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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라는 시트콤을 즐겨 봤습니다. <하이킥>은 청년 백수, 몰락한 중산층 같은 사회현실을 '웃프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꽤 인기가 높았습니다. 여기에는 고시원에 사는 가난한 여대생 백진희가 등장합니다.

방이라고 하기 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사이즈의 공간에서 남의 반찬을 몰래 빼앗아 먹으면서 사는 그녀의 삶은 부모님과 편히 살고 있던 제 눈에 그저 남의 일만 같았습니다. 특히' 그녀가 고시원에서 전화를 받는 장면은 과장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서 전화를 받아도 옆방 사람이 계속 벽을 '쿵쿵' 치면서 '정숙'을 독촉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소리나지 않는 인간'으로 변신하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 고시원에서 전화를 받는 백진희.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 유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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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년 후 시트콤은 현실이 됩니다. 취업준비를 명목으로 고시원에 입성한 지 어언 1년.  저는 '소리 나지 않는 인간'이 됐습니다. 바로 방음이 안 되는 스티로폼 샌드위치 패널 벽 때문입니다.

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샌드위치 패널은 다른 건축자재에 비해 비용이 저렴한 까닭에 벽 자재로 많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특히 고시원의 경우, 벽을 두껍게 만들면 공간이 좁아지게 되므로 최대한 얇게 시공됩니다. 하지만 샌드위치 패널은 한번 불이 붙으면 기름처럼 빠르게 타고 유독가스를 내뿜어서 안전에는 매우 취약합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샌드위치 패널은 방음에도 매우 취약한 탓에 고시원족의 사생활까지도 위협하고 있습니다. 방귀 소리, 기침 소리 같은 어쩔 수 없는 소음마저도 벽 너머로 들릴 정도로 방음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고시원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바로 입을 닫습니다. 전화통화는 밖에서만 합니다. 방귀, 기침, 재채기도 '볼륨'을 조절합니다. TV 시청 및 음악 감상은 무조건 이어폰을 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최소한의 생활소음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옆방 사람과 '벽간소음 분쟁'을 벌이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저 또한 옆방 사람과 얼굴을 붉힌 바 있습니다.

한 번은 제 방문에 포스트잇이 한 장 붙었습니다. 시끄러우니 알람을 진동으로 해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후부터 저는 옆방의 요청을 받아들여 알람을 진동으로 해놨습니다. 알람을 느끼지 못하고 지각을 한 적이 수두룩해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벽간소음으로 불면증과 탈모에 시달리기도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 '정숙'이 절대미덕인 고시원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화면 캡처
ⓒ 유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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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살고 있는 친구 A군은 벽간소음으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옆방 사람이 자면서 팔꿈치로 벽을 치기 때문인데요. 샌드위치 패널로 된 벽은 살짝만 쳐도 '쿵' 하고 큰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자다가 나는 소리는 어쩔 수는 없는 일. 유독 잠귀에 예민한 A군은 '쿵' 하는 소리에 잠을 깨곤 합니다. 하지만 자다가 낸 소리를 두고 뭐라 할 순 없기에 A군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시원에 살고 있는 친구 B양은 벽간소음 분쟁으로 탈모까지 겪었습니다. B양이 서랍장을 열거나 물건을 옮기는 소리만 내도 옆방 사람은 어김없이 '똑똑' 하고 벽을 두드립니다. 물론 <하이킥>에 나오는 장면처럼 벽을 '쾅쾅' 두드리는 것에 비하면 무척 예의바른 방법이긴 합니다. 그래도 A양에게는 고역입니다. 조용하라고 독촉하는 '똑똑' 소리가 하루에도 몇번씩 나기 때문입니다.  

박민규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마치 정숙이란 여자와 동거하는 기분이었어. 늘 정숙, 정숙, 정숙해야 했거든."

이 말처럼 고시원족은 정숙을 절대미덕으로 삼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비정상적입니다. 집이란 모름지기 독립된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은 바깥 세상에서의 근심을 모두 내려놓고 온전히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숙'을 강요하는 고시원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생활이 보장된 독립된 공간은 가장 기본적인 최소주거기준입니다. 사생활이 보장된 독립된 공간은 가장 기본적인 최소주거기준입니다.

전화통화도 맘대로 할 수 없고, 알람도 진동으로 해놓아야 하며, 서랍장 하나 맘 편히 열지 못하는 방은 결코 '자기만의 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생활이 보장되지 못하는 집은 가장 기본적인 최저주거기준에도 미달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서울 인구 1%는 고시원족... 벽간소음 규정은 없다

문제는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고시원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7~2009년 서울경기지역 고시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고시원족은 약 10만명으로 서울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합니다. 현실이 이렇지만, 고시원의 주거환경을 개선할 법규정은 전무한 상황입니다.

층간소음의 경우, 뒤늦게나마 법이 마련됐습니다. 층간소음을 방지할 수 있도록 설계 기준을 강화한 건축법 개정안이 오는 11월부터 시행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벽간소음의 경우, 관련 규정이 전무합니다. 이제라도 고시원족 같은 주거취약계층의 삶의 질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려줄 법안이 절실합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에 공모하는 글입니다.



태그:#고시원 , #고시원족, #민달팽이족 , #벽간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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