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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은 3·1운동 물밑작업이 시작되고 끝이 난 곳이다. 이중에 계동길은 3·1운동 기운이 싹트고 사전 준비 작업이 긴박하게 이루어진 곳이어서 3·1운동을 빼놓고 이곳을 얘기할 수 없다. 3·1운동 유적은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고 그 터만 존재한다. 그래도 3·1운동 경로를 따라가는 여정은 흥미로운 여행거리다.

중앙학교 숙직실, 김성수 집, 한용운 집이 이 길 위에 있다. 1919년 1월과 2월, 한용운, 이승훈, 송계백, 송진우, 현상윤, 김성수, 최린, 최남선이 긴박하게 오갔던 이 길을 이제는 우리가 나릿하게 걷고 있다.
▲ 계동길 정경 중앙학교 숙직실, 김성수 집, 한용운 집이 이 길 위에 있다. 1919년 1월과 2월, 한용운, 이승훈, 송계백, 송진우, 현상윤, 김성수, 최린, 최남선이 긴박하게 오갔던 이 길을 이제는 우리가 나릿하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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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1번지, 중앙학교. 여정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콩밭이었던 계산(桂山) 언덕에 중앙학교가 들어선 것은 1917년이다. 원래 중앙학교는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맨 얼굴을 드러낼 무렵, 소격동에서 기호학교(畿湖學校)로 출발했다.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기호흥학회가 설립했다. 그 후 재정난을 겪고 있던 차에 김성수가 인수하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 

3·1운동이 싹 튼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숙직실

1919년 1월말, 일본유학생이던 송계백이 중앙학교 숙직실 문을 두드렸다. 김성수가 교사로 채용한 현상윤과 당시 교장이었던 송진우를 찾아온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학생들의 거사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넸다.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다.

1919년 1월 말, 송계백은 숙직실로 선배 현상윤을 찾아 3.1운동의 불을 지폈다. 원래 있던 숙직실은 헐리고 중앙학교 동쪽 언덕에 복원해 놓았다.
▲ 중앙학교 숙직실 1919년 1월 말, 송계백은 숙직실로 선배 현상윤을 찾아 3.1운동의 불을 지폈다. 원래 있던 숙직실은 헐리고 중앙학교 동쪽 언덕에 복원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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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백이 누구인가? 2·8독립선언의 계획을 국내에 알려 지지를 이끌어 내는 한편 국내 독립운동을 촉구하기 위해 파견된 밀사였다. 그는 보성중학교 시절(1911년) 1년 선배가 현상윤이고 은사(교장)가 3·1운동에서 기획조정 역할을 한 최린이었다.

김성수와 송진우는 청소년기부터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였고 최남선을 포함한 김성수, 송진우, 송계백, 현상윤은 모두 와세다 대학 출신들이었다. 게다가 3·1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계동을 중심으로 가까이 모여 살아 연결망이 튼튼했다. 송계백이 현상윤을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장 송진우는 중앙학교 숙직실에 거처했고(원서동 집은 1921년부터 거주) 김성수는 계동 130번지, 현 김성수 고택 자리에, 한용운은 계동 43번지에 살았다. 천도교계를 이끈 손병희 집은 가회동 현 북촌박물관, 최린 집은 현 헌법재판소 주차장입구(재동 68번지)자리였다. 북촌, 특히 계동길이 3·1운동의 핵심 장소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919년2월28일, 세 종교 대표가 만났던 곳이다. 천도교를 이끌며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손병희, 그의 집은 사라지고 가회동 북촌박물관 앞에 표지석만 전한다. 남쪽, 헌법재판소 안 주차장 입구에 최린이 살고 있었다.
▲ 손병희 집터 1919년2월28일, 세 종교 대표가 만났던 곳이다. 천도교를 이끌며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손병희, 그의 집은 사라지고 가회동 북촌박물관 앞에 표지석만 전한다. 남쪽, 헌법재판소 안 주차장 입구에 최린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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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윤 인맥 또한 만만치 않다. 나이는 3살 연하지만 최남선과 친구로 지냈고 손병희의 최측근인 최린이 그의 은사였다. 정노식, 김도태와 친분이 있어 기독교계 독립운동을 이끈 이승훈과도 연결됐다. 아무튼 현상윤과 최린의 네트워크가 작동되면서 3·1운동의 계획이 손병희에게 쉽게 전달됐다. 손병희는 3·1운동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천도교계의 대외업무를 최린에게 맡겼다.

계동은 천도교·기독교·불교계의 만남의 장소

한편, 기독교계 독립운동은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이 맡고 있었다. 최남선은 현상윤에게 부탁하여 평안북도 선천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에게 연락해 상경토록 했다. 1919년 2월 11일, 김성수 집에서 현상윤 주선으로 이승훈과 최린이 첫 만남을 가졌다. 그 후 2월 24일 천도교중앙총부(현 덕성여중 자리)에서 최린과 이승훈은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일원화 작업을 타결했다.

계동 130번지, 1919년 2월21일 기독교계 이승훈과 천도교계 최린이 만난 곳이다. 1918년 김사용으로부터 인수한 집이다. 문은 항상 닫혀 있어 안을 볼 수 없는데 이 집 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그런대로 집을 구경할 수 있다.
▲ 김성수 집 계동 130번지, 1919년 2월21일 기독교계 이승훈과 천도교계 최린이 만난 곳이다. 1918년 김사용으로부터 인수한 집이다. 문은 항상 닫혀 있어 안을 볼 수 없는데 이 집 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그런대로 집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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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최린은 계동에 머물고 있던 한용운을 찾아가 불교계의 동참을 약속 받았다. 이로써 세 종교계의 일원화 작업이 마무리됐다. 한용운이 머물고 있던 집은 계동 43번지.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3호까지 발행한 유심사가 있었던 자리로 거처로도 사용했다. 독립선언 하루 전날, 불교학교인 중앙학림의 유심회 학생들을 불러 모아 독립선언서 3000매를 전달한 곳이기도 하다.

계동 43번지, 1919년 2월24일, 천도교계 최린과 불교계 한용운이 만난 곳이다. 유심사를 설립했고 거처했던 집이다. 만해당 이름으로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다. 장기적으로 보존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 한용운 집 계동 43번지, 1919년 2월24일, 천도교계 최린과 불교계 한용운이 만난 곳이다. 유심사를 설립했고 거처했던 집이다. 만해당 이름으로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다. 장기적으로 보존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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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월 27일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독립선언서가 인쇄됐다. 장소는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보성사로 천도교가 인수한 보성학교 안에 있었다. 현재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 자리다.

1919년 2월 27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으로 조계사 뒤 수송공원에 있다. 인쇄를 책임진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동상과 보성사 터 표지석, 기념비들이 있다. 보성학교 후문이 지금 조계사 문이고 회화나무와 백송은 예전 그대로다.
▲ 보성사 터 1919년 2월 27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으로 조계사 뒤 수송공원에 있다. 인쇄를 책임진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동상과 보성사 터 표지석, 기념비들이 있다. 보성학교 후문이 지금 조계사 문이고 회화나무와 백송은 예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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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전날, 3대 종교계 대표가 손병희 집에서 만났다.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마지막으로 검토하고 거사 장소를 최종적으로 태화관으로 정했다. 이로써 3·1운동 계획은 마무리됐다. 3월 1일 2시가 되어갈 때쯤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4명은 불참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1919년3월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던 곳이다. 지금은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태화관 터 1919년3월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던 곳이다. 지금은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고 그 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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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종교계 대표인 손병희(1861년생), 이승훈(1864년생), 한용운(1879년생)을 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3·1운동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종교계를 한데 엮는 역할은 최린을 중심으로 일본유학생 출신, 1890년대 생이 주도했다.

송계백, 현상윤, 송진우, 김성수, 최남선, 김도태, 정노식 등 모두 1890년대에 태어나 1910년 전후 일본에 유학한 세대로 20대 중후반 나이였다. 나중에 변절하는 자들이 다수 나오지만 최소한 그 당시는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져 물결을 일으키려는 열정'은 있었다.   

계동길을 지키는 터줏대감

이제 3·1운동의 목멘 함성은 뒤안길로 물러나고 몇 채의 집만 남아 그 날을 기억할 뿐이다. 추운 겨울 숙직실 문을 두드린 송계백의 발길이나 중앙학림학생들에게 선언서를 나눠주던 한용운의 걱정스런 눈길도 이제는 시끌벅적한 인파에 묻힌 지 오래다. 그래도 계동길에는 3·1운동 관련 유적 외에 옛일을 추억하려 안간힘 쓰는 오래된 것들이 남아 있어 한낱 즐기는 '관광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일은 없다.

계동길 한 가운데 자리 잡아 계동길 주인 노릇하는 '중앙탕'과 핑크색 담이 잔뜩 겁먹은 어린애를 달래주는 '최소아과', 변해가는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뜬히 터를 지키고 있는 '대구참기름집'은 계동길을 지키는 터줏대감이다.

계동길 한가운데에서 터줏대감 노릇하다가 11월 16일에 문을 닫았다. 소소한 하루가 넉넉하지 못했나 보다. 다음 차례는 무엇이 될까?
▲ 문 닫은 중앙탕 정경 계동길 한가운데에서 터줏대감 노릇하다가 11월 16일에 문을 닫았다. 소소한 하루가 넉넉하지 못했나 보다. 다음 차례는 무엇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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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중앙탕은 지난 16일 영업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지난 번 찾아갔을 때 주인 아주머니의 표정이 안 좋았던 이유가 있었다. 문 닫는 날 다시 찾았다. "11월 16일까지만 영업합니다. 바구니 찾아 가세요"라 적힌 문구가 서글피 보였다.

그래도 헐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임대를 해 '안경갤러리'가 들어선다 한다. 중앙고등학교 야구부 샤워장으로 지어졌다가 대중탕으로 문을 연 지 근 50년인데 딱하기만 하다.

1940년에 문을 열었다 하니 70년이 넘었다. 마을사람들 일상에 관련된 것 중에 가장 어른이 셈이다.
▲ 최소아과 정경 1940년에 문을 열었다 하니 70년이 넘었다. 마을사람들 일상에 관련된 것 중에 가장 어른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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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만해가 살던 집을 찾았다 해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그때 '계동43번지' 주소 하나만 갖고 계동길을 헤맨 적이 있었다. 한 신문은 지금 '황금알식당'이 있는 집을 자료 사진으로 내보내고 유심사터 표지석도 엉뚱한 곳에 설치해 놓아 혼동을 주긴 했어도 마음 한 구석이 이렇게 휑하지는 않았다. 중앙학교 앞에 일본 관광객 몇 명이 서성댈 뿐 지금처럼 마을사람들 일상과 아무 상관이 없는 가게들이 계동길 양쪽을 점령하지는 않았다.

1975년에 문을 열었다 들었다. 변해가는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있다.
▲ 대구참기름집 1975년에 문을 열었다 들었다. 변해가는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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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라는 게 사람들의 일상이 담겨 있고 그것에 기대어 삶을 꾸려나가는 생활공간이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중앙탕 다음은 최소아과, 그 다음은 대구참기름집이 될지 모른다. 그 다음은 뭘까? 서태지의 <소격동> 가사처럼 '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그나마 멀리서 '고구마 한 상자에 만 원'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태그:#3.1운동, #계동길, #중앙학교, #중앙탕, #태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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