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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서 미군이 연대나 대대 급으로 주둔한 것에 비해 한국군은 중대 단위로 작전지역을 나누어서 공군력이 없는 베트콩이 접근할 수 없는 고지대에 3, 4중 철조망을 치고 진지를 지어 놓고 주둔했다.

그 때까지 "뭉쳐야 산다"는 고전적인 전술을 고집하던 미군은 한국군이 이렇게 "흩어져야 산다"는 전술을 펴자 처음에는 위험한 전술지역에서 소규모의 부대가 고립해서 주둔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다며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국군은 마치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고립돼 벽을 쌓고 사는 것 같지만 명령이 내려지면 가까운 거리의 기지에서 나와서 작전과 매복 임무를 수행했다. 때문에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나타나자 나중에는 미군도 따라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한국군과 미국군의 차이

나는 그 실패 이유가 다름이 아니고 편의시설과 오락시설까지 갖추어져야 하는 미군들이 최소 생존의 조건만 갖춘 한국군 같은 생활을 장기간 동안 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시 미국과 한국의 생활 수준이 차이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두 나라의 생활 수준의 차이는 마치 오늘날 이것저것 갖추고 사는 남한 사람의 생활과 밥만 먹으면 되는 북한 사람들의 생활과의 차이만큼이었다. 때문에 한국군에게는 가능한 열악한 기지 생활이 미군에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내가 가본 미군 중대 단위 막사는 개인용 침실에 냉장고는 물론이고 당구대까지 갖추었다.

미군의 경우 월남전에서 30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의 실종자 수는 놀랍게도 달랑 6명이다. 이 숫자도 월북으로 간주된 2명 중 가족들의 기나긴 싸움 끝에 나중에 납북으로 판명된 안학수 하사까지 포함된 것이다. 안 하사도 붕타우에서 사이공으로 출장을 갔다가 납치됐다고 하니 부대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보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전방도 없고 후방도 없는 게릴라전이 펼쳐지는 곳에서 감히 외출이나 개인행동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가 죽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끔 월남전을 다룬 소설을 보면 사병들이 외출을 자유롭게 즐기고 월남 아가씨들과의 로맨스가 등장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소수의 특수한 보직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참전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군과 달리 우리는 소규모의 방어적인 전투를 주로 벌였기 때문에 미군처럼 대규모로 포로가 발생할 소지는 없었다는 설명을 들었다"면서 "미군 실종자 수와 우리 실종자 수의 지나친 차이를 거론하는 것은 월남전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미군에 비해서 한국군은 완벽하게 통제된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미군의 철수로 전황이 급격하게 변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베트콩이 아닌 월남 정규군의 남침으로 극소수 피해를 당한 일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한국군의 중대 단위 전술기지는 베트콩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박격포 공격을 당하는 경우는 하늘에서 번개 맞을 확률일 정도로 안전했다.

모든 전쟁에서와 같이 월남전에서도 처음에는 무공훈장은 적 사살자의 수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랬더니 베트콩으로 확인되지 않은 양민의 희생이 늘어났다. 이러한 부작용이 심해지자 훈장 수여 기준에 무기의 노획 수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수품을 팔아 그 돈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소총 등 각종무기를 구입해서 노획무기라고 전투상황을 꾸며 보고하는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났다.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공명심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쟁이 가져온 허위전과보고는 사령부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골치가 아픈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군이 전사했을 경우이다. 전공에 따른 훈장이야 한국 정부가 주는 것이지만 한국군이 전사하면 보상을 미국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돈으로 싸우는 기묘한 전쟁에서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2년 4월에 벌어진 악명 높은 안캐패스 전투는 과거와 달리 월맹 정규군과의 전투였기 때문에 포격을 당해 아군의 피해가 심했다. 이전의 전투처럼 총알이나 적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전사를 해도 비교적 신체가 온전히 보존된 채가 아니라 온 몸이 조각이 나서 전사하는 경우도 생긴 것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전사자 숫자를 부풀릴 우려가 있다가 보고 훼손되지 않은 시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지옥 같은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조립하기 위해서 이미 날라 가버린 팔 다리, 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월남군의 시신을 야전삽으로 찍어서 숫자를 맞추는 '곱배기' 지옥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1970년 주 월남미군사령부가 돌연 군표개혁, 즉 군대 내에서 쓰이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문제는 실제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군표가 미군이 한국군에게 할당한 군표의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업과 기술자들이 보유한 군표액수도 엄청났고 또한 미 군표를 이용해 미국 본토 달러와 교환하는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되었으니 그 액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과 협상해 군은 물론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군표까지도 전액을 교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주월사령부 부사령관이 협상대표로 나서서 앞으로 한국군은 미 군표를 사용할 때 주 월남한국군이 발행하는 쿠폰을 같이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인이 보유한 막대한 미 군표를 전액 교환해 휴지조각이 될 뻔한 한국인의 돈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주 월남미군사령부로부터 퀴논 지역에서 담배가 가득히 적재된 미군 PX 대형 컨테이너 1대가 실종되었는데 이 컨테이너가 한국군 부대의 영내로 들어갔으니 조사해 달라는 요청이 정식으로 들어왔다. 우리 사령부에서 현지부대에 나가 조사했을 때는 이미 컨테이너 자체를 통째로 땅에 파묻어버린 후였다. 이 사건은 고급 지휘관까지 인지된 사건이었기에 사령부의 입장에서는 문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군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통보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72년 여름의 어느 날, 주 월남미군 항만사령부는 귀국 박스를 실고 퀴논 항을 출항해 항해하던 수송선을 돌연 귀항 시켰다. 수송화물의 적재 착오로 재점검을 실시하기 위해서라는 핑계였다. 그리고 한국군의 귀국 박스를 다시 하역하면서 기중기로 박스를 들어 옮기다가 실수인 것처럼 3개를 떨어트렸다. 그 박스에 담긴 물건들을 쏟아졌는데 그 안에는 탄피들이 가득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미군 측은 한국군이 주 월남한국군에게 지급한 미군의 최신무기와 장비를 귀국박스 속에 담아서 한국으로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미군은 한국군을 어떻게 평가했나

스탠리 로버트, 제임스 라우톤 콜린스 공저의 <베트남 참전 동맹국(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여러 동맹국의 참전배경 및 주요 전투성과를 설명했다.

참전 초반에는 한국군 지휘부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준비하는 모습에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이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고 사상자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오해했다. 하지만 1966년 1월 '플라잉 타이거' 작전에서 11명의 한국군이 192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전과를 보자 그 오해는 단숨에 뒤집어졌다.

그러나 초반의 이런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파병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평가는 점차적으로 나빠졌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제1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콜린 중장은 "한국군은 헬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한 번의 작전 종결 후 다음 작전까지 너무 소극적이다", "한국군 2개 사단의 성과는 미군 1개 여단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했다. 또 콜린은 "이전과 달리 한국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자 오히려 소극적이 되었으며 덜 주는 쪽이 오히려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콜린의 후임인 브라운 중장 역시 "한국군은 융통성과 창의성이 없으며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만 치중하고 있다"고 했다. 또, 한국군은 자기 책임구역이나 베트콩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냈고 안전을 확보했지만 남베트남군과의 협력이나 지역 주민과의 관계에서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필요로 할 때에는 매우 효율적인 군대라고 높이 추어올리다 한국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한국군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태그:#월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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