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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익어간 농촌 들녘의 나락들이 하나 둘 빈 그루터기만 남기고 가을을 마감하고 있다. 농부들은 풍년이지만 풍년이 아닌 나락들을 수확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침 일찍부터 콤바인을 끌고 나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때론 캄캄한 밤까지 불을 밝힌다. 그렇게 농촌의 들녘은 바쁘다. 거기에 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밥이 들어있는 농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천대받기 일쑤다. 그래도 예전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며 위해주는 척이라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척도 없다. 정부는 각 나라와 FTA를 맺으면 농축산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

약자에게 한 없이 강하고, 강자에겐 한없이 약한 이들에게 농촌은 그저 희망 불모지와 같다. 가끔 농촌에서 무슨 특용작물해서 억대를 버느니, 마느니 하지만 그것은 백에 하나 꼴이다. 헌데 언론은 농민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쪽으로 몰고 간다. 즉 농사를 지은 사람들만 생각을 잘 하고 노력하면 된다는 식이다. 하나의 사건을 일반화하는 뻥튀기를 한다.

서정홍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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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가을까지 벼 한 포기 한 포기 목숨처럼 살피고 하늘이 도와 풍년이 들면 무엇하랴. 젊은 것들이 수입 밀가루로 만든 빵 과자 라면 국수 우동 짜장면 피자 따위를 밥 먹듯이 먹어 대는 바람에 쌀 소비가 줄었다고, 묵은 곡식 때문에 창고가 모자란다고, 그래서 벼를 수매하기가 어려우니 농부들 스스로 팔등지 말든지 하라고 하니….

농사 잘 지어 풍년이 들면 나라에서 상을 줘도 시원찮을 텐데, 풍년이 든 것도 죄가 되는 나라에서 그까짓 논에 나는 피는 뽑아서 무엇하랴. 저 파란 놈은 오느 누구보다 숲골 할아버지 마음을 잘 알아. 그렇기에 저리 제 세상 만난 듯이 설쳐 대지. - < 피는 뽑아서 무엇하랴> 일부분

경남 합천의 황매산 기슭 산골 마을에서 직접 논밭을 갈고, 두엄을 내고,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매다가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밤에 시를 쓰고 있는 시인.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10년 넘게 시골 이장을 하고 있다는 서정홍 시인의 시는 솔직하다. 그리고 꾸밈이 전혀 없다. 농촌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을 쉽고 소박한 언어들로 시를 쓴다. 그러면서 때론 직설적이다. 그리고 쉽게 읽힌다. 그리고 시어만큼 구수하게 떨어놓은 말들 또한 정감이 가득하다. 그와 이야기하다보면 고소한 거름 냄새에 금방 빠져든다.

<피는 뽑아서 무엇하랴>는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에 수록된 시 중에서 농촌의 서글픈 현실을 노래한 몇 편의 시 중 하나다. 뽑아버려야 할 피를 그대로 둘 수밖에 없는 숲골 할아버지는 노인 밖에 남지 않은 우리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쌀이 남아돈다며 수매하지 않은 현실과 낮은 수매값으로 인해 맥을 풀리게 하는 현실. 시인은 돌려말하거나 비유하지 않고 그대로 말한다.

사정홍 시인
 사정홍 시인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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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그의 시는 따뜻하다. 사람에 대한, 주변에 대한 따스한 온기와 관심이 있다. 시를 읽다 보면 그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온다.

밤 열 시, 지하 시장 술집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무들과
조개구이에 낙지볶음까지
푸짐하게 차려놓고
웃고 떠들며 술 한 잔 나눈 지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우리 옆자리, 뒤이어 들어온
노숙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김치 쪼가리 앞에 놓고
딱 한마디 서로 주고받고는
술잔만 기울입니다.

"밥은 드셨는가?"
"아입니더." - <겨울밤> 전문-

늦은 밤, 김치쪼가리 하나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밥' 걱정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우리의 또 하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 발자국만 벗어나 외진 곳을 바라보면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랴. 시인은 그런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밥은 드셨는가?" "아입니더." 딱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그 한마디는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내 이웃의 모습이고, 가족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정홍의 시인의 시는 쉬운 공감이다. 평소 시를 읽지 않은 아이들도 쉽게 공감하고 좋아한다. 그 속에 삶이 있기 때문이다. 꾸밈없는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생각꺼리를 준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학교가
좋은 학교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언론이
좋은 언론이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단체가
좋은 단체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정치가
좋은 정치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종교가
좋은 종교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 <그런데> 전문-

이 시를 가지고 아이들과 작은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학교는, 우리의 언론은, 우리의 정치는, 우리의 종교와 나라는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아이들은 절망적인 소리만 내뱉었다. 언론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자들의 편만 든다고 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비판적인 발언들이 쏟아졌었다.

순종만 강요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을 양성하는 학교, 헌금을 강요하고 순종만이 최고의 믿음임을 강조하는 종교, 가난한 자는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하는 나라, 표를 얻을 때만 고개 숙이고 당선되면 안하무인 목에 힘주는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들을 들으며 아이들 가슴속에 많은 분노와 절망이 쌓여있음을 보았었다. 그러면서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교육, 사회, 정치 등이 변할 거라는 기대를 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대로다. 변한 게 없다. 사람도 사회도 정치도 그대로다. 그저 파도에 휩쓸리듯이 쓸려가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농사꾼 시인의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이 씁쓸하다.

덧붙이는 글 | 서정홍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보리 / 값 10,000원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지음, 최수연 사진, 보리(2012)


태그:#서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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