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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여자 교수: 진라오스, 내가 Z학생의 부모와 잘 아는 사이인데, 그 학생 성적을 알 수 있을까요?

한국 여성: 제가 Z 어머니와 아주 친해요. 그래서 말인데, 그 애 어머니가 교수님께 식사 초대를 하네요. 오실 거죠? 꼭 오셔야 합니다.

한국 남성: 전 Z 아버지와 막역한 사이입니다. 요즘 그 양반이 아들 때문에 걱정이 많아요. 교수님과 만나서 의논을 하고 싶다는데, 언제 시간이 나십니까? 나 참, 그러지 말고 한 번 나오세요. 부담 가지실 필요 전혀 없다니까요. 사실 그 애 아버지가 경찰 간부예요. 그동안 한인회 사정을 얼마나 많이 봐줬는데, 중국에서 '관시'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제 체면을 봐서라도 거절하지 마시고... 아휴, 그럼 그 양반 빼고 나랑 만납시다. 그건 되죠?

어느 학기말, 나는 며칠간 계속 낯선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 연구실 전화가 아닌 내 휴대폰으로 말이다. 다들 첫마디가 Z의 부모와 가까운 사이라고 했다. 그들은 공손하게 말했지만, 전화 거는 사람이 바뀔수록 목소리에 조바심과 묵직한 압력이 묻어나왔다. 맨 처음 중국인 교수가 전화했을 때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직 평가 중입니다."

에둘러 말하길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가끔 상대방의 말을 다르게 해석한다. 그녀도 그랬던 것 같다. 내 말을 불합격(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60점 미만이면 불합격, 한국의 F학점에 해당한다)이라고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뭔가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아무튼 그 다음 전화부터는 한국 여성과 남성으로 바뀌었다.

동료 교수와 한인회 관계자까지 동원

나는 학부모가 왜 식사 초대를 하는지 알기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한국인 끼리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럽긴 했다. 특히 자신을 한인회 관계자라고 소개하는 남성에게는 한인회 이름 때문에 더 조심스럽고 난감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성적 평가는 저의 권한입니다. 제 원칙대로 할 겁니다. 중국에서 관시(关系 인맥, 연줄), 중요하지요. 그런데 저는 사업가가 아니고 교육자입니다. 관시 때문에 덕 보는 학생도 있지만, 피멍드는 학생들도 있더군요."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잠깐 식사라도 하면서 학부모 이야기도 듣고 조언도 해주면 될 것을, 그것도 교육자가 할 일이 아닙니까?"

구슬리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별일도 아니라고? 그럼 왜 하필 성적 평가 기간에 이 난리를 피운단 말인가. 별일도 아닌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식사초대를 하거나 선물을 하는 중국인은 없다. 일단 만나면 거래가 오가고 그 다음엔 결과를 보여야 한다.

내 경험으로 만만한 중국인은 없었다. 중국인의 생각과 표현방식은 상당히 복잡하고 이중적이다. 자칫 '어어...' 하다간 상대방의 분위기에 말려 들어간다. 협상 테이블에서 중국 측이 '하오(好)'하며 술술 풀렸던 일이 갈수록 꼬이는 경우도 있다. 성격 급한 한국인은 중국인이 '하오'하면 이야기가 잘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하는 중국인은 '하오'하며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한다.

또 중국이 아무리 관시(关系) 사회라고 해도, 외국인이 정당하지 않은 일에 연결되면, 겉으로 "하오 하오" 하던 중국인이 속으로는 깔볼지 또 누가 안단 말인가.

그 후로 남자는 몇 번 더 전화를 했다. 나는 재차 내 입장을 고집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동안 짜증이 일었고 전화를 끊고 나면 미안해졌다. 내가 그런 전화를 받기 싫은 것처럼 그 사람도 그런 전화를 하기 싫었을 것이다. 타국에서 한국 사람의 부탁을 뿌리쳐서 미안했고, 나 때문에 난처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 한인회 사람이라면, 한인회 사람이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어 서글펐고, 생면부지의 한국인을 중간에 세워 설왕설래하게 만드는 Z의 부모에게도 화가 났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요상했다. 그런 전화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Z에게 D에 해당하는 점수를 줄까, 아예 정신이 버쩍 들게 불합격을 줄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편한 전화가 오가면서, 전화를 거는 사람도 전화를 받는 나도, Z의 학점이 이미 불합격으로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와 달리 기가 팍 꺾인 채로 주뼛주뼛 내 눈치를 살피는 Z를 보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불합격 점수 언저리에 있는 서너 명의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 성적 제출일은 1주일 정도 더 남아 있었다. 복도에 전시된 그들의 과제물을 다시 보았다. '개떡'같이 만들어도 일단 내기만 하면 불합격은 면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1주일 시간을 주겠다. 설계 내용을 보완하고 수정해서 다시 만들어라. 그러면 재평가를 하겠다.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너희들이 결정해라."

나는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평소같으면 펄쩍 뛰며 앓는 소리를 낼 녀석들이 어쩐 일로 "고맙다"는 말까지 했다. 그간의 상황이 학생들 사이에 퍼진 모양이었다. 나는 Z에게 따로 한마디를 했다.

"학점은 우리끼리 해결하자. 너도 어른이잖아."
"예. 죄송합니다."

Z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바짝 얼어버린 학생들은 잘하지는 못해도 어쨌든 열심히 해서 재평가를 받았다. 다행히 아무도 불합격 점수를 받지 않았다. 다음해 나는 졸업작품전에서 Z를 오랜만에 보았다. 앙금이 남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Z는 내게 자신의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주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어색하지만 바짝 붙어서 사진을 찍었다.

헤어질 때 Z가 말했다. 작년에 "미안했고, 고마웠다"고. 돌이켜보니 나는 나의 학생 Z를 염려하기보다 Z부모와 감정싸움을 벌인 것 같았다. 그때 겁먹고 불안해하던 Z는 이제 졸업을 앞두고 내게 먼저 다가왔다. 나는 Z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도 미안했고, 고맙다"고.

그 전에는 학교 어느 조직의 장(長)이 부하 직원을 시켜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잘 차려입은 중년 부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가 고향사람이고 산동성에서 꽤 잘나가는 회사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예외없이 나는 식사초대를 받았고 그녀는 새빨간 상자를 내밀었다. 그녀는 이번에 내 수업을 듣게 된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대학 졸업 후 중국 최고의 명문 대학원에 들어갈 아이라서 성적이 아주 중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북경오리 전문점 전취덕(全聚德)의 제왕실, 비싸고 화려한 장소일수록 상대방에게 제대로 대접받는 기분을 준다. 칭다오에서는 손님 접대를 할 때 광동식 해산물 전문점 순펑(順峰)과 해산물 훠궈점 순펑페이뉴((順風
肥牛)를 즐겨 찾는다고 한다.
 북경오리 전문점 전취덕(全聚德)의 제왕실, 비싸고 화려한 장소일수록 상대방에게 제대로 대접받는 기분을 준다. 칭다오에서는 손님 접대를 할 때 광동식 해산물 전문점 순펑(順峰)과 해산물 훠궈점 순펑페이뉴((順風肥牛)를 즐겨 찾는다고 한다.
ⓒ 전취덕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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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열심히 하고 잘 하는 학생은 성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원래 학부모한테 식사초대나 선물을 안 받는 게 원칙이다, 고맙지만 마음으로만 받겠다"며 사양을 했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성의니 꼭 받아라",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잠시 실랑이가 일었다. 버티다 못한 나는 수업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그가 끼어들었다.

"진라오스, 여기는 중국입니다. 그냥 받으세요. 그래야 중간에 있는 내 체면이 섭니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인가, 직책을 내세워 나를 압박하는 것인가. 얼마 전 학교를 그만둔 한국어 선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학기말이면 상부에서 전화가 와요. 누구누구의 성적을 올려 달라고요. 그리곤 나도 모르게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식사 자리에 끼게 되고... 아, 그때의 기분이란 정말...."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식사 자리에 끼면..."

지금 내가 저 빨간 상자를 받고 같이 식사를 하게 되면 계속 이런 일에 휘둘리겠지, 그러니 이번에 아예 싹을 자르자, 못을 박아두자, 필요하다면 뻥이라도 치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중국인은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한다고 들었습니다. 손님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극진한 대접이 아닐까요? 지금 저는 수업 도중에 여기에 왔습니다. 복도에 오고가는 학생들이 모르겠습니까? 내가 이 선물을 들고 나가면, 나중에 성적이 좋아도 다른 학생들이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또 그런 선생을 학생들이 믿겠습니까?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도 그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이가 없고 불쾌했을 것이다. 내가 중국인의 정서를 무시하고 체면을 깎은 무례한 사람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다. 잠시 후 그들로부터 알겠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문고리를 잡은 내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 일로 내가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와 학교에서 마주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여전히 내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다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그녀의 아들이 마음고생을 했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 학생은 한 학기 내내 주눅 든 채 내 수업에 들어왔다.

듣자하니 그런 청탁을 받는 교직원들도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관시로 연결된 인정과 체면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고, 내키지 않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기도 싫으니 말이다. 할 수 없이 속으로는 그런 부모가 자식을 망친다며 불평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어쨌든 나도 하긴 했다' 정도로 관여하게 된다. 어떤 간부는 청탁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이렇게 당부했단다.

고급 음식점과 거리가 먼 서민들이 한 끼를 때우는 길거리 음식점
 고급 음식점과 거리가 먼 서민들이 한 끼를 때우는 길거리 음식점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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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격이다 싶으면 아예 성적을 확 내려요. 점수를 55점, 이렇게 주니까 5점이 아까워서 부탁을 하는 거예요. 5점, 10점, 이렇게 확! 그러면 창피해서라도 부탁을 못해요, 알겠죠?"

하지만 그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가르친 중국 학생들은 거의가 출석률이 높고 이른바 자체 휴강이란 것도 없다. 학생마다 과제물의 수준은 다르지만, 중간과 기말 과제물도 꼬박꼬박 제출한다. 그러니 아무리 낮게 점수를 줘도 40~50점은 넘게 된다.

성적 청탁... 누군가는 '피' 본다

그 이후 더 이상 성적 때문에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이런 일이 있었다. 일찌감치 내게 배정된 반이 개학하기 직전에 갑자기 바뀌었다. 어차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니 어떤 반이든 상관이 없지만, 처음 있는 일이라 이상하긴 했다. 한참 지난 후 그 숨겨진 이야기를 바뀐 반 학생한테서 듣게 되었다.

"원래 진라오스가 맡았던 반에 아무개의 딸이 있어요. 그 애가 자기 아버지에게 담당 교수를 바꾸고 싶다고 했고, 그 아버지는 관시 있는 학교 간부에게 부탁을 했대요. 그래서 반이 갑자기 바뀐 거예요."

그동안 내가 어지간히 빡빡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이미 청탁 사건을 겪었던 터라 나는 처음에 '차라리 잘 됐다. 나중에 피곤해지느니 미리 알아서 피해줘서 얼마나 다행이야!' 싶었다. "그래서 네 마음은 어때?" 내가 물었다.

"뭐, 그 애는 공주이니까... 이미 습관이 되었고... 그래도 이게 문제긴 문제인데...."

패기발발할 20대의 얼굴에서 분노보다 무력감을 보는 순간,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천불이 일어났다. 아니,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뭐가 되는 거야. 아무개 딸이면 다야?


태그:#중국대학의 관시, #성적청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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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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