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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5일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의정부여자중학교에서 학생들이 9시에 맞춰 등교해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2학기부터 9시 등교 정책 시행계획을 각급학교에 통보한 이후 첫 사례다.
 지난 8월 25일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의정부여자중학교에서 학생들이 9시에 맞춰 등교해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2학기부터 9시 등교 정책 시행계획을 각급학교에 통보한 이후 첫 사례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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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수업을 시작하려니 모두들 춥다고 호들갑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낮엔 너무 덥다며 에어컨을 켜달라던 아이들이다. 교복 위에 패딩 점퍼를 껴입은 아이들이 적지 않고, 무릎에는 두툼해 보이는 무릎담요가 덮여 있다. 방석에 쿠션, 심지어 목 베개까지 '완전 무장'을 한 채 수업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낯설다. 그 정도로 춥진 않은데. 그런데, 이 방한도구들이 '침구'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정작 책상 위에는 교과서 한 권만 달랑 놓여 있을 뿐, 메모할 펜 하나 없이 휑하다. 그나마 펼쳐진 교과서도 그날의 진도와는 상관없는 페이지다. 수업시간 잠잘 만반의 준비는 돼 있으나, 공부할 자세가 돼있지 않은 것이다. 지난 시간 어디까지 공부했는가를 물어도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마지못해 반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교과서 쪽수를 이야기하는데, 그도 피곤에 절어 귀찮아하는 낯빛이 역력하다.

학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8시 반경에 시작되는 요즘 고등학교 1교시 교실 풍경은 대개 이렇다. 수업이 시작됐다고 한들, 춥다며 두툼한 외투를 입고, 방석을 깔고, 담요를 덮고 앉은 아이들이 집중할 리 만무하다. 시작종이 울린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절반 넘게 쓰러지고, 앞줄에 앉은 몇몇 '생존한' 아이들만을 위한 수업으로 또 하루가 시작된다. 오랫동안 봐온 탓에 이젠 그 모습이 친근한 듯 익숙하다. 늘 그래왔듯, 1교시는 취침 시간이다.

1교시 수업은 아이들만 포기한 게 아니다. 교사들도 가장 꺼려하는 시간이다. 국영수와 같은 과목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체육이나 미술과목 교사들도 1교시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학년 초 시간표가 발표될 때, 교사들이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것도 요일별 1교시 유무 때문이다. 고등학교 교사에게는 주당 수업시수만큼이나 '절박한' 문제다. 거칠게 말해서, '내 수업시간만 아니면 돼'라는, 한 판의 복불복 게임이다.

'9시 등교'가 근본적 해결책 될 수 없는 이유

내년부터는 우리 학교의 1교시 수업 교실 풍경이 과연 달라질까. 지난 8월 말, 경기도 교육청이 전격 실시한 '9시 등교'가 이곳 광주광역시에서도 내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말, 가정통신문을 통해 일선 학교마다 학생, 학부모, 교사를 상대로 의향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고, 지난 10월 30일 그 결과가 공개됐다.

쌍수를 들고 환영한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을 감안한 학부모와 교사들조차 등교시간을 늦춰야 한다는 의견이 '예상대로' 다수였다. 초, 중, 고등학교의 차이도 크지 않았고, 우려됐던 맞벌이와 홑벌이 가정 간에도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분석됐다. 굳이 차이라면 등교시간을 8시 30분으로 할 것인지, 수업 시작 시간에 맞춰 9시로 할 것인지 정도다.

그런데,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지금, 기대와 설렘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찬반에 대한 입장의 변화라기보다 '9시 등교'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회의감이 큰 것이다. 애초 도입하려던 취지대로, 등교시간을 늦추는 것만으로 학생들의 건강권을 보장하고, 비몽사몽 오전 수업을 정상화해 학습 효율성을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다들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9시 등교'가 상징적인 퍼포먼스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이 해결책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9시 등교'를 오매불망하던 아이들조차 요즘 들어 시간표가 한 시간여 뒤로 늦춰지는 것일 뿐 학교생활이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라며 냉소를 보낸다. 심지어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동시에 그만큼 늦춰지거나, 기존의 학습량을 벌충하기 위해 실제 방학이 짧아질지도 모른다며 우려하는 아이들도 있다. 어떤 학교인데 우리를 그냥 쉬게 놔두겠냐면서.

주위 교사들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하긴 마찬가지다. 출근시간이 늦춰진 건 좋은데, 총 근무시간이 줄어들 거라고 여기는 이들은 거의 없다. 아이들과 비슷한 우려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고작 등교시간을 한 시간 가량 늦추는 걸 가지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어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는 게 어이없다는 이들도 많다. 기실 현재도 등교시간은 학교 실정에 맞춰 학교장의 재량으로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더러는 등교시간을 늦춰봐야 새벽까지 잠 안 자는 '올빼미'들만 늘어날 거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등교시간을 30분 가량 늦췄는데도 지각생 수는 전혀 변함이 없더라는, 자신의 경험과 몇몇 학교의 비슷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가는 심야 독서실 운영시간만 더 늘어나게 될 거라는 예측도 덧붙였다. 이른바 '풍선 효과'에 대한 우려다.

자정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고등학생은 거의 없다

'등교시간이 늦춰지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교사의 바보스런 질문에, '게임을 한 시간 더 할 수 있어 좋다'며 선선히 고백(?)하는 아이들이 적잖다. 놀라운 건, 잠을 더 자겠다거나, 아침밥을 꼭 챙겨 먹고 오겠다는 등의 예상했던 '모범 답변'이 의외로 적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학교 일과야 어떻든, 아이들의 일상은 전체적으로 한 시간쯤 뒤로 늦춰지는 모양새로 굳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많은 학부모들의 우려가 이를 뒷받침한다. 찬성이 많았다지만, 기실 학부모들은 '9시 등교' 방침에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아침마다 자녀를 깨우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하는 마당이니 나쁠 거야 없다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밤늦게 잠드는 습관이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이다. 자칫 섣부른 '9시 등교' 방침이 아이들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더 늦추게 되지나 않을지 우려한다.

지금도 자정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고등학생들은 거의 없다. 대개는 새벽 1시 전후이고, 새벽 3시를 넘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게 엄연한 현실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늦은 시간이지만, 정작 아이들은 그런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되레 낯설어한다. 이런 일상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냐며 무덤덤해 하는 것이다.

밤 10시에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 타고 귀가하면 11시, 씻고 간식을 먹고 숙제를 하고 가방을 챙기면 얼추 자정이라는 거다. 아무리 바삐 서둘러도 자정 이전에 잠자리에 드는 건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하교 후에 학원과 독서실에 다니는 경우라면 어떠하겠는가.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겐, 그들의 말마따나, '1 to 6'가 표준화된 취침 시간이다.

원어민 교사가 건넨, 뼈 있는 농담 한 마디

9월 1일부터 경기도내 대부분의 학교에서 '9시 등교'가 실시된 가운데, 이날 오전 수원시 조원고등학교 학생회가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아침 먹고 등교하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9월 1일부터 경기도내 대부분의 학교에서 '9시 등교'가 실시된 가운데, 이날 오전 수원시 조원고등학교 학생회가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아침 먹고 등교하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경기도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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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수면 과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건 정상에서 한참 벗어났다.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의 잠자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런데도 '9시 등교'는 일어나는 시간을 늦춤으로써 취침 시간을 확보하자는 것이어서, 대증요법일 뿐이며 '궁여지책'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정작 건드려야 할 '1'은 내버려둔 채, '6'만 문제 삼은 셈이니 말이다.

이태 전 원어민 교사가 이런 농담을 건넨 적이 있다. 밤마다 불야성인 한국의 고등학교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어떻겠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낯선 풍광이니 도시의 야경으로서 손색이 없다며 조롱했다. 자신도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땐, 도시의 큼지막한 콘크리트 건물마다에 불이 환하게 켜진 것을 보고 뭐하는 곳인지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일과는 이른 아침에 시작돼 '별이 빛나는 밤'이 되어서야 끝난다. 오후 5시께, 하루 예닐곱 시간의 정규수업이 끝나면 바로 보충수업이 이어진다. 아이들이 느끼기에 이름만 '보충'일 뿐 정규수업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여름과 겨울 방학 중에 실시되는 보충수업조차도 학년 초에 미리 시간표를 편성할 만큼 뿌리 깊은 관행으로 자리 잡았으니, 이젠 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이라면 점심은 물론 저녁 식사까지도 학교에서 먹는 걸 당연시 여긴다. 저녁식사 후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은 '야자'라는 이름의 '고유명사'가 되어 공식적인 연간 학사일정에 당당하게 포함돼 있다. 되레 고등학생들의 사교육비를 절감하는 효과가 크다는 '찬사'마저 듣는 실정이다.

'학습 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자고 요구하자'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건 여유로운 등교를 위한 '아침'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따뜻한 '저녁'이다. 학교가 대신해줄 수 없는 그 시간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보충수업과 야자로부터 심야 학원 수강과 독서실에 이르기까지 고등학생들의 일과에 우리가 어찌 손써볼 수 없다고 믿는 '고정 상수'가 너무 많다. 이를 건드리지 않고 아이들의 건강권을 운운하는 건 '차선'이라기보다는 '기만'에 가깝다.

과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은 사치일까. 고등학교 시절 몸에 밴 아이들의 공통적인 '과잉 학습' 경험이, 그들이 사회에 나와 겪게 되는 '과잉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떨어뜨리게 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무튼, 의도한 건 아닐 테지만, '9시 등교'는 '저녁이 있는 삶'을 맞바꾼 셈이 돼버렸다.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지금, 뒤늦게 일부에서는 적당한 등교시간과 찬반을 물은 설문 문항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등교시간을 늦추는 지엽적인 문제가 순간 학교 개혁의 본질적인 문제인 양 둔갑돼 버렸다고 한탄한다. 수많은 개혁 조치 중의 하나이고 시작일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전부이고 목적인 양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닌 것 같다. 한 아이가 '9시 등교' 방침의 허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등교시간을 늦춰달라고 애걸복걸하지 말고, 학습 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자고 요구하자.' 등교시간이 늦춰진다는 소식에 다들 반색하며 마냥 들뜬 분위기 속에 나온 '과격한' 주장이다. 요컨대, '9시 등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태그:#9시 등교, #저녁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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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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