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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를 떠나 방문한 첫 도시 조드푸르! 드디어 인도 서북부의 사막 지역인 라자스탄 주에 들어왔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클락룸을 찾아 짐을 맡겼다. 그곳에서 일을 처리하는 여인이 가방 세 개를 맡기려는 우리에게 영어로 무엇인가를 계속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발음하는 영어는 영어이긴 한데, 우리가 아는 영어가 아니었다.

세 명 모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니, 답답함에 화가 났는지 그녀는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그녀와 우리 사이에 커다랗고 차디찬 구멍이 뚫려버렸다. 가까스로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빠스뽀드"(패스포트)였다.

시계탑을 보려 고개를 들자 메헤랑가르 성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 조드푸르의 명물, 사다르 바자르의 시계탑! 시계탑을 보려 고개를 들자 메헤랑가르 성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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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샤를 타고 시계탑이 있는 사다르 바자르(Sadar bazar)로 향했다. 사방으로 문이 뚫려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 상점과 노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자르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시계탑이 참 명물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도 한양의 네 문(인의예지), 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홍지문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보신각(신)과 같은 모습이랄까?

하지만 그보다 더 멋진 것은 시계탑을 보려고 고개를 들자마자, 그 뒤로 팔을 벌려 조드푸르를 감싸 안은 자태의 메헤랑가르 성이었다. 지상의 인간계를 인자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내려다보는 신의 영역인 듯 성은 탈속의 무게를 갖고 있었다.

인도의 신들이 거주하는 올림포스 신전과도 같은 신비감마저 들었다. 궁전 뒤로 펼쳐진 하늘이 파랑색 도화지가 되어 궁전을 도드라지게 부각시켰다. 우리가 사막지대인 라자스탄 지역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주위에 보이는 인도여인들의 복장은 알록달록 전통 의상의 향연이었다. 조드푸르는 사막 위에 놓인 컬러의 도시였다. 

할머니가 손녀딸을 데리고 시장에 나왔다. "아이구, 내 새끼. 이쁜 거 하나 고르렴."
▲ 라자스탄 여인들! 할머니가 손녀딸을 데리고 시장에 나왔다. "아이구, 내 새끼. 이쁜 거 하나 고르렴."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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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헤랑가르 성의 위세에 눌려 굳어 있을 때, 어디선가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맑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일본인인가요? 한국인인가요?(Are you Japaness? Korean?)"

한 소년이 우리를 보자마자 친근하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삐끼? 호객? 그런데 다른 호객꾼들에게 느낄 수 없는 미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몇 마디 싱거운 얘기가 오고가자 그 아이는 바로 앞에 자신의 삼촌이 운영하는 가게가 있다면서 함께 가보자고 했다. 지금은 바빠서 못 가고, 메헤랑가르 성을 구경한 다음 시간이 되면 꼭 들르겠다고 에둘러 거절하였다.

그는 내 말 속에서 진실을 보지 못한 듯, 손가락을 내밀며 약속을 하자고 했다. 나는 그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고, 엄지를 찍고 약속했고, 검지로 그 아이의 손바닥을 간지럼 피며 약속했고, 양손으로 그 아이의 손을 비비며 약속했다. 그 아이는 뒤돌아가며 나에게 다시 한 번 외쳤다.

"약속(promise!)"  

북문 밖에 유명하다는 오믈렛 집을 찾았다. 거창한 식당으로 예상했는데 아주 초라한 노점 식당이었다. 할아버지는 요리를 하였고 아들인지 직원인지 모를 직원이 한국어를 섞어 가며 메뉴판을 주었다. 우리가 방문하자 요리하던 할아버지는 난데없이 나를 향해 "여행 안내책자를 펴라(Open your guidebook)"고 말했다. 조드푸르의 추천 식당이 소개되어 있는 쪽을 열자, 손가락으로 책에 소개되어 있는 자신의 가게를 손으로 가리키며 "우리집(It's home)"이라며 웃었다. 서빙을 보는 직원은 우리를 플라스틱 의자에 앉으라고 한 후, 두꺼운 방명록 서너 권을 건네주었다. 방명록에는 한국어로 된 방문후기들이 빡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그 가운데 한 쪽을 펴고 한국어로 말했다.

"공유, 공유"

그곳에는 <김종욱 찾기> 영화를 찍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공유의 방문후기가 적혀있었다.

여행을 떠나며 성경책처럼 꼭 손에 쥐고 있는 것이 가이드북이다. 그리고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숙소와 식당 중심으로 여행의 일정을 잡게 된다. 간혹 인도 배낭여행의 메카라고 불리는 '인도방랑기' 네이버 카페를 통해 실시간 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인도 현지에서는 가이드북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이드북에서 어떤 기준으로 숙소와 식당을 선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이드북은 그저 가이드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조드푸르에는 가이드북에 추천하지 않은 수많은 식당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에게도 추천받지 않은 현지 식당들을 방문할 작은 여지도 두지 않았다. 이동과 안전에 관련된 최소한의 계획만 사전에 세워놓고, 나머지 먹고 자는 세세한 부분은 현지에서 좌충우돌하며 해결해 나가는 여행은 어떨까?

한번 가이드북에 오른 식당은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농부 마음으로 '가만히' 찾아오는 우리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이드북에 오르지 않은 식당과 인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외면 받거나 도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배낭 여행자에게도, 현지 인도인들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상도(商道)일 것이다.     

옆에서 오믈렛을 먹는 남자 대학생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직원에게 종이에 적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며 자신의 동영상에 출연해 달라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사랑고백의 영상 편지였다. 그는 인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양각색의 현지인의 입을 통해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아~ 저 영상을 보는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아니면 그 마음을 못 받아주는 미안함이 클까? 그래도 영상을 준비하여 한국으로 돌아가는 저 친구는 세상을 모두 얻은 마음일 것이다. 항상 저런 설렘으로 길을 걷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니던가? 길 위에서 아름다운 삶이 꽃피운다.

까꿍! 까르르 웃는 베이비

얼굴에 때가 없다. 커다란 눈에 비친 맑은 영혼이 나를 보고 있었다.
▲ 라자스탄 아이들! 얼굴에 때가 없다. 커다란 눈에 비친 맑은 영혼이 나를 보고 있었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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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헤랑가르 성으로 가는 길을 몰라 자전거를 끌고 하교하는 한 학생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교복을 입고 아주 핸섬하게 생긴 학생은 자기 집과 같은 방향이라며 따라 오라고 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소년의 발걸음이 햇살만큼 가벼웠다. 델리와 다르게 이곳에서는 많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외국인을 볼 때마다 달려 나와 "어디서 왔어요?", "사진 찍어 주세요!"하며 말괄량이들처럼 달라붙어 애교를 떨었다. 가만히 그 아이들의 눈과 장난기를 보고 있으면 청량제처럼 기분이 맑아졌다. 뭔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온몸으로 서로의 행복을 시끌벅쩍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노자가 이야기한 영아(嬰兒)가 저들일까? 노자는 인간이 지식과 지혜가 많아질수록 부자유스러워진다고 하였다. 마음의 평화도 찾지 못하고 웃음도 잃는다고 하였다. 어떤 조사 결과를 보자. "어린 아이는 하루에 400번을 웃는데, 어른은 하루에 기껏해야 15번을 웃는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노자는 말한다. 지식이 곧 편견이 되어버려 옳다 옳지 않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좋다 싫다 등의 분별을 하게 되고, 결국 그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게 되기 때문이라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뭘 그렇게 아는 게 많고, 지혜가 많은지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 진리인 양 떠들어댄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고 했는데, 지혜로워진 그들이 더 일도양단(一刀兩斷)의 날카로움으로 옳고 그름을 가차 없이 자르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못된 놈', '사람 같지도 않은 놈', '어른도 몰라보는 놈',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며 타박한다. 노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은 편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유하는 존재인 우리가 어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겠는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우리가 어찌 깊은 사유를 통해 선택하고 행동할 수 없겠는가? 이성과 자유의지를 부정하라는 것인가? 노자, 장자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당신이 지금 선택하고 판단하는 근거는 보편타당한 것입니까? 겸손하게 뒤돌아보십시오. 정말 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그런 판단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이해타산과 자기중심적 편견에 따라 결정을 내린 것입니까? 인생의 연륜이 많은 어른들이 이렇게 얘기한다면 노자도 흐뭇해하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똑같습니다.",
"허허. 나도 꽤 오래 살아왔는데 잘 모르겠네요."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깊이, 시간의 넓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그 눈을 보며 폭과 깊이를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나의 눈이 좀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 블랙홀처럼 까만 눈동자에 편견 없이 세상을 그대로 담고 싶다. 호수에 비친 달뿐만 아니라 그 달무리까지 반사하기를 꿈꾼다. 내 앞에 있는 이 인도아이들처럼.     

스머프의 땅, 블루 시티

이곳에서 살았던 이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 메헤랑가르 성 입구 이곳에서 살았던 이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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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의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니 계단 끝에 메헤랑가르 성으로 향하는 자동차 도로가 있었다. 메헤랑가르 성을 왼편에 끼고 도로변을 천천히 거닐었다. 따뜻한 햇살에 오르막길을 걷는 동안 옷에 땀이 은근하게 배어들었다. 성에 가까이 갈수록 성을 찾은 많은 방문객이 보였다. 단체로 여행을 온 학생이 유난히 많았는데, 아마도 멀리 수학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그 때 갑자기 내 눈에 띈 것이 있었는데, 어여쁜 인도 여선생님이었다. 곱디고운 여인의 모습에 넋을 잃어버리는 통에 메헤랑가르 성의 존재마저 잊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메헤랑가르 성과 여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녀는 이미 나에게 라자스탄의 공주님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보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 세 명의 동방박사!  

조드푸르가 속해 있는 라자스탄은 '라지푸트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라지푸트는 라자스탄을 지배했던 전사 집단으로,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할 때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조하르(Johar)'의 전통을 가진 용맹스럽고 자부심이 강한 집단이었다. 남편이 죽으면 여성이 화장용 장작더미에 몸을 던지는 '사티(Sati)' 풍습도 지켰다. 원래 '사트(sat)'는 '정숙한 아내'를 의미한다. 무굴 제국이 인도 전역을 통일할 때에도 용맹스러운 전사들의 지역인 라자스탄만은 혼인 등을 통한 회유책으로 그들을 끌어안았다고 한다.

하늘도, 땅도 모두 파랑으로 채색되었다. 이곳은 블루 시티 조드푸르이다.
▲ 블루 시티 하늘도, 땅도 모두 파랑으로 채색되었다. 이곳은 블루 시티 조드푸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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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체험학습을 온 아이들이 파랑 도시를 알록달록 물들이고 있었다.
▲ 파랑 도시의 칼라풀 아이들 현장체험학습을 온 아이들이 파랑 도시를 알록달록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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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헤랑가르 성은 조드푸르의 마하라자(인도에서 왕의 칭호)가 125m의 높은 언덕에 15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에 걸려 완성하였다. 현재 메헤랑가르 성의 내부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관광객들의 방문을 받고 있었는데, 꽤 비싼 입장료와 사진 촬영권을 구입해야 입장할 수 있었다. 메헤랑가르 성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성곽 위에서 바라보는 조드푸르의 조망일 것이다.

조드푸르는 블루 시티(Blue city)라고도 불리는데, 파란색으로 채색된 수많은 집들이 도시 전체를 파란색으로 물들여 놓기 때문이다. 원래 브라만 계급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을 파란색으로 칠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셔 브라만이 아닌 주민들도 하나둘 자신의 집을 파랗게 칠했고 도시 전체가 파란색을 띠게 되었다.

오늘은 하늘과 땅이 모두 거울에 비친 양 파랑 일색이었다. 성곽을 내려다보며 파랑에 취해 있는데, 성곽 위만은 빨강, 노랑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단체로 여행을 온 전통 복장의 학생들이 성곽에 기대어 원색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마주치면 수줍은 듯이 미소를 보이며, 친구끼리 히죽 히죽대며 웃었다. 집안이 좀 부유해 보이는 몇몇 아이들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델리를 중심으로 몇몇 도시는 벌써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어 다양한 서비스를 즐긴다고 하였다.

하지만 왠지 이곳에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여학생의 모습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인도와 다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가난한 인도라는 편견에 갇혀 인도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IT강국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몰래 그들을 바라보고, 마주치고, 웃고, 수줍어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성에서 내려와 어디로 터져있는지도 모르는 골목골목을 돌아 시내로 내려왔다. 도대체 이곳이 어디지? 사람들에게 '시계탑'을 물어물어 다시 시장으로 힘겹게 돌아왔다. 메헤랑가르 성을 보기 위해 하루 일정으로 조드푸르를 들렸는데, 메헤랑가르 성을 방문하고도 뜻밖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노천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음료를 마신 후 식당을 찾아 골목으로 들어서자, 삼층 건물 옥상에서 우리를 향해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손짓에 홀려 옥탑방 식당 계단을 올랐다. 옥상의 배경은 메헤랑가르 성이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메헤랑가르 성을 조명 삼아 인도 맥주인 킹피셔(맥주) 만찬을 즐겼다. 신선놀음이 무에 있겠는가? 사람이 만찬이고, 함께 함이 만찬이고,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만찬이지! 우리는 최고의 야경을 가진 레스토랑에서 마음껏 만찬을 즐겼다.

자이살메르 행 야간 기차를 타기 위해 식당에서 나섰다. 시계탑을 지나가는데 오전에 손가락까지 걸며 '꼭 들리겠다'고 약속했던 그 소년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저 기억하죠? 약속했잖아요."

나는 속으로 '그냥 빈 말이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네.'라고 자조하였다. 나는 이미 손가락 도장에, 복사에, 코팅까지 다 해 놓은 신의를 저버리고 '기차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 아이의 표정, 기분?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만났던 인도의 호객행위는 모두 거짓과 위선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뭔가가 날 붙잡고 있었다.

뭔가가…. 장호 또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내 팔을 붙잡고 "형, 약속했잖아. 애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다시 뒤돌아가자"라고 하며 타박하였다. 그래, 장호야. 돌아가야 맞는 거지? 우리는 다시 그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펄쩍펄쩍 뛰며 좋아라 했다. 그가 안내하는 삼촌 가게에 들려 나와 장호는 스카프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꼬옥 껴안아주었다.

"헤이, 나 너하고의 약속 지켰다. 그러니 너도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연이 되면 꼭 다시 보자."

가방에 넣은 스카프가 난로처럼 온기를 피웠다. 등이 따뜻해졌다. 그 아이의 작지만 온기 어린 품이 그리울 정도로….

밤이 되면 조드푸르의 역은 걸인의 공간이 된다.

밤이 된 조드푸르! 도시의 걸인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낮은 메헤랑가르 성의 도시요, 밤은 걸인의 도시이다.
▲ 조드푸르 역의 주인은 누구일까? 밤이 된 조드푸르! 도시의 걸인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낮은 메헤랑가르 성의 도시요, 밤은 걸인의 도시이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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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조드푸르 역에 도착했다. 릭샤를 내리는데, 꼬맹이 손을 잡고 있는 한 여인이 구걸을 청했다. 미안하다며 거절하고 역 앞으로 가는데, 역 앞의 광경을 보고 눈과 입이 쩍 벌어졌다. 역 앞, 대합실, 매표소 등 사람이 앉고 누울 수 있는 모든 곳을 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상상에서나 그려지는 진풍경이 눈앞에 펼쳐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걸인의 무리와 누워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심까지 자아내게 했다.

누가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이고, 누가 쉴 곳을 찾아온 걸인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대합실에 있자니 민망하고, 매표구 앞에 있자니 낯 뜨겁고, 역 입구에 있자니 무서웠다. 낮 동안 흩어져 있던 걸인들이 밤이 되고 기온이 떨어지며 역으로 모여 든 것이었다. 참 신기한 것은 누운 이도, 그 곁을 지나는 이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관심도 없으며,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어 보였다.

역 정문 바로 옆 차가운 바닥에 자리를 잡은 걸인 가족이 눈길을 붙잡았다. 엄마는 잠이 오지 않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조곤조곤 어르고 달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나란히 남자아이 셋이 지저분한 도포 한 장을 나눠덮고 잠을 자고 있었다. 엄마는 어정쩡한 자세로 보채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잠을 못 이루는 한 아이에게 다가가 이불을 끌어 덮어 주었다. 아이는 이불을 덮어주는 엄마에게 연신 장난을 걸었다. 엄마는 시간이 늦었다며 빨리 자라고 채근하였다. 엄마의 잔소리도 무시한 채 손가락으로 엄마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하는 아이의 천연덕스런 웃음소리가 조드푸르 역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엄마는 따뜻한 품에 아이를 꼬옥 안고 있었다. 엄마의 쿵쿵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잠에 빠져들 것이다. 잘 자라, 우리 애기!  

우리는 가방을 메고 플랫폼으로 나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리어카에서 오렌지도 사 먹고, 담소도 나누며, 기차가 들어올 때까지 세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조드푸르를 떠나며 머릿속에 남은 것은 메헤랑가르 성과 걸인 무리였다. 메헤랑가르 성과 걸인! 조드푸르는 극대 극의 도시였다. 해가 떠오르면 메헤랑가르 성의 도시이고, 해가 지면 걸인의 도시가 되었다. 이 밤, 조드푸르 역은 걸인에게 메헤랑가르 성이었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중고등학교 현직 교사 세 명이 2014년 1월, 한 달간 인도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델리에서 자이살메르, 우다이뿌르, 조드뿌르, 아그라, 바라나시, 맥그로드 간지 등 인도 중북부를 방문했습니다.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사색과 반추, 철학'이 있는 '여행'에 관한 것입니다.



태그:#인도배낭, #인도, #조드푸르, #메헤랑가르성, #라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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