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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문>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처음 인상적인 몇 장면, 왕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선위하겠노라"를 외친다. 그러면 다섯 살의 어린 세자가 등장해 신하들과 함께 "거두어주시옵소서"로 답한다. 반복되는 왕의 공갈 '선위' 선언에 무릎 꿇는 세자는 어느덧 스물이 된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표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표지
ⓒ 역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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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등장하는 왕은 영조, 세자는 사도세자다. 장면은 몇 년 전 읽은 책을 떠올린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역사의 아침, 2011)다. 자칭, 역사평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1998년 펴낸 <사도세자의 고백>의 개정판이다.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이라는 부제를 달고 선보인 이 책은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장편역사서지만 잘 읽힌다.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역사평설'이라는 장르에 속해 있으므로 픽션도 팩션도 아니다. 당시 문헌을 바탕으로 진실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의 저서, <한중록>과 숙종, 경종, 영조, 정조 등의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당시 인물들이 남긴 편지글과 저서 등을 철저히 고증함으로써 최대한 사실과 진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친 이유는 18세기 조선, 당쟁의 내용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저자 이덕일은 '들어가는 글'에만 40여 페이지를 투자하고 있다. <한중록>이 기록된 시기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히는 시점과의 시간 차이, <한중록>의 저자가 취했던 남편 사도세자와는 다른 정치적 입장 그리고 이덕일 자신의 저작에 대한 서울대학교 국문과 정병설 교수의 비판에 대한 입장 등이 그 내용이다.

오랜 동안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사도세자'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그만큼 지난한 작업이면서도 이른바 주류학자들에게는 환영 받지 못할 일이었다고 이덕일은 밝히고 있다.

영조의 콤플렉스

영조는 크게 두 가지 콤플렉스에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하나는 출신 성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종 독살설이다. 영조의 6살 연상 이복형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게 되는데 그 이유가 영조와 그가 속한 당 즉, 노론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나라 안에 자자했기 때문이라고.

저자 이덕일은 이런 두 가지 콤플렉스 때문에 영조가 미래를 위한 정치보다는 과거에 발목이 붙잡힌 불행한 군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영조는 왕이 된 지 무려 29년 동안이나 모친 쪽 가계를 추승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소론 당론의 경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이른바 '택군'을 주도한 노론세력은 세자 대신 '왕세제'라는 자리를 만들어 연잉군(영조)을 추대하고 곧이어 대리청정을 하게 했다. 경종과 소론의 역풍을 맞아 노론 4대신이 '목호룡의 고변'을 통해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는데, 훗날 왕이 된 영조가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애쓴 것이다.

사도세자와 소론 vs 영조와 노론

사도세자의 주변 인물들을 보면 그는 애초에 살기 힘든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내는 혜경궁 홍씨고, 장인은 홍봉한, 처삼촌 홍인한, 처남 홍낙임 등의 처가, 김상로, 홍계희 등의 조정 중진들, 궁중 내전은 영조의 후궁 문씨, 그 오라비 문성국, 또 영조가 예순이 너머 맞은 정순왕후, 그의 부친 김한구 등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들 모두 노론 일색이었던 것이다.

영조 31년(1755년)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은 안 그래도 무늬만 탕평이던 조정에서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좋은 계기가 된다.

가만 내버려 두면 소론은 강경파, 온건파 할 것 없이 다 죽을지도 몰랐다. 세자는 정치보복을 막고 소론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했다. 영조 31년 3월 25일, 노론 사산 박치문이 올린 상소는 노론의 정치보복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여인으로 종이 된 자를 제외하고 남자로 종이 된 자는 대조(영조)께 아뢰어 일체 남김없이 진멸해 화근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박치문의 상소는 나주 벽서 사건에 연좌되어 종이 된 남자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섬뜩한 주장이었다. 세자는 박치문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정치보복의 광기에 휩싸인 조정에서 살육을 막아보려고 단신으로 애쓰고 있었다.(p.221)

'나주벽서사건' 이후 노론은 사도세자가 자신들의 정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어 본격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첫 번째 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구린 내가 진동하는 공작정치다.

많은 사람들은 세자의 생애 중에서 영조 37년 봄에 있었던 세자의 관서행을 미스터리로 여긴다. 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바로 이 관서행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견해다. 세자가 부왕 몰래 평안도 지방을 유람하면서 많은 비행을 저질러 결국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서행보다 더 큰 미스터리가 있는데, 관서지방으로 떠나기 전 8개월간의 세자의 행적이다.(p.274)

세자는 종기로 고생하던 영조 36년 부왕의 허락을 받고 온양(온천) 행궁을 다녀온다. 대리청정시기였으므로 조정의 반, 즉 분조를 이끌고 다녀온 행궁을 통해 이미 약관의 나이였던 세자가 온 나라에 늠름한 기상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효심이 지극했던 세자는 무인적 기질과 말 없는 성품을 지녔기에 백성들의 찬사가 부담스러워 일주일 만에 환궁하게 된다.

요약하자면, 세자의 무인적 기질과 말 없는 성품, '나주벽서사건'을 통해 확인된 친(親) 소론적 행보는 노론을 잔뜩 긴장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저자 이덕일의 확신이다. 이는 노론이 영조와 세자를 이간질하는 계기가 됐고, 위협을 느낀 세자는 기행으로 보이는 행적을 보였다고. 즉 관서행과 땅 속에 집을 지어 병장기를 숨기는 등의 행위가 부왕 유고 시 노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것이다.(p.328)

희대의 정치공작

영조는 세자의 복종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세자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다. 영조는 왜 이렇게 세자를 의심했을까? 왕비 김씨나 숙의 문씨 그리고 노론 대신들의 참소도 한몫 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세제 때의 자신의 행적이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p.259)

'나주벽서사건'과 '온양행궁' 이후 영조와 세자는 부자관계에서 정적으로 180도 변하게 된다. 영조는 무려 십개월이나 이 핑계 저 핑계로 세자의 진현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견제한다. 일심동체의 연을 맺은 세자빈 홍씨 또한 남편의 정적이었다는 점은 세자의 비극을 극대화한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도 소론이었으나 지아비를 따라 노론으로 전향했고,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는 노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좇아 소론이 되는 등 대부분의 왕비들이 남편을 따라 당론을 전향하는데 유일하게 혜경궁 홍씨만은 친정을 좇아 남편의 정적이 되고 말았다.

영조가 나경언의 고변서에 분노하면서 친국하겠다고 나설 때 '때마침' 입시해 있던 경기 감사 홍계희가 호위를 엄중히 할 것을 요청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홍계희는 우연찮게 '때마침' 입시한 것이 아니라 홍봉한 등과 사전 모의 아래 미리 대궐에 들어와 있었다. 나경언과 홍계희, 이해중과 홍봉한은 치밀하게 짜인 희곡의 연기자들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민 나경언이 구중궁궐 속의 지존을 만날 수 있게 연출했다.(p.305)

결국, 세자는 노론이 획책한 정치공작인 '나경언의 고변'으로 역모의 주범이 되어 뒤주에 갇히게 되고, 갇힌 지 8일 만에 사망한다. 비정한 아버지는 한여름 서른이 가까워 오는 나이든 아들을 뒤주에 가둔 것도 모자라, 아들을 살리자고 주장한 신하들을 귀향 보내거나 사형시키는 짓을 하고 있었다.

노론이 득세하는 나라에서 노론의 수장이 되고 만 영조, 그의 나이 고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살만큼 산 아비가 더 살겠다고 이제 꿈을 펼칠 나이의 아들을 죽인 꼴이다. '쌍거호대'라는 원칙을 지키며 소론과 노론을 두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던 제위 초의 초심은 잃은 결과다.

사도세자는 고조할아버지 효종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나라 백성과 사대부들이 피를 흘릴 가치가 있는 것은 '북벌'이자 만주 벌판이고 중원대륙이라고 생각했다. 산과 강과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만주, 그곳이 조선 사대부와 백성들이 피를 흘릴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p.236)

신중하고 무인기질이 있었다는 사도세자가 꿈 꾼 것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나라 안에서 같은 민족끼리 내 편 네 편 갈라 싸우는 것이 아닌, 힘을 길러 세계로 웅비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쥔 권력을 놓칠 수 없어 온갖 편법과 반칙을 일삼은 노론 일파들과는 차원이 다른 영웅의 기상을 품은 군주상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는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가 정신병이 걸렸다던 사도세자는 없었다. 드라마 <비밀의 문>이 조금이나마 사도세자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대의 문구멍이 되기를 바란다. 고증 작업에 피땀 흘렸을 저자 이덕일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2011)


태그:#사도세자,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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