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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9일)도 하루를 눈물로 시작한다. 벌써 이틀째. 그제는 늦은 시각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화장실 바닥에서 통곡했고, 어제는 하루 종일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난 시간을 반추했다. 꽤 오래 전 열심히 들었던 그 노래들을 곱씹으며.

내 나이 서른 하고도 일곱. 이젠 눈물을 보이면 시쳇말로 쪽팔릴 수 있는 나이에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바로 신해철이 죽었기 때문이다. 대체 신해철이 내게 뭐냐고? 아내의 페이스북 글은 내게 설명의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신해철은 나를 아이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청년으로 만들어준 이다.

아이를 소년으로 만들어준 신해철

사춘기의 교과서
▲ The Return of N.EX.T 사춘기의 교과서
ⓒ 오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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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해철의 노래를 죽어라 들었던 1990년대 초중반. 돌이켜 보면 그때는 대한민국의 전성기였다. 1997년 IMF가 오기 전, 사람들은 군부독재의 막바지에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자유들을 누리고 있었고, 두터워지는 중산층을 바라보며 누구나 노력하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바로 그 시절 난 중고등학생이었는데 언론들은 그런 우리들을 가리켜 소위 'X세대'라고 칭했다. 1980년대 대학생들처럼 군사정부와 거리에서 싸우지 않아도 되었고, 중고등학생들이 용돈을 모아 기꺼이 가수들의 음반을 구매하며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던, 그리고 그만큼 할 일도 많고 꿈도 많았던 세대. 혹자들은 그래서 치열하지 못한 우리 세대들의 정치의식을 폄훼하기도 하지만 그건 편견일 뿐이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는 바로 신해철, N.EX.T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내게 신해철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인생의 참된 선배이자 형이었다. 그는 노래를 통해 교과서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세상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고, 우리가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처음으로 '존재'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죽음'이 우리 삶의 일부임을 담담하게 이야기했으며, '절망'과 '희망'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가르쳐 주었다.

점점 천박해져 가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감히 '돈'을 조롱하고 그것 이상의 가치를 자신 있게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신해철은 아직 감수성이 풍부한 우리에게 '사랑'이 결코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되며, 끝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 하라고 일갈했다. 물론 그것들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절대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토닥이기도 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신해철은 우리에게 기존 사회의 통념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와 <아버지와 나 part 1> 등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주의가 모든 이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 노래인데, 난 이를 통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으며,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소수자라는 관념 자체가 사회적 편견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학생이나 되어야 텍스트로 배울 수 있는 사실들을 중고등학교 때 노래를 통해 감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2병 신해철?

신해철은 1988년 MBC 대학가요에서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 1988년 MBC 대학가요제 신해철은 1988년 MBC 대학가요에서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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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 나의 감수성을 지배했던 N.EX.T의 신해철. 그러나 1997년 대학 입학 후 나는 그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열심히 술을 먹고 다니면서부터 대중가요는 물론, 라디오와 멀어지게 되었고(나의 마지막 라디오 프로그램은 무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다!), 신해철 역시 N.EX.T를 해체하고 영국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후 그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는 소리에 그룹 이름만으로 신해철의 치기어림에 빙긋이 웃고, 그의 노래 <일상으로의 초대>를 듣고는 나의 프러포즈 곡으로 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지만(실제로 프러포즈용으로 썼지만, 아직까지 아내는 그게 프러포즈였는지도 모른다) 그뿐이었다. 할 일 많은 대학생에게 신해철의 노래는 사춘기 때 들었던 뜨거운 열정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끔 그가 '고스트'로 시작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면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더 나아가서는 '마왕'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들었지만 우스울 뿐이었다. 내가 아는 신해철은 그런 맹목적인 추종을 거부하는 이였으며, 절대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였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에게 붙여지는 '마왕'이란 명칭을 관조하며 재미있어할 그가 그려질 뿐이었다. 그가 '마왕'이 되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며 또 노래를 만들게 되겠지.

그러던 신해철을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2002년 그가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나서부터였다. 무엇보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신해철이 나와 비슷한 이유로 내가 선호하는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도 기꺼웠지만, 더욱 감동스러운 것은 그가 10년 전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삶의 태도를 지킨다는 것 자체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모습.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모습. 그래, 그래야 신해철이지. 나의 사춘기 때의 열병이 결코 틀리지 않았던 게야.

그 뒤 신해철은 이 사회의 논객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세상을 가르쳐 주었던 중고등학교 때의 감성으로 자신이 믿는, 옳은 말만 했다.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에서 40년이나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바른 말만 했다. 비록 주름이 늘고 배는 나왔을지언정 그 정신만은 내가 사춘기 때 알고 있던 신해철 그대로였다.

혹자는 그런 그가 철이 없다며, 가수가 뭘 아느냐고, 소위 '중2병' 아니냐고 비아냥 거렸지만 그것은 일그러진 사회가 내던지는 자학일 뿐이었다. 결국 우리가 만들려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란 중학교 2학년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회 아니던가. 어른이 되어 갖은 풍파를 겪은 뒤 교과서에서 배운 답들을 한낱 쓰레기로 취급하는 이 사회에서 신해철같이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을 위해 싸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그는 절망을 말하되 희망은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신해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같이 배 나오고 늙어가는 처지이지만, 어쨌든 신해철은 여전히 나의 사춘기 감수성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 존재 자체로 증명해가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어찌 주저앉을 수 있겠는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연봉을 포기하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사회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20년 전부터 내가 꿈꾸던 삶 아니던가.

잘 가시오, 내 젊음이여!

지난 28일 오전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고 신해철의 빈소가 마련됐다.
▲ 고 신해철, '내 마음 깊은 곳의 너' 지난 28일 오전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고 신해철의 빈소가 마련됐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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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신해철이 갑자기 죽었다. 요 며칠 전만해도 TV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변한 모습에 전혀 굴하지 않고 변하지 않은 자신의 철학과 삶을 이야기 하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오래 오래 살면서 우리 학창시절의 치기어림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며, 그렇게 세상을 함께 바꿔나가야 할 신해철이 갑작스레 사라진 것이다.

그의 죽음. 그것은 곧 우리 젊음의 죽음이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세상을 고민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던 사춘기가,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치열함을 꾀했던 20대 청춘이 그의 죽음과 함께 스러져간다. 그와 함께라면 현실의 남루함조차 훈장인양 으스댈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동안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먼저 가 버렸다.

다시 스마트폰을 뒤적여 신해철의 노래를 들어본다. 그리고 문득 나의 아이들을 쳐다본다. 과연 녀석들은 내가 신해철의 노래를 들었던 나이 때, 어떤 노래를 만나 세상과 조응하고 세상을 고민하게 될까? 지금 같아서는 대자본이 만들어낸 획일적인 노래만이 횡행할 것 같아 불안하지만, 굴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내가 신해철이란 사람에게 빚지며 배운 교훈이겠지.

끝으로 그의 죽음 때문에 함께 우느라 정신없는 친구가, 그를 기억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적는다. 잘 가시오. 내 청춘의 영웅이여!

"이렇게 나를 만든 무언가가 예고 없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챕터가 처참하게 찢겨져 나간다는 게 이렇게 슬픈지 몰랐다. 동시대를 산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태그:#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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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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