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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재 86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화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수풀에서 짐승처럼 기어나와 투항하는 인민군 병사.(1951. 9. 20.) <박도 시민기자 제공>
▲ 총구 앞에서 투항하는 병사 수풀에서 짐승처럼 기어나와 투항하는 인민군 병사.(1951. 9. 20.) <박도 시민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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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함경남도 덕원(현재 북한)으로 가는 도중 폭격을 서너 차례 당했는데 다행히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녁 때 어느 골짜기에 모였는데 여기서 인민군 45사단을 창설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인민군 45사단 1련대 1대대 2중대 1소대가 되었다.

(관련기사: [전쟁포로①] 인천상륙작전 시작... 나는 인민군이 되었다)

우리 동네(이북 강원도 이천읍 판교면 명덕리)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부대로 편성되었다. 저녁 때 우리를 통솔할 지휘관이 배치되었는데 마침 초등학교 일 년 후배이며 한동네에 살던 장명진이 3소대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모두 소대장 계급을 단 그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그날부터 인민군 군사훈련을 받고 정치사상 교육도 받았다. 그러나 날마다 공습을 피하느라 낮에는 솔밭 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모여서 정치 교육, 사상 교육을 받았다. 쉴 때도 피곤하다고 개별적으로 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노래하고 군가를 부르며 언제나 단체 행동을 하며 쉬도록 했다. 개인의 자유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시월이 되자 공습이 점점 심해지더니 전황이 눈에 띄게 불리해졌다. 소문에 의하면 UN군과 국군이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여 온다고 하였다.

낙엽송 솔밭에 숨겨둔 탱크 30여 대 순식간에 박살

하루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적기가 나타나 공습을 시작하는데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비행기가 지나가면 또 다른 비행기가 어느새 날아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쉴 새 없이 공습하다가 낙엽송 솔밭에 숨겨두었던 탱크 30여 대를 발견하고는 그 곳에 폭격을 가하는데 어느새 그 많던 탱크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도 모르게 밤에 숨겨둔 탱크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 들리는 말에 미군 정찰기 한 대를 격추했다고도 하였지만 사단 사령부 앞에 있던 트럭이 폭격 당하는 것도 목격했다. 하늘 높이 아홉 대로 편성된 비행기 편대가 강원도 문평 아연제련소(현재 북한)를 폭격하는 것도 보았다. 폭탄을 맞아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데 사이 사이로 높은 굴뚝이 보였다. 누군가 말하길 문평 아연제련소의 굴뚝이 진남포 제련소 굴뚝보다 더 높다고도 했다.

우리는 10월 10일 밤 열시, 덕원에서 후퇴를 하였다. 멀리 원산에 대한 연합군의 함포 사격도 더욱 요란해졌다. 원산에서 함흥으로 가는 국도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자동차 2대가 겨우 빗겨갈 정도의 너비로 길이 좁았다. 가뜩이나 좁은 길은 후퇴하는 인민군과 피난민으로 꽉 메워졌다. 

우리는 어두워지는 저녁이면 암호를 써가며 대열이 서로 흩어지지 않게 했다. 암구호는 1대대는 백두산, 2대대는 한라산을 사용하며 후퇴를 했다. 군인과 피난민이 뒤섞여 후퇴를 하다 보니 나오는 차량, 들어가는 차량을 만날 때마다 대열이 뒤엉켜 혼란 속에 이합집산을 거듭하곤 하였다. 그 와중에도 밤이면 적기들이 와서 조명탄을 터뜨리고 폭격과 기총 사격을 가하면 우리 대열은 또 다시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곤 하였다.

그나마 우리 군인 행렬은 괜찮았으나 피난민 대열은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어린애와 부모들이 자식을 부르는 소리로 참혹한 아비규환 속에서 후퇴를 해야만 했다.

날이 밝아왔을 때 우리는 평양으로 가는 길에 도달했다. 날이 밝고 보니 길에 즐비하게 늘어선 피난민 중에 밤 새 가족을 잃고 서로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곳 산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때 갑자기 비행기 한 대가 공중 높이 떴다가 급히 하강하며 우리와 부딪칠 듯 거의 수평으로 날아오는 느낌에 모두는 깜짝 놀라 땅에 납작 엎드렸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하늘 멀리 사라졌지만, 굉음에 놀라 비행기가 실제 고도보다 낮게 나는 듯한 착각을 한 것이다.

이때 누군가 죽은 시체를 보고는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도 죽나?"하고 한탄하였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기총소사 총알이 어깨로 들어와 망자의 치부로 빠져 나왔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죽어도 그리 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날도 어둠을 틈 타 밤에 북으로 행군했는데 심신이 몹시 고단하였다. 

우리는 밤을 새워 걸어 고원읍(함경남도 고원군)에 도달하였다. 고원은 폭격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부서져버리고 검게 그을린 폐허만 남아 그 많던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가남이라는 곳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고원 일대 넓고 넓은 벌판에는 야산도 많았지만 논도 많았다. 나는 거기서 피밥을 먹었다. 주민이 식사로 주먹밥을 해왔는데 좁쌀 밥인 줄 알고 밥을 지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피쌀로 만든 밥이었다는 것이었다.

하가남에선 의용군을 많이 보았다. 홍천, 춘천, 원주 지방에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말을 들어보니 전쟁은 이북에서 먼저 남침을 한 것이지 이남에서 북침을 한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6·25 당시 춘천으로 밀려오던 인민군 탱크 이야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어려 보였다. 나이가 기껏해야 열 일곱 전후로, 아무리 많아야 스물 다섯은 넘지 않아 보였다.

열일곱 살 의용군은 북으로, 북으로...

징병된 사연을 들어보니 동네에서 인민군이 갑자기 모두 학교로 모이라고 해서 책가방만 달랑 들고 왔다가 그 길로 끌려 왔다는 것이다. 아무도 드러내고 말은 못하였지만 남쪽 고향에서 끌려와 갈수록 북으로 향하는 걸 두렵고 걱정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행군 도중 우리 일행 다섯은 하도 배가 고파서 무밭에서 무를 뽑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적기가 나타나 기총 사격을 했다. 우리 모두는 재빨리 밭두렁에 엎드려 꼼짝도 않고 죽은 체 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적기는 어느새 멀리 날아가 버리고 사방이 고요했다.

우리들은 그때서야 안심하고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다 일어섰나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한 명이 일어나질 못했다. 혹시 죽었나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가보니 다행히 죽지는 않고 비행기에서 쏜 기관총 탄피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앉은 그를 보니 방한모 아래 약간의 상처가 있고 시뻘건 피가 흘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천행으로 방한모 덕분에 살아난 것 이었다.

모두 무사히 본대로 돌아온 우리는 무서리를 하다가 크게 혼줄이 났기 때문에 그 일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늘 멀리 B29가 고도 6000미터 고공에서 기총 사격을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저 비행기는 지금 어디를 쏘고 있는 거지?'라고 말했지만, 모두들 무심하게 하늘만 바라볼 뿐 어느 누구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 언덕 너머로 고원읍민들이 줄을 지어 피난길에 나선 행렬만 길게 뻗어 있었다.

밤이 되자 나는 '고원읍을 떠나 하가남을 지나 얼마나 멀리 왔을까? 이곳은 어디지?' 하는 생각을 하며 이름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곳에서도 피난 행렬을 수도 없이 목격하였고 부모를 잃은 미아들도 많이 보았다.

다음 날 저녁 무렵에는 영흥읍(현재 북한)을 지났다. 그곳에서는 공습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건물이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폭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도 부서진 잔해와 함께 불에 타 죽은 모습도 보았다. 사람이 타는 역한 냄새에 속이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모두 경황이 없어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을 보고도 모른 채 지나쳐 버렸다.

우리 대열은 영흥읍을 빠져나와 북으로 향하였다. 길을 걷는 동안 철로 길에서 멀어져 고개 길로 접어 들었다. 고개로 올라가는데 인민군 트럭 한 대가 전복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는 도와 달라고 하였다. 우리 일행 수십 명이 달려들어 차를 밀어 바로 세웠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인민군 병사들이 차에 치어 신음하는 동료 부상병을 치료하기는 커녕 바로 그 자리서 총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군을 재촉하여 원산 방향으로 전투를 하러 간다고 하였다.

아군이 아군 죽이는 모습에 어리둥절...

한국전쟁 중 적군의 시신을 밧줄로 끌어 모으고 있다. <박도 시민기자 제공>
 한국전쟁 중 적군의 시신을 밧줄로 끌어 모으고 있다. <박도 시민기자 제공>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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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에는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 모습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이유를 들어 본즉 사랑하는 전우지만 중상을 당한 그들을 후방으로 후송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면 적군에게 포로가 될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죽였다는 것이었다. 

밤새 걸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잠을 자면서 걸었다. 행군 도중 갑자기 '딱'하고 이마가 가로수 나무에 부딪혔다. 얼떨결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 말고도 행군 도중 조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후퇴 길에 500m 내지 1km 간격으로 군용 트럭이 한 대 꼴로 폭격을 맞고 부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정신없이 도주하느라 도대체 어디를 지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누군가 말하기를 유엔군이 바로 지척인 영흥읍까지 들어왔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아직 영흥 근처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 밤 우리는 농가에서 잠을 자고 오랜만에 밥도 맛있게 먹었다. 낮에는 공습이 심해 밖에 나가지 못하고 숲속에서 하루를 지냈는데 그 덕분에 나는 밤나무 밑에서 밤을 수도 없이 주워 먹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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