보물 490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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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좌우측 바위의 두 면이 만나는 모서리를 활용하여 조각을 완성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아직 선례가 발견되지 않은 이 조형 방식이 이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사실은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다. 또 오른발에 무게중심이 실리도록 허리를 틀고 선(立) 절묘한 자세(像)를 보여준다. 광배 끝의 선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어 심지어 불상보다 그 선들이 먼저 눈에 띌 정도다.

그러나 이 불상은 뒷날 손을 보아 원형을 파악하기 힘든 얼굴, 오른쪽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몸의 굴곡대로 발목까지 닿는 법의 자락에 생기가 없는 점, 너무 길고 굵은 왼팔과 오른팔이 균형감 없이 제작된 점, 바위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새기기 좋았을 법한데도 투박하기 짝이 없도록 조형된 발 등 '1%' 아쉬운 미학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보물보다 한 수 위인 국보로 인정되지는 못했을 듯하다. 

현지 안내판은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면서도 부피감이 있고, 가는 눈과 작은 입 등에서 신라 보살상보다는 진전된 특징을 보여준다'고 해설하고 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절벽의 바위 면을 깎아 만든 높이 5.5m의 고려 시대 마애여래입상으로, 암벽의 모서리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에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얼굴은 비교적 원만하고 부피감도 있지만, 가는 눈과 작은 입에서 신라 시대의 마애여래입상과는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어깨나 팔의 부드러운 굴곡은 얼굴에 어울리는 형태미를 묘사하고 있어서 상당한 수준의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이나 지나치게 큰 왼손, 둔중하게 묘사된 두 발, 경직된 U자형의 옷주름 등에서 신라 시대보다 둔화되고 위축된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불상이 딛고 서 있는 반원형의 연꽃 대좌와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에서도 나타난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얼굴, 신체, 옷주름, 광배 등에서 신라 시대 보살상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고려 시대의 마애여래입상으로 볼 수 있다.
-문화재청 <우리 지역 문화재> 인용

아찔한 절벽 위의 오형돌탑과, 그 옆으로 내려보이는 구미 시가지 일원
 아찔한 절벽 위의 오형돌탑과, 그 옆으로 내려보이는 구미 시가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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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돌탑
 오형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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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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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안내판의 '신라 보살상보다 진전된 특징'은 문화재청 해설의 '신라 시대 보살상보다 형식화가 진전된'을 잘못 해석한 풀이로 보인다. '형식화가 진전'되었다는 표현은 창의성이 줄어들고 규격적 표현이 심화되었다는 뜻 아닌가? "예술은 이데아(본질)를 단순하게 모방한 인간의 인식(현상)을 다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어법을 빌면, 이 불상이 신라 시대에 비해 '형식화가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은 곧 신라 시대 걸작들에 비해 작가의 개성이 결여된 '불완전한 복제품'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금오산 제1경,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니...

마애보살입상에서 5분가량 걸으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갈림점에는 일반 성인 키의 절반 정도 크기로 가늠되는 돌탑 하나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 돌탑에는 무심코 지나치는 이들 눈에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을 조그마한 이정표 하나가 붙어 있다. 오른쪽으로 50미터만 가면 '금오산 제1경'을 구경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금오산 제1경을 볼 수 있다는 오형돌탑 일대
 금오산 제1경을 볼 수 있다는 오형돌탑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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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정표대로 50미터를 가면 금오산 최고의 경치를 구경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정표를 붙인 사람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침소봉대를 할 까닭은 없을 터, 문득 마음이 바빠진다. 잠깐이라도 빨리 금오산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전망을 눈에 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과연 50미터를 가니 엄청난 절벽 위에 광활한  바위가 얹혀 있고, 그 곳에서는 금오산 아래 좌우 넓은 들판과 호수들, 그리고 구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에 본 그 이정표를 붙인 이의 장담이 결코 허풍이 아니다. 나보다 앞서 이곳을 찾은 답사자들도 못내 아쉬운 듯 자리를 털지 못한 채 사방을 둘러보며 찬탄을 연발하고 있다.

게다가 이곳은 놀라운 전망만 자랑하는 곳이 아니다. 왼쪽으로 도선굴, 정면으로 금오지와 구미 시가, 오른쪽으로 금오산 정상 방향의 미관을 만끽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오형돌탑'이라는 최근 조형물들이 놀랍기도 한 장소이다. 이 수십 기의 돌탑들은 누가, 언제 쌓았을까?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 돌탑들은 세운 이도, 세워진 시기도 밝혀져 있지 않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을 기념하여 2008년 4월에 세웠다는 돌탑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2008년 이후에 누군가가 쌓은 것이리라. 수십 기의 돌탑을 절벽 위에 세운 사람의 공덕에 대한 치하가 저절로, 거듭거듭 일어난다.    

더 이상 오형돌탑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문화재가 아니므로 예술적 해설도 가능하지 않고, 근래의 것이므로 역사가 서려 있지도 않다. 그저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옛말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현지를 방문해 금오산 일원과 구미 일대의 전망을 직접 감상하시라고 말할 도리밖에. 그래서 사진 몇 점을 올린다. 사진은 진짜를 베낀 것이라 결코 진경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는 듯하다. 

오형돌탑
 오형돌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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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11월 20일에 경북 구미 금오산에 다녀 왔습니다.



태그:#오형돌탑, #금오산, #약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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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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