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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밤이 되자 걸음을 걷기 시작했는데 참으로 비참한 광경을 보았다. 어두운 밤길에 신작로가 폭격을 맞아 길이 파인 것을 모르고 달리던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뒤집힌 것이다. 트럭 가득 피난민들이 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탈출을 못해 전복된 트럭에 그대로 깔려 아우성 도가니였다.

폭격을 맞고 있는 원산항
 폭격을 맞고 있는 원산항
ⓒ Naval History & Heritage Com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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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행으로 살아난 처녀 하나가 전복된 트럭을 붙잡고 "아무개야!"하고 차에 깔린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차에 깔린 사람들이 탈출하려고 버둥거릴 때마다 뒤집어진 트럭은 점점 주저앉고 말았다.

참사는 우리가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에 발생한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이 힘을 모아 트럭을 바로 세워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4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단 한 명도 살리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함흥 함락... 결국 다리 못 건넜다

우리는 밤새 걸어 새벽에 정평읍(현재 북한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읍)에 도착했다. 불빛이 하나둘 켜질 여명의 시각이었지만 마을은 칠흑같이 깜깜했다. 마치 모든 사람이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고요한 도시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동이 틀 때까지 잠시 쉬기로 했다. 날이 밝아 오자 다시 발길을 재촉해 정평 동북쪽에 있는 산촌을 찾아 거기서 하루를 보냈다. 강행군 끝에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산촌의 밤나무 숲에서 바라보는 주변 산천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예부터 원산, 덕원, 고원 세 곳은 모두 풍광이 아름답고 살기도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고장이었다. 멀리 함흥 방면 산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저녁에는 성천강 만세교를 건너 함흥 시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저녁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함흥을 향한 공습 강도가 더욱 세차고 대단했다. 우리 일행은 거센 공습을 피해 함흥시로 바로 들어가는 길을 포기하고 낭림산으로 가는 길을 택해 서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밤새도록 야간 행군을 한 후 먼동이 틀 무렵 어느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행군을 멈춘 뒤 잠시 쉬고 있는데 함흥이 UN군에게 점령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50년 10월 17일, 우리는 결국 함흥길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리가 길어 만년을 걸어도 건너지 못한다는 만세교 전설처럼 우리는 결국 만세교를 건너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가 머물렀던 마을 주변은 제법 험준하고 골짜기가 큰 산골이었다. 그 깊은 산 속의 냇가에 흐르는 물에 놓여 있던 조그마한 다리도 폭격을 피하지 못하고 박살이 나있었다. 전쟁의 포화는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어김없이 쏟아졌던 것이다.

걷고 또 걷고... 끝없는 행군

우리는 해질 무렵이 돼서야 또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깊은 산 속의 날씨라 그런지 예측할 수 없이 급변했다. 동쪽으로부터 먹처럼 시커먼 먹장구름들이 한가득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우리는 세찬 비바람 속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밤새 차가운 비를 맞으며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산마루에 올랐다. 구름이 걷힌 산 아래로 나무는 없고 풀들만 무성한 비경이 펼쳐졌다. 우리가 오른 산봉우리가 바로 낭림산맥 주류인 주봉이었다. 멀리 북쪽으로 향하는 작은 길이 보였다. 그 길로 80여 리를 더 가면 장진호(함경남도 장진군 장진읍에 위치한 호수)가 나온다고 했다.

산을 넘고 넘고... 오랜 행군에 헛것까지 보였다.
 산을 넘고 넘고... 오랜 행군에 헛것까지 보였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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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갯길에서 장진호의 빼어난 호반 풍경을 상상하며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을 수 있었다. 잠시 그었던 빗줄기가 다시 세차졌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산속 기후가 놀라웠다. 구름이 얼마나 많이 끼었는지 순식간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빗줄기가 다소 약해진 틈을 타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 내리막길은 산을 오르는 길보다 한결 손쉬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는 폭우를 뚫고 행진한 야간 강행군 끝에 날이 샐 무렵 평안남도 영원군 사창면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인근 산골짜기마다 후퇴하는 인민군으로 가득 차 부산하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함흥이 가까워서 그런지 해군도 눈에 많이 띄었다. 그 가운데 여군의 해군 복장은 하얀 제복이 마치 중학생 교복과도 흡사해 학생들이 산에 소풍 나온 것처럼 보였다.

낙오병과 도망병 속출

나는 병사들과 대화하는 그 동네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 고개를 넘기 전에는 사람들이 함경도 사투리를 썼는데 산을 넘어오니 평안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평소 여행을 못해 본 나는 '모두가 우리나라 사람인데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쓰는 말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하는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높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루고 폭포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사창 인근의 산세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이곳이 바로 대동강 상류 근원이라고 했다. 여기서 흐르는 물이 평양의 대동강을 거쳐 서해로 나간다고했다. 우리는 풍광 좋은 그곳에서 하루를 푹 쉬었다. 전언에 따르면 이튿날 날이 밝는 대로 맹산 방면으로 갈 것이라 했다.

이튿날 우리는 영원(현재 북한 평안남도 영원군 영원읍)을 향해 행군하다가 수많은 고향 친구를 잃었다. 밤낮없는 오랜 행군 끝에 병들고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분명히 함께 걷고 있었는데 잠시 고개를 돌려 보니 돌연 사라진 병사도 있었다. 어느새 낙오병과 도망병이 속출했다. 나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하나님을 굳게 믿고, 미신을 절대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중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도깨비가 나를 홀리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산을 넘노라니 멀리 컴컴한 숲 속에서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반딧불이 같은 시퍼런 불빛이 번쩍이고 부릉부릉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도 들렸다. '무엇이 있나'하고 가보면 아무도 없고,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뿐이었다. 그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보니 도깨비가 그렇게 홀린다고 했다.

나는 영원읍에 거의 도달했을 때 마침 내가 다니던 판교 국민학교 여선생님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며칠 전 고향 마을에 국군이 들어와 북으로 피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잠시 후 고향 동창생과 고향 처녀 몇몇도 만났다. 애타는 마음으로 고향 소식을 재차 물으니 이구동성으로 이천읍은 폭격에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고, 괸돌시장마저도 다 불타버렸다고 했다.

불타버린 고향 산천

그들이 하는 말이 "국군이 들어오자마자 마을의 반동 새끼들이 들고일어나 애국자들을 닥치는 대로 도끼로, 칼로, 낫으로 마구 찔러 죽여 버렸다"고 했다. "이를 피해 간신히 도망쳐 여기까지 피난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지 망해서 후퇴하는 줄 아느냐"며 "다음에 두고 보자"며 이를 박박 갈았다. 나는 고향의 가족들의 안부가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했다.

행군 도중 공습을 받아 죽은 군인이나 민간인도 가끔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원산서 폭격을 당할 때도 B29가 폭격하려고 비행기 배문을 활짝 열고 원산 상공을 비행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것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참변을 당하고 마는구나, 그래서 우리 동포들이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영원읍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전투 명령을 받고 완전 전투태세를 갖췄다. 완전 무장을 하고 무기도 새로 지급받았다. 나는 처음 M1 소총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격발기가 말을 듣지 않아 아시보 장총과 교환했는데 이것도 총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바꾸려고 했으나 다른 총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장 난 장총을 그대로 받아들었다. 게다가 고장 난 아시보 장총은 총창마저 꺾어지지 않았다. 키가 작은 나는 기다란 총을 간신히 걸머지고 다녔다.

아시보총.
 아시보총.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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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실탄 400발과 수류탄 4개도 받았다. 우리는 그날 밤 영원읍 극장에 모여 인민군 대열에서 도주하는 병사를 잡아 군사 재판을 하고 공개 처형하는 것을 보았다. 재판이 끝난 후 군관이 하는 말이 "동무들도 조국과 인민을 배반하고 반역하면 이 자처럼 처형된다. 반역자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똑똑히 보아 둬라"고 호통을 쳤다. 또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니 인민군 대열에서 도망하거나 불순한 사상을 절대로 가지지 마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군관의 살기등등한 위세에 겁을 먹고 아무 말도 못하고 해산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전투 명령을 받고 맹산(현재 북한 평안남도 맹산군 맹산읍) 방면으로 나가게 됐다. 개전 이래 우리는 최고로 좋은 식사를 하게 됐다. 고깃국도 실컷 먹었다. 생사가 달린 전투에 앞서 음식으로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식사가 끝난 뒤 앞으로 행군하면서 먹을 요량으로 쇠고기 삶은 고깃덩이를 다섯 근정도 따로 쌌다. 밥도 한 웅큼 뭉쳐서 군장에 쑤셔 넣고 배낭을 잔등에 걸쳐 맸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상관이 내게 가닥 가루 반 포대를 더 짊어지라고 했다. 할 수 없이 그것도 함께 가져가게 됐다. 그런데 짐이 너무 무거워 들기가 힘이 들었다. 아시보 장총 한 자루에 수류탄 4발, 실탄 400발을 휴대한 데다 식량과 짐이 추가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완전 군장을 한 채 잔등에 무거운 짐을 메고 맹산 방면으로 힘든 행군을 계속하게 되었다. 2시간쯤 힘들게 행군했는데 갑자기 방향을 바꿔 강계(현재 북한 자강도 강계시) 방면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 부대는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대열을 정돈한 후 목적지를 바꿔 다시 강계 방면으로 출발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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