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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 포스터
 영화 <카트> 포스터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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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여사님 잘 지내시나요? 지난 2007년 제가 홈에버를 그만둔 이후 연락이 끊겼으니 벌써 7년이 됐네요. 그때 막 결혼을 했던 저는 벌써 학부형이 됐습니다.

당시 여사님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었는데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됐겠군요. 그때도 혼자 두 아이 키우느라 힘겨워하셨는데 아이들이 큰 만큼 더 힘들어지신 건 아닌가 걱정이 앞서네요.

<카트>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 속 '선희'(염정아 분)인 여사님 이야기였습니다. 영화 속 대리 '동준'(김강우 분)인 저의 이야기이기도 했고요. 영화의 직접적인 배경이 됐던 상암점은 아니지만, 당시 비정규직 대량해고 문제는 모든 지점의 비슷한 문제였죠.

그때 여사님은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 케이스였지요. 까르푸가 홈에버로 인수되면서 그나마 비정규직 주부사원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저만 보면 "언제 정규직이 될 수 있느냐"고 재촉하시던 여사님이 더 이상 정규직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 시기가 바로 상암점 파업 때였습니다. 참 역설적인 것은 상암점 파업이 오히려 다른 지점 비정규직 여사님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때 일로 비정규직 여사님들은 그나마 자리라도 잃을까봐 노심초사했었죠.

"왜 정규직 약속 안 지키나"라던 여사님

회사 측의 일방적인 부당해고 통보에 항의하는 더마트 직원들. 영화 <카트> 중에서.
 회사 측의 일방적인 부당해고 통보에 항의하는 더마트 직원들. 영화 <카트> 중에서.
ⓒ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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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회식 때의 일입니다. 아이들 때문에 회식 때 식사만 하시고 빨리 자리를 뜨시던 여사님이 그날은 꽤나 과음을 하셨지요. 그리고 영화 속 '최 과장'(이승준 분)인 파트장에게 "왜 정규직 약속을 지키지 않냐"라고 따지셨습니다. 왜 본인보다 늦게 들어온 남성들은 먼저 정규직을 시켜줘 내 기회를 잃게 만들었느냐고 성토하셨지요.

과장은 회사가 어려워진 걸 어떡하느냐 반박했습니다. 그 과장은 남성 직원들이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일할 때 꼬박꼬박 칼퇴근하지 않았냐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급기야 회식 분위기가 험악해지기까지 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저는 1주일이 멀다 하고 이뤄지는 재고조사 때문에 수시로 밤을 새는 남성 직원들도 힘들다고 거들었습니다. 여사님들은 반찬값 벌러오는 거지만 여기 남자들은 다르지 않냐고도 하소연했습니다.

여사님은 한참 멍하니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때 여사님은 차마 자존심 때문에 말씀하시지 못하셨지만 영화 속 선희처럼 "나 반찬값이 아니라 생활비 벌러 온 것이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으셨겠지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때 철없이 지껄인 말 한 마디가 여사님께 얼마나 상처가 됐을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까짓 정규직에 왜 그렇게 연연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이해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으니 그냥 모른 척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여사님이 <카트>란 영화를 보셨다면 여사님은 영화 속 '혜미'(문정희 분)를 보면서 많이 눈물을 흘리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독 자존심이 강하셨던 여사님이 락커에서 진상 고객에게 무릎을 꿇는 혜미를 보고 울컥하지 않았을 리 없었겠죠. 또 동료들이 줄줄이 해직되거나 스스로 그만두는 상황에서 이를 물고 출근하셨던 여사님이 파업하는 동료들을 배신하고 계산대에 선 혜미를 보고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저 또한 가해자입니다... 미안했습니다

지난 2007년 7월 8일 오후 이랜드 그룹 계열사인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에서 장기점거농성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2007년 7월 8일 오후 이랜드 그룹 계열사인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에서 장기점거농성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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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카트>란 영화를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수익을 위해서 노동자는 그저 수단으로 치부했던 악랄한 홈에버 경영진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 장단에 놀아나 서로 각을 세우고 맞섰던 동료들의 상황 때문에 그랬습니다. 관망과 무관심으로 경영진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저 또한 가해자 중 하나라는 죄책감 때문에 그랬습니다.

여사님은 아직도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겠지요? 아마 여사님은 그러실 거라 생각됩니다. 아니,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불과 몇 년 차이로 정규직이된 동료 여사님들을 보면서 아쉬워하거나 부러워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예전에 정규직 희망이 있을 때도 가끔 차라리 포기하는 게 속이 편하다고 하셨던 여사님이셨으니 이제는 정말 체념하셨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그런 생각을 하니 맘이 또 아립니다.

영화 <카트>에서 선희와 혜미는 '여사님'이라는 호칭을 싫어합니다. 언젠가 여사님도 제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죠. 하긴 불과 다섯 살 많은 30대 후반 여성에게 '여사님'이라는 호칭이 듣기 좋을 리 없겠지요.

사실 고객이란 말 만큼이나 위선적인 호칭이 여사님이었죠. 하지만 오늘 부르는 '여사님' 호칭은 진심이 담겨있다고 믿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여사님, 그때 제가 욕심이 넘쳐 여사님의 어려움을 외면했습니다. 그때 제가 정의와 불의를 제대로 분간할 줄 몰라 여사님 편에 서지 못했습니다. 여사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때 제가 많이 미안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글은 개인 제 개인 페이스(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516304729)에도 중복게재합니다.



태그:#카트, #홈에버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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