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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론 섬의 카양간 호수 풍경
 코론 섬의 카양간 호수 풍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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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간당 하폰?(안녕하세요?) 앙 빵알란 코 뽀 아이 강.(제 이름은 강입니다)"

발음이 잘못됐나? 목소리가 작았나? 할머니가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할머니는 쾡한 눈으로 날 멀뚱멀뚱 바라보셨다. 곧 미소를 띠며 뭐라 뭐라 하신다. 그럼 그렇지. 반갑다거나, 잘 왔다거나... 그런 환영의 말이겠다 싶었다.

"살라맛 뽀!(고맙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제야 미셀이 끼어들었다. 그녀가 영어로 내게 말했다.

"강, 우리 마을에선 타갈로그어 쓰지 않아요. 여기 언어는 '큐요논'이에요."

170여 개의 언어... 섬나라답다

순간 힘이 쭉 빠졌다. 뭔가 여행의 흥이 깨지는 것 같았다. 오지마을 여행 계획을 잡은 전날 저녁부터 공들여 준비한 타갈로그어였는데. 필리핀엔 공식 언어인 필리핀어 외에 타갈로그어, 영어, 그리고 165개가 넘는 다른 언어들이 있다. 언어가 그토록 많은 것은 70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의 지리적·역사적 특징일 게다.

진작에 들었던 그 정보를 왜 간과했지? 나는 아무 의심 없이, 타갈로그어를 찾아 외웠다. 간단한 인사말 몇 문장이었지만. 돌아서면 까먹고 돌아서면 까먹는다고, 암기력 달리는 내겐 그것도 보통 노력이 아니었다. 손님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의 타갈로그어 몇 마디가 '어르신들의 마음을 녹이리라, 내게 호의를 보이리라, 금방 친해지리라' 기대했다. 외국인이 자기 나라 말을 몇 마디라도 할 줄 알면 경계심, 서먹함처럼 거북한 감정들이 쉽게 녹아내리지 않던가.  

미셀이 할머니에게 내 소개를 하는 것 같았다. '코리언'이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그냥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사이 핼린이 커피를 넉 잔 탔다. 맛이 달달했다. 이 정도 당분이면 노독이 풀리려나? 코론 시에서 여기까지 로컬버스 타고, 방카(나무 배) 타고, 걷고... 다섯 시간쯤 걸려 도착했다.

팔라완 부수앙가 섬의 서북단 앞바다에 있는 칼라우이트 섬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1976년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야생 동물들이 살고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섬에서 살고 있는 기린, 얼룩말, 임팔라 등 아프리카 출신 야생 동물들을 보러 사람들이 꽤 많이 찾는 곳이란다. 하지만 나는 동물을 보러 온 게 아니었다. 내가 칼라우이트를 찾은 것은 서쪽 해변에 있는 한 바랑가이(필리핀의 최소 행정단위로 마을, 동네, 공동체를 뜻함)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칼라우이트 섬,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커피 콩'의 연호씨랑 현주씨
 '커피 콩'의 연호씨랑 현주씨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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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오게 된 경위는 이랬다. 섬에 도착하기 이틀 전, 코론 시내에 있는 '커피 콩(Coffee Kong)'에 갔었다. 세련된 분위기의 현대적인 커피숍이었다. 서양인 여행자들이 꽤 북적였다. 거기서 연호씨와 현주씨를 만났다. 커피 콩의 주인이었다.

코론 시에 자리 잡은 지 4년여 됐단다. 스쿠버다이빙 강사도 하고 있다는 연호씨의 첫인상은 둥글둥글 친근하고 편했다. 현주씨는 도시적인 첫인상과는 다르게 알고 보니 참 여리고 속 따뜻한 사람이었다. 신뢰감을 느끼게 해준 30대 커플. 이들은 둘 다 여행 마니아였다.

코론 시에 있는 거피숍 '커피 콩(coffee kong)'
 코론 시에 있는 거피숍 '커피 콩(coffee kong)'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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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그들과 팔라완 여행 얘기를 나눴다. 스쿠버다이빙에 빠져 코론 시에 머문 지 벌써 12일째였다. '이제 배낭을 꾸리자', '다른 곳으로 움직이자' 마음이 동하던 중이었다.

코론 섬에 가고 싶었다. 누구나 홀딱 반할 만큼 섬의 풍광도 빼어났지만, 원주민들을 만나고 싶었다. 섬을 일주하며 야영할 수 있다면 더 좋겠고. 그러나 웬만한 인맥을 동원하지 않고는 외부인 출입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코론 시에서 바로 건너 보이는 곳에 있는 가까운 곳이지만.

푸른 보석 같은 일곱 개의 호수를 품은 석회암 원시림의 코론 섬. '딱반와 원주민'의 땅이다. 그 섬은 카양간 호수와 바라쿠다 호수 그리고 몇 군데 비치만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었다. 사실 사람과 거리를 두면 둘수록 자연에겐 축복일 게다. 

카양간 호수 입구의 안내판엔 이런 글귀가 써있다.  

"TAKE NOTHING BUT PICTURES, LEAVE NOTHING BUT FOOTPRINTS, KEEP NOTHING BUT MEMORIES, KILL NOTHING BUT TIME.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시오, 발자국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마시오, 추억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시오, 시간 외엔 아무것도 죽이지 마시오)"

연호씨와 현주씨가 발 벗고 나서서 어떻게든 내 여행을 도와주려고 했다. 현지인 인맥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결론은 '불발'로 끝났다. 대신, 니키라는 이름의 원주민을 통해 부수앙가 섬에 사는 원주민 바랑가이를 소개 받았다. 다음날 니키가 전해오길 바랑가이 주민들이 외부인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냄새' 때문이라고 했다. 이방인의 역한 냄새를 마을에 들일 수 없다고.

물론 후각은 인간의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직접적일 게다. 통제도 거의 불가능하고. 또 사람은 타인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를 꺼리지 않는가. 여하튼 내 몸에서 나는 땀 냄새, 구취, 액취... 등의 냄새가 문제라니, 움찔했다. 나도 모르게 킁킁 내 몸의 냄새를 맡아봤다. 얼핏, 시큼한 땀 냄새가...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 바랑가이 주민들과 나의 몸 냄새가 많이 다를 것이었다. 문화, 음식, 환경, 유전자 등이 다른 만큼. 상대의 다른 체취가 강한 악취로 느껴진다면, 함께 있는 고충이 크겠다. 그래도 그렇지... 혹, 후각이 지나치게 발달한 사람들이 아닐까?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이유가 뭐든,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그들만의 생활 방식이 못내 더 궁금해졌다.

버스 위에 철근과 시멘트까지...

그렇게 또 불발로 끝난 내 여행을 연호씨랑 현주씨가 나보다 더 아쉬워했다. 그때 커피 콩에서 일하는 필리핀 아가씨 제닐린이 제안했다.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바랑가이를 방문하면 어떻겠냐고. 그 시골 지역이 바로 칼라우이트 섬의 한 바랑가이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녀의 사촌이 동행하도록 주선까지 해주었다.  

코론 시에서 로컬버스(초록색 버스)를 타다.
 코론 시에서 로컬버스(초록색 버스)를 타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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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서 부수앙가 섬 풍경을 보며...
 버스 안에서 부수앙가 섬 풍경을 보며...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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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정을 거쳐 코론 시 버스 정류소에서 제닐린의 사촌 미셀을 만났다. 마른 체형의 19살 아가씨였다. 코론 시의 한 레스토랑에서 서빙 일을 한다고 했다. 동행이 둘 더 있었다. 미셀의 여동생 메이아. 15살로, 예쁘장하고 조용해 보였다. 다른 한 명은 미셀의 사촌 핼린. 18살로, 통통하니 명랑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현재 그 바랑가이에서 산다는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셋 다 키가 작은 편이었고, 피부는 건강한 커피색이었다.   

우리는 수줍음을 타며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버스를 탔다. 하루 한 대 블루앙까지 운행하는 버스였다. 오전 11시 버스라지만, 시간은 유동적이라고 했다. 승객이 빨리 차면 빨리 떠난다고. 승객들, 짐 보따리들, 강아지, 닭... 이 모두를 꽉꽉 태우고 나서야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지붕 위에 철근과 시멘트 포대까지 싣고 떠났다.

팔라완에서 처음 타는 로컬버스였다. 연식이 수십 년은 넘은 듯한 낡은 구식 버스였다. 젊은 남자 '차장'이 짐을 싣고 내리는 승객들을 도와주며 찻삯을 받았다. 승객 중 외국인 여행자는 나 혼자였다. (그 후로도 나는 대부분 그런 로컬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팔라완을 여행했다. 관광객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 버스였다)

버스 안. 바리바리 짐 보따리들...
 버스 안. 바리바리 짐 보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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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부수앙가 섬의 서쪽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을 향해 달렸다. 나는 버스기사 옆,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차창 쪽으로는 중년 여자가 먼저 앉아 있었다. 미셀, 메이아, 핼린은 운전사 바로 뒤쪽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버스 앞창을 통해 스쳐가는 풍광을 감상하며 여행을 시작했다.

망고, 야자수 같은 열대나무들과 물소, 드문드문 나타나는 작은 마을과 사람들, 버스 왼쪽에서 푸른 어깨처럼 넘실대며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다, 맹그로브 숲... 한 시간쯤 지나자 버스가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이쪽저쪽으로 몸이 심하게 쏠리며 덜컹댔다. 나는 벌써 지쳤다.

꼬끼오! 가끔 뒤쪽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깅낑낑! 강아지 낑낑거리는 소리는 출발 때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앞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직사광선이 강했다. 머지않아 머리카락에 불이 붙을 것만 같았다. 볼록렌즈 밑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창문을 다 열어놓고 달리는 버스라 실내가 더운 편은 아니었지만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자리도 너무 좁고 불편했다. 나는 오른쪽 엉덩이만 의자에 간신히 걸친 채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 좌석은 페인트 벗겨진 철제 프레임에 낡은 갈색 가죽 커버가 덮힌 긴 의자였다. 높은 등받이는 90도로 꼿꼿이 서 있었다. 거기다 운전사 뒤쪽 편의 좌석들은 성인 '두 명 반'이 앉을만한 공간이었는데, 세 명이 앉았다. 내 쪽은 '한 명 반'이 앉을만한 자리에 두 명이 앉아서 갔다.

내 옆 창가 쪽 아주머니야 두 짝 엉덩이를 모두 붙이고 착석했지만, 나는 남은 공간에 엉덩이 반쪽만 걸쳤다. 배기고 저리고... 아픈 엉덩이와 다리를 요래조래 자주 움직여 혈액 순환하며 버텨야했다.

세 명의 아가씨와 방카에서 내려 칼라우이트 섬으로 걸어가는 바닷길
 세 명의 아가씨와 방카에서 내려 칼라우이트 섬으로 걸어가는 바닷길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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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간 만에 밟은 땅

'다른 사람들도 비좁은 공간, 더위, 강아지의 비명 등을 참아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겠지.'

하고 둘러보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만원 버스 승객들은 모두 무심한 듯 무표정한 표정이었다. '인내심이 강한 사람들인가, 불편함에 대한 감각이 무딘 건가, 불평 불만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의아할 정도로 조용하고 평온해보였다. 나만 인상을 쓰고 있었다. 몸을 비비 틀면서. 

버스는 자주 가다 서다 했다. 아무 데서나 승객들이 내리고 탔다. 세 시간쯤 지나자 타는 손님 보다 내리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 빈자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 옆자리 아주머니도 버스에서 내렸다. 그제야 허공에 떠 있었던 왼쪽 엉덩이를 의자에 얹힐 수 있었다.

마침내 우리도 버스에서 내렸다. 네 시간여 만에 땅을 밟았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허리를 폈다. 곧장 세 아가씨를 따라 바닷가로 갔다. 미리 미셀이 전화로 연락을 취해 놓았는지, 쪽배처럼 작은 방카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로 나오니 살 것 같았다. 우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북쪽으로 달렸다. 오후의 눈부신 푸른 바다, 석회암 바위섬들이 떠있는 바다를 30분쯤 달렸나. 방카가 우리를 바다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칼라우이트 섬 앞바다. 물이 얕아 방카가 더는 섬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수초가 하늘거리는 모래 바다였다. 우리는 바지를 적시며 바다를 한참 걸었다. 섬 쪽을 향해. 맹그로브 숲을 통과해 섬으로 올라갔다. 모래사장을 지나 코코넛 나무 숲을 걸었다. 오두막집의 너른 마당을 가로질렀다. 마른 논둑을 지났다. 대여섯 채 집이 모여 있는 마을길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방카 타고 칼라우이트 섬으로 가는 바닷길
 방카 타고 칼라우이트 섬으로 가는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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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우이트 섬, 드디어 도착!

마침내 숲 한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있는 오두막 집으로 들어갔다. 미셀의 할머니 집이었다. 오후 다섯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덥고 고단했던 긴 여정이었다. 기분이 좀 얼떨떨했다. 열대 섬의 오지마을... 다섯 시간여 만에 나는 또 다른 세상에 와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누군가의 안내를 받으며 무작정 따라다니는 여행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길에서 혼자 길을 잃고 헤맬 때보다 오히려 더 어리바리했다.

나는 붙임성 좋게 미셀의 할머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마간당 하폰?" 타갈로그어로 말이다. 그리곤 이곳 언어가 타갈로그어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좀 풀이 죽었더랬다. 나도 모르게 불쑥 흠흠, 내 몸의 냄새를 맡았다. 핼린이 타준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처진 기분을 추슬렀다.

미넬라 할머니의 오두막집
 미넬라 할머니의 오두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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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74살의 미넬바 할머니가 혼자 사는 '니파 헛(대나무와 니파 야자수 잎으로 지은 필리핀의 전통 시골집)'.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맨발로 걷고 싶어지는 마른 흙 마당. 열대 과일나무와 꽃나무들이 들어선 그 마당에 눈길을 뺏기고 있는데... "어?" 사람들이 집 쪽으로 하나둘씩 몰려 오고 있었다.


태그:#팔라완, #배낭여행, #칼라우이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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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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