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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유물 전시실 모습입니다.
▲ '응답하라 1994, 그후 20년'이 열리는서울역사박물관 기증유물전시실 기증유물 전시실 모습입니다.
ⓒ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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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세상 떠난 고 신해철씨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내 젊은 날이 사라진 듯 슬프다.', '덕분에 청춘도 행복했다.', '정신적 지주를 잃은 듯 허망하다'와 같은 글들이 인터넷 공간을 가득 메웠다. 비록 그의 열혈팬은 아니었지만, 안타깝고 허망한 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30~ 40대에게 그는 그저 대중음악인이 아닌 청춘의 한 자락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그의 발인식 날 찾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역사박물관이었다. 1층 기증유물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시회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일어서길 간절히 외쳤건만 응답 없이 사라져버린 청춘, 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1990년대 그 시절을 돌아보며, 마왕과 우리들의 청춘에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994년 기억 속으로 우리들의 청춘 찾아 떠나다

당시 유행했던 음악, 드라마, 영화와 함께 대중문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 전시 내부 모습 당시 유행했던 음악, 드라마, 영화와 함께 대중문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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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1층 로비를 가로질러 안쪽 깊숙이 들어서니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일과 이 분의 일> <사랑과 우정 사이> <칵테일 사랑> 등 1994년 최고의 히트곡들이다. 신해철(정확히는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1994년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날아라 병아리>가 수록되어 있던 넥스트 2집은 1994년 유행가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진다. 유행했던 말랑말랑한 음악들과 달리, 강한 사운드에 철학적이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생각해보니, 당시 대중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음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간 귀공자풍의 전형적인 대학생 오빠 이미지였던 신해철 씨가 그만의 독특한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한 시기 또한 이맘때가 아니었나 싶다.

전시장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나 김현식 6집 등 LP판과 1990년대 최신가요 카세트테이프도 전시되어 있었다. 차근차근 살펴보노라니, 1990년대는 음악적으로도 이전과 다른 다양한 시도들을 엿볼 수 있었던 풍성한 시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마지막 승부>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서울의 달> <M> 같은 당시 최고 시청률을 자랑했던 드라마 목록과 함께 그 시절 대중문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접속> <비트> <퇴마록> <넘버3> 같은 1990년대 대표적인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도 볼 수 있다.

맞은편에는 X세대 전형적인 옷차림과 로데오거리, 독수리 다방 등 주요 만남의 장소가 표시된 지도도 볼 수 있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강남역 뉴욕제과 간판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청춘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두툼하고 투박스런 모양새의 컬러텔레비전과 비디오기기, 구형 노트북과 아래아 한글이나 훈민정음 플로피 디스크 등도 향수를 자극한다.

그러고 보니 1990년대는 막바지에 이른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변화가 공존하던 시대였다. 청춘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자유로웠지만, 혼란스러웠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때론 자유도 만끽하고, 때론 변화에 적응하며 혼돈의 청춘기를 보내야 했던 이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신해철'에 열광했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었을 것이다.

x세대 옷차림과 당시 만남의 장소 등도 찾아볼 수 있다
▲ 응답하라 1994, 그후 20년 전시장 모습 x세대 옷차림과 당시 만남의 장소 등도 찾아볼 수 있다
ⓒ 이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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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전시실에서 그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삐삐였다. 드라마 <응사(응답하라 1994)>에서도 꽤나 중요한 소품이지 않았던가. '1004(천사로부터)', '8255(빨리 와)', '0404 (영원히 사랑해)', '2222(투덜투덜)' 따위의 숫자 언어(삐삐 문자)에 얽힌 추억을 깨운다. 또한, 수능 1세대로 입학해 IMF 세대로 사회에 발을 디뎌야 했던 비운의 1994학번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시된 교과서나 수험서 등도 눈길을 끈다. ​​

기성세대에겐 이해하기 힘든 X세대이자 개성 강한 신세대였지만,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무섭게 불안한 사회에 던져져야 했던 1990년대 청춘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더불어 그 시절 청소년기를 거치고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 마왕 신해철의 존재감 또한 알 듯하다. 새벽까지 그의 라디오 방송를 들으며 방황을 이겨냈다는 그때 그 시절 청춘이 이제야 좀 보이는 것 같다. 중년이 되어서야 청춘이 보인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전시장에는 성수대교 붕괴 사진과 함께 서울시민의 날 행사 등의 시정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화폐와 함께 지하철 보통권 승차권도 보인다. 지하철 1구간 요금이 350원이었다니, 20년 동안 오른 물가의 폭을 가늠할 수 있었다. 또한, 각종 인구 통계와 차량 증가, 외국인관광객 수, 범죄 발생 건수 등 각종 통계 수치도 적어두어, 20년 전후 서울을 비교해볼 수 있었다.

더불어 20여 년이 지난 나의 모습도, 우리들의 변화도 새삼스레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청춘을 물려주고 물러서야 하는 중년이 된 우리들의 모습을. 신해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청춘의 한자락이 떨어져 나간 것 마냥 아팠던 것은, 우리들의 지난 시절이 그렇게 함께 저물어가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천년타임캡슐에 묻힌 것은 단지 서울의 기억뿐일까?

서울천년타임캡슐과 그 내용물도 확인해볼 수 있다
▲ '응답하라 1994, 그후 20년'의 서울천년타임캡슐 서울천년타임캡슐과 그 내용물도 확인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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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하면 여러 사건 · 사고도 떠오르지만, '서울천년타임캡슐' 행사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의 생활, 풍습, 인물을 상징할 수 있는 문물 600건을 선정해 남산골 한옥마을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에 묻었던 것. 이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 중 하나로 진행된 행사였다. 1994년은 조선이 한양,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정한 지 600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서울시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10월 28일을 서울 시민의 날로 정하고, 서울천년타임캡슐 매설 행사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진행했다.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 전시회에선 2394년에 공개될 예정인 '서울천년타임캡슐'의 모습도 확인해볼 수 있다. 당시 제작된 2개의 타임캡슐 중 1994년 11월 29일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에 묻지 않은 나머지 하나를 선보인 것이다. 서울 보신각종을 본떠 제작했다고 하는데, 지름 1.4m, 높이 2.1m, 무게 2.5톤에 달한다 한다. 그동안 유스호스텔 화단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서울시 청소년담당관의 협조로 이렇게 공개하게 된 것이다.

타임캡슐 안에는 당시 함께 매설되었다는 물품들도 확인해볼 수 있도록 기증 유물로 채워져 있다. 각도기 세트, 교과서, 각종 게임기, 스타킹, 전화기, 그릇, 수저, 분필, 주택복권, 구두약 등 당시 600건의 상징 문물로 선정되었다는 물품들이다. 집 안 구석구석 정리하다 보면,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물건들이었다.

전시장에서는 서울천년타임캡슐 매설 추진과 함께 진행했던 서울 600년 사업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서울 옛 모습 모형 제작, 남산 제모습 가꾸기, 한강공원 가꾸기, 시민의 날 제정, 시립박물관 (현 서울역사박물관) 건립 등을 추진했던 서울 600년 사업에 대한 설명과 해당 자료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당시 사업 계획 자료와 각종 발간물, 안내 책자와 리플렛은 물론, 기념 소고와 달력, 열쇠고리, 엽서 등 각종 기념물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서울천년타임캡슐 안에 넣었다는 이재용 감독의 <한 도시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다. 1994년 6월 9일 하루 24시간 동안 서울의 모습을 담았다는 사진·영상물로, 당시 서울시민의 생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35mm, 16mm 영화와 비디오, 사진 등 당시 모든 기록 매체가 동원되었다 하는데, 6월 9일 발행한 신문, TV나 라디오 프로그램 녹화·녹음 자료와 기상 사진, 광고 전단, x-ray 사진 등도 포함되어 있다.

사진작가 304명이 참여하여 최종 제작 작품 수만 총 6만7092컷에, 영화 비디오 부문 28개 팀 190명이 참여하여 56시간 30분 길이의 결과물을 만들었다니, 그야말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총 720여 명이 참여한 공동체 작업이자, 서울을 담은 최초의 영화 에세이였다.

참여 작가 중에는 배병우, 조선희 등 유명작가의 이름도 보인다. 그 뿐 아니라, 시민 인터뷰 영상 사이사이 유명 인사의 모습도 눈에 띈다. 20년 전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니, 우리들의 풋풋한 시절의 추억도 함께 떠오른다. 이어지는 시민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결혼하는 아가씨들이 많이 와서 사는 것이라 자부심을 느낀다"는 평화시장 그릇 판매상 청년은 "돈 많이 벌어서 좋은 데도 많이 쓰고 열심히 살고 싶다"는 꿈을 이뤘을까? 오렌지족과의 이질적인 삶의 차이에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는 자동차 정비공 청년은 갖고 싶다던 소나타 승용차를 장만했을까? 당시 환경미화원 아저씨 얘기론 시청 앞이 가장 깨끗하고 청계천 7가와 남대문이 가장 지저분했다는데,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서울천년타임캡슐에 담긴 이재용 감독의 '한 도시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다
▲ '응답하라 1994, 그후 20년' 한 도시 이야기 서울천년타임캡슐에 담긴 이재용 감독의 '한 도시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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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새 봐라, 행복하겠는가."

당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얘기에선, 오늘 우리의 모습도 읽힌다. "처음 올라왔을 때는 조금 살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원체 바쁘고, 사람도 많고, 이러다 보니까 자꾸 뭐 고향에 가고 싶고 그렇다"는 경비아저씨의 얘기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1994년의 역삼동 사진을 보며, 확성기를 달고 지나가는 20년 전의 멸공 차량 사진을 보며, 다시금 지나온 우리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때 그 시절의 방황하고 고뇌하던 청춘. 그리고 서서히 사회에 물들어가며 말을 아끼며 살아온 우리. 이제 문화와 시대의 중심에서 밀려나 작고 초라해져 가는 중년의 나. 어찌 보면 신해철은 1990년대와 그 후 20년을 한결같이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건 아닐까?

청춘의 고뇌를 함께하며 작은 탈출구가 되어 주었고, 쏟아질 화살이 두려워 침묵하던 우리를 대신해 통쾌한 한마디를 날려 주었다. 간간이 보이는 모습 또한 20여 년을 거슬러 한결같았기에 더욱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길에서도 그는 의료사고라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불편한 진실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안타깝고 애닮은 것은 아닐까? 

전시장을 빠져나오며 그때 그 시절 추억이 담긴 장소를 찾아 나섰다. '응답하라 1994, 그후 20년' 전시장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지만, 작은 규모의 전시다 보니 아쉬움도 컸기 때문이다.

광화문 언저리에 남아 있는 오래된 맛집이나 옛 건물을 둘러보며 지난 시절의 추억과 꿈들을 떠올려 본다. 문득, 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아이들과 오늘날의 청춘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까? 혹시라도 그들의 불안과 고뇌에 우리들의 선택이 한몫하고 있는 건 아닐까? 1994, 그 후 20년을 기억하고, 마땅히 응답해야할 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의 축약본은 서울시온라인뉴스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817705)에도 실렷습니다. 기사가 나가면 제 블로그에도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태그:#응답하라 1994, 그후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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