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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1905년 고종 황제(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을 끝내 재가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는 이 늑약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고, 국제사회에 호소해 이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고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밀사를 파견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예심판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이위종 3인이었다.

 

이들 세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조선 정부(대한제국)가 믿었던 러시아마저도 일본 측에 고종 황제의 밀사 파견을 밀고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에게 전문을 보내 밀사들의 참가신청을 거절케 했다. 국제관계는 그제나 이제나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냉혹한 힘의 논리와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그때그때 적과 동지 관계로 흘러갔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른 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케 했다. 이 한일신협약은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조인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까지 확실하게 장악한 뒤, 곧이어 조선의 군대까지 해산 시켰다.

 

의병 연합전선

 

일제 강압에 따른 고종 황제 퇴위, '한일신협약' 체결, 군대 해산 등은 조선 백성들의 성난 민심에 불을 붙였다. 을미사변 이후 그동안 줄기차게 이어져 온 의병투쟁은 마침내 대폭발해 의병전쟁으로 치달았다. 이전부터 의병투쟁에 나섰던 농민들과 유생에, 군대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새로 참여해 의병의 전투력은 대폭 강화됐다. 여기에 '총포 및 화약단속법'의 제정으로 생업을 잃은 포수들과, 금광이나 철도건설 공사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집단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해 기존 의병부대는 천군만마의 원병을 얻었다.

 

허위는 1907년 9월, 연천, 적성, 양주, 개성, 삭녕, 안협, 토산, 이천(伊川) 등 경기 북부와 황해 남부, 그리고 강원 동북부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폭넓게 펼쳤다. 허위는 이 일대를 누비면서 새로운 의병을 모집해 전력을 강화하는 한편, 이들 지역 의병대를 통솔하여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며, 또 한편으로는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허위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 지역을 활동무대로 특별히 선택한 것은 서울과 근접한 곳이기에 군사와 정치면에서 일제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고, 서울에는 각국 영사관이 많아 대외적으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허위는 다수의 해산군인들을 받아들이거나 이들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펼치며 전력을 극대화 시켰다. 강화 진위대 소속으로 동료들과 봉기한 연기우(延基羽) 해산의병부대,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규식(金奎植) 의병부대 등을 포섭한 것은 장차 전국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결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밖에도 허위의 의병부대는 여주, 이천(利川), 양평, 양주, 포천 등 경기도 일대와 원주 등 강원도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이인영(李麟榮)과 이은찬(李殷贊)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의대조(衣帶詔)

 

허위는 의병투쟁과 함께 양면작전으로 정치외교활동도 펼쳤다. 1907년 10월 하순에는 전국의 백성들과 각국 영사관에 격문이나 선언문 등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열성적인 활동으로 허위는 경기도 의병의 총수로 부상했다.

 

1909년 11월 하순, 허위와 연계된 각 지역 대표 의병장은 평안도·황해도 지방의 박기섭(朴箕燮), 장단 지역의 김수민(金秀敏), 철원의 김규식, 지평과 가평 일대의 이인영, 충청도 제천의 이강년(李康年), 원주의 민긍호(閔肯鎬)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허위, 이인영 두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공에 앞서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어 의병 항일전의 합법성을 국내외에 공포하였다. 허위는 이 선언문에서 의병전쟁은 고종 황제의 칙령 따른 조선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당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근거는 허위는 이미(1907.4.) 고종황제로부터 의대조(衣帶詔 ; 임금이나 황제가 옷에다 써서 내린 명령)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의대조에는 '거의(擧義)'두 글자만 쓰여 있었다.

 

또 13도 창의총대장 이인영은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보냈다. 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밝히고 있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 일본인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과 야만적인 그들 군대를 격멸하는 데 힘을 모야야 할 것입니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부분은 안동대학교박물관 발행 <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 금오공과대학 선주문화연구소 발행 <왕산 허위의 사상과 구국의병항쟁> 등을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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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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