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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 배설 장군> 표지
 <서강 배설 장군> 표지
ⓒ 배씨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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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과 관련해 역사적 진실 공방에 휩싸여 있는 임진왜란 당시 장군 배설의 행적을 다룬 <선무원종 1등공신 병조판서 서강 배설 장군>이 최근 출간됐다.

비매품인 이 책은 성산배씨종친회, 경주배씨대종회, '소설 영화 <명량> 관련 비상대책위원회'(아래 비대위)가 공동으로 펴냈다. 배씨 문중이 연합하여 발족한 비대위는 지난 9월 15일 영화 <명량> 제작자 겸 감독 김한민, 각본가 전철홍, 소설가 김호경씨를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바 있다.

<명량> 관계자들 '사자 명예훼손' 고소

책은 경북대 배한익 교수의 머리말 '영화 <명량>과 소설 <명량> 속 배설 장군에 대한 역사 왜곡 규명', 경북대 배한동 명예교수의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의 임란 활동과 공적', 배재영 행정학 박사의 '조선 수군 살린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 배윤호 비대위 대변인의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은 정치적으로 희생되었다'로 구성되었다. 그 외에도 '성산배씨 진사공위현세계표'와 언론에 게재된 시론 및 기사가 덧붙여졌다.

배한동 명예교수는 배설 장군을 "첫째, 상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충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꿋꿋한 무인의 기개를 보여주었고, 둘째, 문무를 겸비한 용장으로서 재직 중의 위민봉사 활동과 전술적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났으며, 셋째 '지인용'을 겸비한 장군으로 평가"했다.

따라서 배 교수는 "배설 장군의 위업은 일방적으로 기술되거나 오도되지 말아야 하지만, 아직도 장군의 행적을 폄하하거나 오도하는 경우가 있다. 장군의 임란시 행적과 위업은 학술적으로도 반드시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라면서 자신의 논문이 "배설 장군에 대한 그간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배설 장군의 아버지 배덕문 의병장이 군사를 모은 곳이라는 뜻에서 고향마을 이름이 군장리가 되었다.
 배설 장군의 아버지 배덕문 의병장이 군사를 모은 곳이라는 뜻에서 고향마을 이름이 군장리가 되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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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영 박사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경상좌수사 이억기, 충청병사 최호가 전사하고 조선 수군 삼만여 명이 수장된 칠천량 전투를 집중 분석했다. 사실 배설 장군은 칠천량 전투 직전에 열린 군사회의 때 "물이 얕고 협착한 칠천량은 전선을 운용하기 어려우니 함대를 전투에 유리한 한산도 본영으로 옮겨 왜군의 공격을 잠시 피한 다음 전투력을 복원하여 부산포로 재출병하는 것이 조선 수군을 살리고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는 의견을 펼쳤다.

하지만 도원수 권율의 급전 독촉에 내몰린 원균은 배설 장군의 의견을 무시했고, 마침내 조선 수군은 궤멸 당했다. 그런데도 당파 싸움에 골몰하느라 중요 직책의 장군 자리를 자기 사람 세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조정 대신들은 12척의 전선을 천신만고 끝에 살려 이순신에게 인계하고 청야작전으로 한산도 주민들을 살려낸 배설 장군을 오히려 처형했다.

배 박사는 "다른 나라들은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은 패전한 군인들도 존중하여 무명용사들 한 명의 시신까지 모두 찾으려 노력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패전국 일본은 전쟁 범죄자들도 영웅으로 대접하여 신사에 차려놓고 총리와 온 국민이 매년 참배하고 있다"면서 "그 반면 우리나라는 악조건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조선수군을 살려낸 장군과 군인들을 도망자로 매도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일은 국민 갈등을 조장하여 힘을 상실하게 되고 국가 기강을 흐트러지게 한다"고 주의를 촉구했다.

배설 장군의 아버지 배덕문 의병장
임진왜란 때 왜는 성주를 점령한 후 부역 승려 찬희(贊熙)를 성주목사로 임명하고 백성들을 몽땅 도륙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고향 금수면에 살고 있던 68세 선비 배덕문(裵德文)이 창의한다. 배덕문은 문과 급제 후 울산 등지의 군수를 지낸 뒤 고령으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중이었다.

성주민들은 평소 우러러보던 배덕문이 나서서 의병을 모집하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몰려온다. 배덕문은 향토 출신으로 성 안팎 지리에 밝은 몇 사람을 불러 격문을 주면서 명령한다. "이 격문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붙이시오. 격문을 보면 간승 찬희는 반드시 왜군을 인솔하여 출병할 것이오."

격문에는 대략 "간악한 가짜중이 나라와 백성을 배반하였으므로 우리 의병들은 그 죄를 물어 찬희가 머물던 적산사(積山寺)를 불태우려 한다. 불자 여러분들은 해량하시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덕문은 의병들을 점고한 후 고개 좌우로 길게 나누어 매복시킨다. 과연 성주군수 찬희가 왜군을 앞세우고 위세당당하게 진군해왔다. 적이 골짜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배덕문 의병은 벼락같이 활을 퍼부은 다음, 적들이 동료의 시체에 파묻혀 우왕좌왕하는 틈을 노려 칼을 휘둘렀다. 배덕문도 적군 속으로 뛰어들어 직접 간승 찬희의 목을 베었고, 마침내 왜장의 머리도 참수하였다. 

배덕문은 의병을 지휘하여 성주 성을 쳤다. 이미 기세를 잃은 왜병은 그대로 도주했다. 성을 탈환한 배덕문은 명재경각의 백성들을 모두 구출하였다. 지금도 성주에서는 배덕문이 군사를 숨긴 마을을 군장리(군사軍, 모아둘藏, 마을里)라 부르며 그를 기리고 있다.
또 배윤호 비대위 대변인은 "배설 탄핵은 자신들의 실정을 지적해온 배설을 두려워한 조정 대신들이 당시 병조판서 이항복의 장인이자 도원수인 권율을 살리기 위해 모함을 한 때문"이라면서 1599년 49세의 나이로 권율에 의해 억울하게 참수된 배설 장군이 불과 6년 뒤인 1605년 1등공신에 책록된 것이 결과적으로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선조는 1597년 7월 22일 어전회의에서 "패전 책임은 도원수(권율)에게 있다"고 지적하고 배설을 수군통제사에 임명하려 하지만 이항복 등은 패전 책임을 져야할 권율의 장계를 근거로 오히려 배설 등을 탄핵했다.

배설 장군의 역사적 행적에 대한
왜곡과 조작 바로잡아야

배한익 교수는 머리말을 통해 "올해 한국 영화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은 화려한 전투 장면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로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역사 고증에는 실패했다"면서 "상업주의에 물든 영화감독과 소설가가 왜곡하고 조작한 임란 공신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의 역사적 행적을 바로잡고 선조의 명예를 회복하여 후손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책을 펴낸다"고 출간 의의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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