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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너른 들녘에 철새들이 찾아왔습니다.
 강화도 너른 들녘에 철새들이 찾아왔습니다.
ⓒ 최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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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나 봐. 그러니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지." 

강화로 이사 와서 살아보니 정말 좋다며 연신 우리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양도면에 사는 옥희씨가 자평한다. 그러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이 걷던 이들이 "맞다, 맞아. 강화도는 정말 좋은 곳이야"하며 호응하더니 한 발 더 나가서 '강화도는 축복받은 땅'이라며 이구동성으로 한목소리를 낸다.

천국도 혼자서 산다면 며칠 못 가 지루한 곳이 될 텐데,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사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더구나 아무 때고 신발을 고쳐 신고 나서면 바로 포실 포실한 흙길을 걸을 수 있으니 강화도에 사는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축복받은 땅, 강화도

"강화도를 일주일에 한 번은 찾아오는 우리도 복이 많은 사람들이야. 이렇게 좋은 길을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니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이 분명해." 

인근 고양시에서 온 오영이씨도 한마디 거든다. 아프지 않고 건강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며, 이렇게 자연을 즐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거라고 한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 이 얼마나 큰 복인가. 더구나 자연을 찾는 마음의 여유까지 가졌으니 이보다 더한 복은 없을 것이다. 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새삼 자신이 참 잘 살고 있음을 느낀다. 건강해서 고맙고, 이웃이 있어 더 감사하다.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는 길벗들.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걷는 길벗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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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대교 건너 있는 갑곶돈대에서 광성보까지 두어 시간 동안 쉬엄쉬엄 걸어왔다. 해안의 둑길을 따라 걷는 내내 바다가 우리와 함께했다. 썰물이 들어 물이 빠져나간 바다는 마치 호수처럼 보인다. 갯벌에서 작은 게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찾다가 발걸음 소리에 놀랐는지 황급히 구멍 속으로 몸을 감춘다. 해안가 둑길의 풀들은 물기를 바짝 말려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평화롭다.  

바다는 잔잔하다. 떠다니는 배들도 없으니 누가 바다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호수나 강인 줄 알 것 같다. 이 바다가 한때 치열한 전장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멀지도 않은 과거, 140여 년 전에 강화해협은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다.   

1866년 8월에 있었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격침 사건은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조선 원정대'를 만들어 1871년 6월 1일에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조선군은 대포를 쏘며 적의 침입에 대항했다. 광성보에서 있었던 조선군과 미군 사이의 포격사건은 열흘 뒤인 6월 10일에 전쟁으로 이어졌다. 강화해협에서 이틀에 걸쳐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다. 

1871년(고종 8년) 6월 10일, 미군은 조선원정대에 속한 1230명의 병사들 중 절반 가까이 태우고 초지진 앞바다에 나타났다. 미군의 강화도 상륙작전은 초지진에 대한 치열한 함포사격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은 적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함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전이나 현대전이나 예외 없이 포 사격으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적에게 공포감을 주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다. 

 썰물이 들어 물이 빠진 광성보 앞 갯벌
 썰물이 들어 물이 빠진 광성보 앞 갯벌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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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의 함포 사격에 초토화된 초지진

약 2시간 동안 함포 사격을 한 후에 해병 2개 중대를 비롯한 많은 병력이 야포와 소총을 쏘면서 초지진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초지진에는 병사가 하나도 없었다. 미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한 번 하지 않고 초지진에 무혈 입성했다. 대신 그들의 행군을 막은 것은 무릎까지 빠지는 질퍽한 갯벌이었다. 미군은 이 갯벌을 건너 초지진까지 오느라 진을 다 뺏다. 

강화의 갯벌은 그들에게 이기기 힘든 적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초지진 앞 갯벌을 빠져나오느라 힘을 소진한 미군은 그곳에서 하룻밤 야영을 했다. 그들은 초지진의 모든 군사시설들을 다 파괴해 버렸다. 강화해협을 향해 설치되어 있던 대포 40문도 바다속으로 빠트려버렸다.

6월 11일의 날이 밝았다. 미군은 초지진에서 약 2.2km 떨어져 있는 덕진진을 향해 진군했다. 그들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기가 충전한 미군은 덕진진까지 한달음에 달려갔고 해상의 맹렬한 함포사격의 지원 아래 덕진진 또한 쉽게 함락시켰다. 덕진진에 설치되어 있던 대포 60문도 굴려서 언덕 아래 바다로 밀어 넣어버렸다. 

조선은 바다를 통한 적의 침입에 대비했지만, 미군의 첨단무기 앞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세상은 이미 저만큼 앞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소홀했다. 그래서 미군의 침입에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 초지진과 덕진진은 미군 함정에서 쏘아대는 함포 앞에 무너졌다. 

덕진진에서 광성보까지 가는 길은 지금은 이차선 도로로 잘 닦여 있지만, 신미년 당시에만 해도 진창과 잡목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육지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야 했다. 그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조선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끼와 낫 등을 들고 잡목을 자르고 웅덩이를 메우면서 진격하였다. 낮 12시가 지나서야 미군은 광성보 옆의 작은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깍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있는 광성보의 용두돈대.
 깍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있는 광성보의 용두돈대.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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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을 지켜준 건 면갑 뿐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여름의 초입인 6월 11일이었다. 한낮에 접어들자 태양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무거운 야포를 끌고 밀며 가던 미군 병사들은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진창과 암벽을 빠져나오고 기어오르느라 악전고투한 그들 앞에 조선군 장수의 깃발이 펄럭이는 광성보의 성축이 보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과 600여 명의 조선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진무영'을 만들어 강화도를 방어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미군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군졸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질적으로 보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조선군이 가진 무기는 보잘 것이 없었다. 

조선군이 가진 대포는 통나무로 만든 포좌에 고정이 되어 있어서 움직이는 목표물에 맞춰 방향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고 사정거리 또한 짧았다. 게다가 이 대포들은 16~17세기에 제조된 것들이어서 거의 골동품 수준의 무기들이었다. 또 병사들이 지니고 있는 개인 화기인 총은 오래된 화승총으로 한 사람이 목표물을 조준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어깨 위에 총신을 올려놓은 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총을 발사하면 고막이 터질듯이 소리가 컸지만 화력과 명중률은 보잘 것이 없었다. 오죽하면 미군들이 이런 말을 했겠는가.

"조선군은 맨 주먹으로 전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솜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만든 전투복뿐이었다."

당시 조선군들은 '면갑(綿製背甲)'이라는 일종의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이 옷은 무명을 13장 이상 겹쳐서 만들었는데, 이는 조선군이 사용하는 화승총의 총알이 면 12겹은 관통하지만 13겹은 뚫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에서 만들어진 옷이었다. 조선군은 목면의 질긴 섬유질이 날아오는 총알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사거리(射距離)가 120m인 화승총으로는 이 면갑을 뚫지 못했다. 

 면을 13겹 이상 덧대어서 꿰맨 조선시대의 방탄복 '면갑'.
 면을 13겹 이상 덧대어서 꿰맨 조선시대의 방탄복 '면갑'.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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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군이 몰랐던 게 있었다. 미군의 총은 화력이 대단해서 면갑 정도는 뚫고도 남았다. 당시 미군이 소지하고 있던 총은 사거리 400m의 레밍턴 롤링 블록 소총과 사거리 914m의 스프링필드 소총이었는데 면갑 정도는 뚫고도 남음이 있는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조선군의 믿음과는 달리 이 면갑은 총알을 막아주지 못했다. 한겨울도 아닌 여름에 십여 겹으로 덧댄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으니 어떠했겠는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이 줄줄 흘러내렸고 행동 또한 둔할 수밖에 없었다. 또 총알이나 포탄의 파편을 맞았을 경우에는 옷에 불이 붙어 생명을 지키려고 입었던 옷이 오히려 목숨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옷에 불이 붙은 병사들은 급한 김에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조선군은 분전했다. 적의 함포를 맞은 진지는 부서지고 불타올랐으며 최신예 무기 앞에 군사들은 쓰러져 갔다. 그래도 누구 하나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은 목숨을 다해 싸웠다. 조선군은 창과 칼로 미군과 대적했다. 무기가 떨어지자 돌멩이를 집어 던지고 심지어 모래와 흙을 집어 뿌리기도 했다. 최후의 순간에 바다에 뛰어들거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군은 적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다.  

광성보에서의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들은 광성보 진중(陣中)에 게양되어 있던 조선군 대장(大將)의 군기(軍旗)인 '수(帥)'자기를 끌어내리고 대신 성조기를 달았다.

다음 날인 6월 12일 아침에 미군은 강화해협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광성보에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간 조선군의 시신만이 무너지고 깨진 광성보를 지키고 있었다.

 신미양요 때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들.
 신미양요 때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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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되느니 죽음을 택한 조선군

침략자들을 맞아 맨몸으로 백병전을 치르며 싸웠던 조선군들은 포로가 된 20명을 제외한 350여 명이 전사했다고 미군 측 기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온전하게 수습된 조선군의 시신은 모두 합해 53구 밖에 없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부하들을 독려하며 적과 맞섰던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인 어재순, 그리고 51구의 시신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미군이 조선군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불을 질러 버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조선군 부상자들이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적이 물러간 뒤에 시신들을 수습하며 보니 버선을 뒤집어 신고 있는 시신이 보였다. 또 머리에 검은색 띠를 두르고 있는 시신도 있었다. 전황이 워낙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버선을 뒤집어 신은 줄도 모르고 전투에 투입이 되었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그들을 보내는 식구들도 형제가 이번 전투에서 죽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죽은 시신들 속에서 쉽게 형제를 구별하기 위해서 서로 약조를 하고 그렇게 머리에 검은 띠를 두르고 또 버선을 뒤집어 신었던 것이다. 형인 어재연 장군은 검은 띠를 둘렀고 아우인 어재순은 버선을 뒤집어 신었다. 그것을 보고 식구들은 형제를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미양요 때 광성보의 조선군 장수 깃발을 빼앗아 간 미군.
 신미양요 때 광성보의 조선군 장수 깃발을 빼앗아 간 미군.
ⓒ 강화역사문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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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양요 때 마지막 순간까지 적과 싸우다 쓰러진 조선군.
 신미양요 때 마지막 순간까지 적과 싸우다 쓰러진 조선군.
ⓒ 강화역사문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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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군사들을 독려하던 어재연 장군과 또 죽기를 각오하고 물러서지 않는 조선군들을 보며 미군도 숙연한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미 해병대의 기록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우리가 전투에는 이겼으나, 아무도 이 전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이 전투를 기억하고자 하지 않았다. 1871년의 조선 원정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전이다. 우리는 물리전에서는 이겼다. 그러나 정신전에서는 졌다."

슐레이 대령도 말했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총에 탄약을 갈아 넣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 창과 검으로 공격했다.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적들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부상자들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했다. 조선군은 낡고 뒤떨어진 무기를 가지고도 미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어갔다. 아마 우리는 가족과 나라를 위해 그처럼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군인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무기를 가지고도 미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운 조선 군사들을 보며 미군은 부끄러웠다. 그들은 조선 군사들이 끝까지 보여준 높은 투쟁 정신과 애국심에 감동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투에 이겼지만 그 승리가 자랑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갯벌에 박혀 있는 그릇 파편, 신미년의 병사들인 듯...

광성보의 손돌목돈대에 서니 강화해협이 훤히 다 내려다보인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초토화시키고 광성보로 거침없이 올라오는 적 함대를 바라보던 조선군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거대한 철선이 물살을 가르며 올라오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열 겹도 넘게 겹쳐 만든 면갑에 의지한 채 대포에 포탄을 장전하고 창칼을 겨누었을 조선군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광성보 아래 갯벌에 박혀 있는 도자기 파편.
 광성보 아래 갯벌에 박혀 있는 도자기 파편.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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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음력 사월 스무 나흗날 오전의 바다는 어떠했을까. 물이 가득 차서 광성보 아래까지 찰랑댔을까, 아니면 오늘 이 바다처럼 한껏 물이 다 빠져나가 갯벌이 드러났을까. 대포 소리에 혼비백산해서 물고기도 작은 게들도 얼씬하지 않았던 바다였으리라.

둑길 밑으로 내려가 보았다. 갯벌에 깨진 그릇 조각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기왓장 파편들도 간혹 보인다. 백여 년 넘게 밀려오고 또 물러나는 물살에 휩쓸려서 그릇 모서리들은 뭉툭하게 닳았다.

갯벌 여기저기에 박혀있는 그릇 파편들이 백사십 여 년 전의 옛날로 우리를 데려가 준다. 적의 함포에 맞아 깨지고 무너져 내린 게 광성보만은 아니었구나.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군졸들의 혼령들이 아직도 광성보 앞 바다를 헤매고 있는 듯이 보였다.

'강화도는 축복 받은 땅'이라며 환호작약하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강화도 사람이 된 것 같다며 고마워하던 옥희씨도 잠잠히 발밑만 바라보며 걷는다. 갯벌 흙 밖으로 반쯤 몸을 내밀고 있는 그릇 파편들을 앞에 두고 모두 잠잠해졌다. 깨진 그릇 조각들이 마치 수많은 군졸들의 흔적이기라도 한 양 모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해마다 음력 사월 스무 나흗날이면 광성보에서는 '광성제'가 열린다. 목숨을 다해 나라를 지킨 어재연 장군과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을 기리는 날이다. 그날이면 지나가던 바람도 잠시 쉬었다 가고 세차게 흐르던 바닷물도 잠잠히 흘러가는 듯하다. 백병전이 벌어졌던 손돌목돈대에는 고요한 평화만이 감돈다. 자욱한 포연 아래 죽음이 머물던 전장에는 늦봄의 햇살이 고요히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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