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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건장산 기슭에 있는 ‘탑동 삼층석탑’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건장산 기슭에 있는 ‘탑동 삼층석탑’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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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주사로 이동하기 전 군산시 대야면 죽산리 건장산 기슭에 오롯이 서 있는 '탑동 삼층석탑'을 찾았다. 전군도로에서 서수 방향으로 2~3분 거리다. 일제강점기 일인들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진 다른 석조유물들과 달리 1천여 년 풍상에도 제자리를 꿋꿋이 지켜오고 있다. 마을 지명도 '탑동 마을'(탑 골)인 것을 보면 주민들에게 무척 사랑받을 것으로 짐작된다.

'잘 생긴 탑', '토박이 탑', '여장군 탑' 등으로 불리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 높이는 5, 5m. 투박하면서도 훤칠하다. 2층과 3층에 탑몸(탑신) 받침이 있고, 얇고 넓은 지붕돌(옥개석)이 안정감을 준다. 군산 지역에서 유일하게 500여 년 전부터 불리는 '탑동 들노래'(농사지을 때 부르는 노동요)와 함께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익산 미륵사지 창건과 함께 인근에 왕궁이 지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총각 장군과 처녀 장군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전설도 내려온다. 탑동 마을 주민들은 처녀 장군의 혼이 마을을 보호해줘 삼층석탑이 일제야욕을 피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 중에도 피해가 없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김중규 군산시청 학예사는 "탑동 삼층석탑은 고려 시대 만든 탑임에도 백제 석탑의 기본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귀띔한다. 군산이 백제 영토였으니 백제 양식을 따른 것은 당연하다는 것. 또한, 석탑 북쪽에 백제 시대 창건됐다는 사찰 터가 있는데, 1890년경 정매진 스님이 폐사지 인근에 자그마한 암자를 지으면서 청룡사라 칭하고 법맥을 이어오다 1989년 '보탑정사'라 개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단아한 분위기에 풍광이 뛰어난 취성산 불주사

취성산 중턱에 자리한 불주사 전경. 돌층계가 산사 분위기를 돋운다.
 취성산 중턱에 자리한 불주사 전경. 돌층계가 산사 분위기를 돋운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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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분위기의 불주사 대웅전(왼쪽)과 요사채인 벽안당(오른쪽).
 고즈넉한 분위기의 불주사 대웅전(왼쪽)과 요사채인 벽안당(오른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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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철새조망대에서 금강호 둑길을 따라 10분쯤 달리면 조선 시대 진휼곡을 제주도로 실어 나르던 원나포(나리포)에 다다른다. 전설이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공주산을 끼고 우회전해서 직진하면 폐교된 나장초등학교와 수레재 사이에서 불주사 안내판을 만난다. 그곳에서 원장산 마을길로 가다 보면 제각이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불주사 일주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鷲城山 佛住寺'(취성산 불주사)라고 쓰인 일주문을 통과하면 시끌벅적한 세상과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고요한 숲길을 걸으며 그 옛날 잠버들로 불리었던 기왓골, 군사가 주둔했었다는 군둔마을, 고산골로 불리었던 원장산마을 등 주변 마을의 정겹고 재미난 생성 내력과 고즈넉한 산촌 풍경, 자연의 오묘한 향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불주사다.

영산전(나한전) 뒤편에서 바라본 불주사 도량과 나포 장상리 마을
 영산전(나한전) 뒤편에서 바라본 불주사 도량과 나포 장상리 마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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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하고 단아한 분위기다. 그동안 불지사(佛智寺)로 불리어오다 최근 부처가 있는 절이라는 뜻의 불주사(佛住寺)로 개칭했단다. 산사를 엄마 품처럼 감싼 취성산은 서해를 바라보고 있어 망해산, 혹은 불지산이라 했는데, 석가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 모습과 산세가 닮았다 하여 취성산으로 부른단다. 정상에 봉수대 터가 남아있어 봉화산, 화산 등으로도 불린다.

1911년 작성된 <임피군 불지사 대웅전 중수시주기>는 '백제에 불법을 전한 인도 고승 마라난타가 침류왕 원년(384) 절터를 잡았으며, 의자왕 말년(660)까지 3창 했다'고 적고 있다. 그 외에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대웅전 중수 중 '崇禎 三年 二月'(1630년 2월)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발견되어 이 절집이 조선 인조 8년 이전 건물임을 확인해 줬다.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에 초석을 깔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축 양식은 전체적으로 다포식 계통의 수법을 따르고 있어 단아한 멋을 풍긴다. 기단 위 기둥은 가운데만 굵게 한 배흘림 형식이며, 앞면 가운데 칸은 3짝으로 '亞'자형 문이고, 양 끝 칸은 두 짝 문으로 되어 있다.

불주사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
 불주사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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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주사 가람은 대웅전 좌측에 벽안당(요사), 우측에 영산전(나한전)과 삼정각 순으로 배치됐다. 나한전에는 16 나한이, 삼성각에는 수려한 모습의 산신과 칠성·독성 탱화가 모셔져 있다. 소장 문화재로는 대웅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목조관음보살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4호) 등이 봉안돼 관심을 끈다.

그중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머리에 산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정수리에 상투처럼 묶은 머리가 높게 솟아있다. 사각형 얼굴에 가는 눈, 오뚝한 코, 굳게 다문 입 등이 균형을 이룬다. 양쪽 귀는 짧은 편이나 목에 세 개의 주름이 있어 인자함과 근엄함이 동시에 풍긴다. 복장에서 불상발원문과 시주기 등이 나왔는데, 조성연대가 인조 25년(1647)으로 조선 후기 불상의 귀중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는다.

1982년 봄 배수로 공사 중 깊이 2m 땅속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은은한 미소가 친근감을 준다. 몸에는 양어깨를 가리는 통견 법의를 걸쳤으며 법의가 몸에 밀착하여 부처의 몸 형태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전시 중) 높이가 10cm 남짓밖에 안 되지만 군산의 불교문화와 불주사 창건 시기를 입증할 수 있는 불상으로 그 의미가 크다.  

시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은적사

은적사(隱寂寺)는 군산시 소룡동 설림산 자락(월명호수 서쪽)에 위치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 14년(613) 원광법사가 창건했다. 고려 광종 3년(952) 정진국사가 중창, 고려 공민왕 22년(1373) 고승 나옹이 2차 중창, 조선 정조 5년(1781) 보경선사가 중건, 1937년 허옹선사가 2차 중건하는 등 네 차례에 걸쳐 중창·중건이 있었다.

사천왕문 앞에서 본 은적사 대웅전
 사천왕문 앞에서 본 은적사 대웅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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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을 지나면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한다는 사천왕상을 만난다. 뜨끔해진 마음을 잠시 가다듬고 천왕문을 통과하면 운동장처럼 넓은 잔디마당이 나온다. 그 건너편에 대웅전을 비롯해 극락전, 지장전 등이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이 전각들은 최근(1985~1995) 대규모 중창 불사 대 지어져 옛 정취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가슴이 탁 트인다. 청정한 수행공간이기 때문이리라. 

은적사는 도심지와 가깝고 산책코스로 으뜸이어서 군산지역 사찰 중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절집 이름에 담긴 사연도 두 개가 구전으로 내려온다. 하나는 '불자가 입적하기 전 죽음을 앞두고 머무르는 사찰'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신라 원광국사가 마한국 삼기산에서 이곳 설림산으로 옮겨와 숨어 살았다'하여 '은적'이라 했다는 것이다.

석가여래 삼존불상이 봉안된 은적사 대웅전 법당 모습
 석가여래 삼존불상이 봉안된 은적사 대웅전 법당 모습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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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 삼존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4호)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조성된 불상이다. 금산사 인근 절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형식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서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신체의 비례와 법의 주름 표현이 아름다우며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2년 삼존불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 때 복장유물이 나와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었다 한다.

1950년대 은적사 모습. 가운데 전각이 대웅전.
 1950년대 은적사 모습. 가운데 전각이 대웅전.
ⓒ 종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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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듯 1950년대만 해도 은적사는 천년고찰 이름에 걸맞게 고즈넉하고 아담하면서도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밀물 때는 절집 앞 신작로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숲이 우거진 설림산 줄기를 등지고 서해를 바라보고 있어 운치를 더했다. 고지도에는 '은적암'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전각은 극락전, 명부전, 조사전 등이 있었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와 주심포 형식이었다. 

은적사는 주변 풍광이 뛰어나고 백제 멸망과 관련된 '천방사와 소정방 전설'이 전해져 학생들 소풍장소로 인기가 좋았다. 따라서 1950~1960년대 군산에서 초중고를 다닌 사람은 아련한 추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터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군산 제1수원지'(월명호수)와 함께 유원지로 주목받아 시민들에게 종교적 공간 이전에 추억의 장소, 휴식의 장소로 기억되는 도량이다.

설림산에서 내려다본 월명호수(군산 제1수원지)
 설림산에서 내려다본 월명호수(군산 제1수원지)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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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선종암 삼층석탑(왼쪽)과 지금의 모습(오른쪽)
 1950년대 선종암 삼층석탑(왼쪽)과 지금의 모습(오른쪽)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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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2년 옥구현 지도'를 보면 은적사와 선종암이 표기돼 있고, 두 사찰 모두 삼층 석탑이 그려져 있다. 그중 길상사로 불리었던 선종암은 은적사 뒷산(설림산) 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일제가 군산의 일인들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제1수원지 공사(1912~1915)를 하면서 폐사됐다. 절터 역시 수몰되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때 전각들은 은적사로 옮겨 재건축해서 이용하다가 중창불사 때 모두 사라졌다.

오래전 선종암 터를 답사했었다는 김중규 군산시청 학예사는 본래 미륵 신앙과 관련 있는 사찰로 추정했다. 그는 "일반적 사찰 양식과 달리 북쪽을 바라보고 있던 선종암이 길상사에서 선종암으로 바뀐 시기는 은적사와 마찬가지로 선종이 유행하던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며 "이러한 추측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삼층 석탑이 군산지역 몇 곳에 존재했기에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선종암 폐사 당시 군산 수원지관리사무소 마당에 버려뒀다가 지금의 월명공원 전망대 부근으로 옮겨 세웠던 삼층 석탑은 단정하고 정결한 모습이었다. 소중한 유물임에도 무지한 상춘객들은 함부로 훼손했다. 어느 날 신문에 '역사 보물 관리소홀'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1976년부터 은적사에서 보관하다가 3년 전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개관과 함께 박물관 앞마당으로 이전, 오늘에 이른다.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자료출처: 군산시사 上권, <김중규의 군산답사 여행의 길잡이> 은적사 사진 종걸 스님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탑동 삼층석탑, #불주사, #은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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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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