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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에서 집이 두 개 이상 있어야 '살아있다'라고 합니다. 두 개 이상의 집을 갖기 위해, 평생을 힘겹게 살아가지만 두 집 내고 안정을 꾀하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겨우겨우 돌 하나 더 잇는 삶이 어느덧 뒤돌아보면 대마가 되어 포기도 쉽지 않게 되지요. 겨우 두 집이라도 내기 위해서, 살아있기 위해서, 자신의 한 판 바둑(삶)을 승리하기 위해서 터벅터벅 한 수, 한 수 돌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 웹툰 <미생> 예고편 중에서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tvN, 금토)이 연일 화제다. 직장인의 애환과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현실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물론 그마저도 '판타지' 아니냐는 비판도 있으나 그럼에도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여지껏 <미생>을 제외한 다른 웹툰이든 드라마 어디서든 고인들의 영정이 모셔진 대한문의 '쌍용차 농성장'이 등장한 적이 있는가.

원작에 등장한 쌍용차 분향소는 드라마에서 빠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생>은 노동과 사회문제를 밀접하게 다룬다. 여직원을 상대로 한 성희롱 발언과 상사들의 권위적 태도, '갑' 앞에서 납작 엎드려 기를 죽여야만 하는 '을'의 처지도 담겨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온갖 요소가 다양하게 등장하는 셈이다.

고졸 계약직 장그래의 우여곡절, 보면서 쓴웃음이 났다

드라마 <미생> 속 한 장면. 영화 <변호인>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 임시완은, 우여곡절을 겪는 직장 초년생 캐릭터인 장그래를 연기한다.
 드라마 <미생> 속 한 장면. 영화 <변호인>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 임시완은, 우여곡절을 겪는 직장 초년생 캐릭터인 장그래를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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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생>의 방송분 중 1·2국(바둑을 소재로 삼았기에 매 회 '국'이라는 표현이 쓰인다)은 그야말로 장그래 수난시대였다. 어릴 적부터 접하며 유일하게 젊은 날의 열정을 다 바친 분야인 '바둑'에서 쓴 맛을 보고 입단의 꿈을 접은 장그래. 그는 결국 기원에서 친분이 있던 사람의 도움으로 대기업 '원인터내셔널'에 인턴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제대로 된 '출발'이 아니었다. '출발선에 가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에 불과했다.

인턴 기간 중 장그래는 같은 처지의 인턴사원들의 시기를 받는다. 그가 '고졸' 신분에 스펙조차 전무한데도 대기업 인턴자격이 주어진 것에 대한 질투였다. 또한 이런 이유로, 장그래가 일하게 된 부서인 '영업3팀'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불쾌한 소식'이자 '애물단지'로 인식된다.

"아니, 그 나이 먹도록 도대체 뭘 한 거야?"

졸업장은 고등학교에서 받은 것이 마지막이고, 외국어 능력이나 보유한 자격증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상사인 김 대리로부터 듣는 극 중 대사다. 회사 옥상에서 이 말을 남기고 등을 돌리는 상사를 바라보는 장그래의 표정은 애처로운 감정을 집약한 것 같았다. 자괴감과 분노, 씁쓸함과 좌절감. 지나온 20여 년의 삶이 구겨져서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이 장면을 보는 내 얼굴도 동시에 일그러졌다.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을 보면서 쓴웃음이 흘렀다. 장그래 역할을 맡은 배우인 임시완의 얼굴을 '표정'만 놓고 보면 마치 거울처럼 느껴졌다.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말을 들어본 처지이기에, 그 심정을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입란에 학력은 '고졸', 보유자격증은 하나도 없는 나의 초라한 이력서. 2년을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지냈지만, 모든 것을 점수로 환산하고 평가하는 한국에서는 그런 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영어도 조금 트인 상태로 돌아왔지만, 학원에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한 적은 없었기에 토익 성적은 800점에 불과했다.

각종 구인 사이트와 직업소개소에 이력서를 뿌렸지만, 내가 다른 지원자보다 거의 유일하게 높은 숫자를 가진 것은 서른 즈음인 '나이'뿐이었다. 그 덕분에 면접장에서, 혹은 입사한 뒤 상사로부터 "그 나이까지 뭐하면서 지낸 거냐"는 핀잔이 섞인 물음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법을 배울 수 있었지만 말이다.

7년 동안 키웠던 만화가의 꿈을 접으며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주인공 장그래는 꿈을 잃고 현실에 흔들리는 오늘날의 청춘을 대변한다.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주인공 장그래는 꿈을 잃고 현실에 흔들리는 오늘날의 청춘을 대변한다.
ⓒ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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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살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줄곧 만화만 그리면서 지냈다. 누군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우연한 계기로 손에 잡은 만화책을 보고서 따라 그리기 시작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리면서 실력이 점차 늘었다. 중학교 3학년 '클럽활동' 애니메이션부 시간에는 당시 강사로 초빙된 모 만화가로부터 "너, 조금만 더 다듬으면 이쪽으로 나와도 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만화계는 급감하는 판매로 시장이 죽어가는 중이었고, 유명 만화가 몇몇을 제외하면 생계를 이어가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화를 진로의 중심에 두겠다는 내게 주변의 만류가 이어졌고, 결국 나는 만화를 그리는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훗날 만화가들은 인터넷과 접목한 만화인 '웹툰'을 탄생 시키며 활로를 찾았으나 나는 진즉 겁을 먹고 꿈을 접은 셈이다. 17살의 어린 나는 스스로의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던 것에 좌절하고 있었고, 어두운 앞날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죽어 포기한 것이다.

7년 동안 열정을 쏟아 부은 무언가가 그렇게 내 손을 떠나자, 나는 의욕을 잃고 살았다. 작가로 꿈을 바꾸어 아주 작은 공모전에서 시를 써서 입상한 적도 있지만, 그럴수록 '내 그릇이 작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듯하여 자괴감만 깊어졌다. 결국 그저그런 성적으로 수능을 마쳐 지방의 3년제 대학에 들어갔고, 21살이 되어 남들이 가는 것처럼 군대에 갔다. 삶의 목표를 잃고 휩쓸리듯이 시간에 끌려가며 지냈다.

언제까지 아이처럼 징징대면서 지낼 수도, 박탈감에 젖어 멍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군대를 다녀오고서도 사실상 현실도피를 위해 호주에서 2년이나 지냈다.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그리스인 고용주로부터 '4년 노동비자 계약' 제의를 받았지만, '다른 기회가 있겠지'라고 생각했기에 거절하고 2010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혼자 힘으로 먹고 살아야 했기에 무엇이든 일자리를 찾았고, 알바든 뭐든 닥치는 대로 하면서 지냈다. 그러는 사이에 자격증을 따거나 스펙을 쌓지 않고 뭐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돌아보면, 1년간 다녔던 대학 학자금대출 이자를 갚고(학교는 그만뒀다), 원금까지 내 손으로 상환하는 일에만 매달렸더니 어느새 서른이 되었다. 여유가 없이 지냈더니 이젠 당장 일자리를 그만두고 쉬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잠깐 쉬면서 자격증 등을 알아보고 더 나은 직장을 찾고 싶지만 최저임금에 가까운 월급으로는 당장 생계를 꾸리기도 힘들다.

소모품에 가까운 계약직의 삶, 벗어나고 싶다

드라마 <미생> 예고편 중. 장그래는 고졸 출신으로 인턴기간을 거쳐 신입사원이 되는 인물이다.
 드라마 <미생> 예고편 중. 장그래는 고졸 출신으로 인턴기간을 거쳐 신입사원이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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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생>을 두고 자기만족하거나 위안의 도구로 삼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인공인 장그래나 인심 좋은 상사인 오 과장, 능력있는 안영이에 대입하면서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정작 다른 배역의 캐릭터에 가까운 인물인지도 모른다는 일침이다.

일견 맞는 말처럼 들린다. 나도 내가 결정한 선택으로 삶이 힘들어진 것을, 드라마를 보면서 자위할 생각은 없다. 사실 나는 장그래처럼 바둑판을 보듯 현실을 꿰뚫는 안목도 없고, 장그래를 연기하는 배우 임시완처럼 멋진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고졸 신분만으로 '불필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장면이, 지난 몇 년 간 내가 겪은 일들과 겹치면서 현실의 반영으로 보인다. 단순히 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런 차별적인 시선과 대우가 또 다른 누군가의 삶으로 번질까봐 그것이 안타깝고 또한 두렵다.

<미생>에서 장그래는 오 과장과 김 대리라는 좋은 인물을 만나 마침내 빛을 발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조차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고졸 출신의 계약직 신분으로 온갖 잡일을 하는 대가로 최저임금을 받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느 날 우연한 행운으로 성공하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님을 안다. 나도 그런 허황된 일을 꿈꾸면서 살아가지는 않는다. 다만, 낮은 학력과 비정규직이라는 고용상태로 인해 소모품에 가까운 대우를 받는 계약직의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생각해 보면 아찔해질 따름이다.

바둑판 위에 놓인 한 알의 바둑알 같은 신세, 아직 살아있지 못한 '미생'의 처지에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내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 '완생'을 살아가는 바람을 가져본다. 물론 어디서든 나름의 고민은 있을 테지만, 내 삶이 그저 '소비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도록 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는 상상 말이다.

그러자면 넘어야 할 벽이 많다. 드라마 <미생>에서 그려내는 갖가지 편견과 차별, 그 중에서도 '학벌'과 '스펙'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방식 같은 것은 점차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배경으로 '경쟁 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상황에서, 힘겹게 하루를 버텨내는 또 다른 많은 장그래를 향해서 건투를 빌어본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를 위해서도….

덧붙이는 글 | <그래, 나도 장그래였다> 응모글입니다.



태그:#미생, #장그래, #계약직, #고졸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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