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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난 사건은 자연스럽게 잊고, 새로운 생각들로 다시 채워진다. 국민 모두 투사가 되거나 선구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쌍용자동차 부당해고에 맞선 첨탑시위, 용산 재개발 반대 농성 참사, 본디 모습을 잃어가는 강정마을.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먼저 지워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무관심해진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도 마찬가지다.

10월 28일, 늦은 오후.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의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의 시점은 밀양 투쟁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에서 자연스럽게 삶의 문제로서 송전탑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눈물과 절망으로 때로는 악으로, 거대한 상대와 투쟁하는 밀양의 주민들을 보고 있자면 기억 속에서 잊힌 참혹했던 순간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렇다. 밀양의 비극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은 다섯 편의 작품을 모아 구성한 옴니버스 형식이다. 하샛별 감독이 연출한 <좋은데이>는 영화의 도입부로 쌍용차 해고자와 한전직원 후배의 술자리 이야기를 다큐 기법이 아닌 극영화로 담아낸 것이 특이하다.

오가는 술잔 속에 밀양 송전탑 싸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자리에 누구도 진짜 밀양은 알지 못한다. 술기운은 오르고 이야기는 계속 허공을 맴돈다. 감독은 '많은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아래 사는 밀양 주민들은 위험하다'라는 가장 중요하고도 명백한 화두를 던진다. 

전류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할매들은 알고 계셔>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단 15분이라도 공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밀양의 할매들은 그들의 길목을 지킨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단 15분이라도 공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밀양의 할매들은 그들의 길목을 지킨다
ⓒ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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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지 감독이 연출한 <할매들은 알고 계셔>는 매일 3시만 되면 공사장 길목에서 15분간, 공사를 지연시키기 위해 경찰, 한전 직원들과 싸우는 할매들의 이야기다. 할매들은 송전탑 싸움을 시작하면서 일상을 침해당했고, 긴 싸움은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할매들 본인도, 경찰과 한전 직원도, 심지어 관객들조차 할매들이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과가 분명하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할매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다.

의지는 강철 같지만 육체적으로 힘이 없는 할매들을 대하는 경찰들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못해 친절하다. 할매들을 막아서는 나이 어린 경찰들도 할머니가 있는 누군가의 손자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송전탑이 조금씩 올라가면서부터) 경찰들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슴 아린 비극의 반복, 전쟁보다 더 잔혹한 놈들 <말해>

허철녕 감독의 <말해>는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의 김말해 할머니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담는다. 비극적이고 가슴 아린 어제와 오늘은 무서우리만치 닮아있다. 오히려 더욱 잔혹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밀양을 지배하고 있다.

할머니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그 뼈를 모아 화장을 시킨 뒤, 가족들에게 확인하라 강요했던 '보도연맹'의 악행을 전한다. 그 속에는 그녀의 남편도 있었다. 보도연맹과 서북청년단의 부활을 운운하는 지금이 과거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하루하루, 그녀가 발 딛고 싸울 수 있는 것은 밀양과 맺어온 오래되고 명확한 기억의 힘이다. 가난과 핍박에 시달렸던 오래전, 가족들을 데리고 물에 빠져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겐 반드시 살아야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차디찬 강물에 빠져 죽고 싶어도 경찰들은 팔을 세차게 낚아채며 죽지 말란다. 그녀에겐 죽어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경찰들에겐 살려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 김말해 할매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데, 가해자만 보도연맹에서 경찰과 한전, 그 뒤에 숨어있는 정부로 바뀌었다.

목에 쇠사슬 거는 방법을 고민하는 그녀들 <나의 그녀>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천막은 사라지고 거대한 송전탑이 들어섰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천막은 사라지고 거대한 송전탑이 들어섰다.
ⓒ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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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번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인 밀양 용회마을 뒷산 천막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을 준비하는 옥희씨가 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수확한 가지를 박스에 담고 찌개를 만들다가도, 쇠사슬을 목에 어떻게 걸어야 경찰들이 끊지 못할까를 처절하게 고민한다. 이 여성들이 쇠사슬을 매달 때까지는 오랜 투쟁의 시간이 있었고, 그 배경에는 어느 날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승인된 송전탑 건설이 있다.

합의를 한 주민과 투쟁하는 주민으로 마을은 갈라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형님, 동생 했던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며 말다툼을 벌인다. 그리고 뒷산 천막에도 어김없이 새파랗게 어린 용역들과 한전 직원들이 올라와 잔혹하고 무참하게 밀어 붙인다. 일말의 자비나 동정 따위는 없었다.

옥희씨가 쓰러지고 사람들은 죽어나가는데, 한전 직원들은 여느 작업장에 온 것처럼 가지런하게 하얀 안전모를 눌러썼더라.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서늘한 장면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분명 상상 속의 영화는 아니었으니. 

끝나지 않은 '비극'을 우리 모두 '희망'으로

끝나지 않은 ‘비극’을 우리 모두 ‘희망’으로
 끝나지 않은 ‘비극’을 우리 모두 ‘희망’으로
ⓒ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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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한국전력이 '대한민국 친환경대상'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음독 자결한 고 유한숙씨의 장례를 치르기 하루 전날이었다.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이 끝나고 관객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박수 소리가 들렸다.

감독들은 밀양의 고정되지 않는 시간과 의지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다양한 결로 각기 다른 마을에서 존재한다며, 이들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영화는 특색 있는 개별 에피소드들이 흩어지지 않고, 일관성 있게 진행된다.

<나의 그녀>를 연출한 넝쿨 감독에게 질문했다.

- 자식을 위해 합의 도장을 찍은 다른 할머니들과 지시를 받는 입장인 어린 경찰들은 투쟁의 한 가운데 선 주인공들과 다른 쪽에 가까운 건지, 틀린 쪽에 가까운 건지 궁금하다."
"그들이 다르다 틀리다 구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문현답이다.

경찰과 한전, 그리고 정부는 달라져야 한다. 또한 그전에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여전히 아픈 밀양의 현재진행형 비극을 희망으로 바꾸는 그날까지 투쟁은 계속된다. 기억의 한계치가 있다 하더라도 송전탑의 공포와 치열하게 싸우고 진실을 위해 노력하는 밀양 할매들과 모두를 잊지 말자. 평생 동안.

덧붙이는 글 | 인터넷 사이트 <소셜 펀치>에서 영화를 후원하고, 공동체 상영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서점에는 밀양구술프로젝트의 도서<밀양을 살다>를 절찬리 판매중입니다.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hstyle84)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 #밀양 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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