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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은 <네이처>에 'FOX P2'로 명명된 유전자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그 전에 이 대학 연구팀은 수년간 'KE'라는 이니셜로 명명된 영국의 한 가문을 관찰했다. KE 가문의 3세대를 분석한 결과, 모두 31명의 대상자 중 절반 정도인 15명이 심각한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말소리를 구별하고 문장을 이해하며 문법성을 판단하는 데 온전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문제의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돌연변이 상태의 'FOX P2'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FOX P2 유전자가 그러한 언어 장애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언어 구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로 FOX P2를 지목한 것이다. 이 뉴스는 이후 2000년대 초반 내내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FOX P2를 언어 유전자로 믿게 되었다.

진화론의 딱딱한 이론들, 읽는 재미가 쏠쏠

 <다윈의 식탁> 책표지
 <다윈의 식탁> 책표지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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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장대익 서울대 교수가 쓴 <다윈의 식탁>은 현대 진화론의 주요 쟁점을 다루고 있다. 적응, 협동, 발생, 진보, 종교 등 책의 세부 각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대 진화론의 쟁점이 포괄하는 범위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두루 아우른다.

이 책은 구성이 독특하다. 진화론의 쟁점에 대해 서로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두 진영이 논쟁하는 방식을 설정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전설적인 진화학자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에서 만난 세계적인 진화학자들이 영국 BBC의 특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형식을 빌려 7일간 팀별 토론을 벌인다.

논전을 벌이는 두 팀의 좌장은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 하버드대 교수와 동물행동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다. 도킨스 교수는 35살에 쓴 <이기적 유전자>로 지난 30년간 현대 진화론의 주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인물이다.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는 굴드 교수는 주류 진화론의 빈틈을 날카롭게 꼬집는 비주류의 선봉장이자 가장 대중적인 과학자 중 한 명이다.

그래서일까. 책에 등장하는 진화론의 딱딱한 이론들이 그저 어렵지만은 않다. 오히려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독자들은 인신공격에 가까운 설전을 주고받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싶어진다. 어느 한 쪽 편으로 기울 수밖에 없게 되는 토론의 묘미(?)를 떠올려 보라. 어려운 개념과 용어들을 지레 꼼꼼하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또 있다. 6일간 이어지는(마지막 날은 굴드와 도킨스가 종교에 관한 공개 강연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본격적인 토론에 모두 24명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한다.

놈 촘스키와 스티븐 핑커, 에드워드 윌슨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각 과학 분야의 '영웅'들이 불꽃 튀는 설전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빈틈없는 논리와 날카로운 문제 의식은 과학적 사고의 정수를 보여 준다. 상대편으로부터 날카롭게 공박을 당하는 장면에서는 묘한 스릴감마저 느껴진다.

다윈은 '진화'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윈의 진화론에 얽힌 숨은 이야기나 6일간의 토론에서 다루어지는 진화론의 주요 쟁점들도 흥미롭다. 몇 가지 살펴보자.

이 책에 따르면 '진화'라는 말은 다윈이 애초 쓰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다윈의 저작에서 '진화'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개정 6판에서부터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진화' 개념에 해당하는 다윈의 최초 표현은 '변화를 동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었다. 다윈에게 진화의 진정한 의미는 '생물 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선택의 힘을 빌려 변화하는 것'이었다.

다윈은 애초 사람들이 진화를 단순한 진보로 오해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그 말을 쓰기를 극구 꺼려했다고 한다. 그는 진화론이 사상적으로 매우 급진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다. 진보에 대해 끝까지 많은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당시 인기 있던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가 다윈의 진화론을 '진화'와 '적자생존' 중심으로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다. 다윈은 결국 6판에 이르러 진화라는 말을 쓰게 된다.

남성의 강간을 진화론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눈길을 끈다. 강간 이슈는 다윈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자연선택'과 그것의 산물인 '적응'을 다루면서 등장한다. 도킨스 진영에서는 행동생태학자 랜디 손힐이 <강간의 자연사>에서 주장한 내용을 따라 강간을 오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직접적으로 자연선택된 성적인 행동으로 본다. 진화에 따른 적응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의구심이 들지 않는가. 강간이 진화에 따른 자연선택의 결과라면 강간을 비난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강간범이 자신의 행위가 진화의 결과였다고 항변하면 논리적으로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도킨스 진영이 강조하는 적응으로서의 강간론에 굴드 진영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핵심도 이런 의문에 있다.

손힐에 따르면 강간은 짝짓기에 어려움을 겪은 남성이 자연선택한 적응 행동 중 하나다. 강간 피해자가 대부분 가임기의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주요 근거다. 짝짓기의 기회를 잡을 수 없는 남성들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생식 성공도를 높이려 한 결과물이 강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굴드 진영에서 보기에 강간은 폭력이자 학습된 행동일 뿐이다. 임신이 안 되는 아동 피해자가 전체 강간 피해자의 30%나 된다는 사실도 적응으로서의 강간론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극단적으로 보이는 두 진영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의 중립적인 진술을 보자.

많은 사람이 비만을 택하지 않듯, 대다수의 남성들도 강간을 택하지 않는다. 만일 강간 피의자가 본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강간을 너무 손쉽게 '택했다'고 정죄할 수 있다.

요는 이것이다. 어떤 능력이나 행동의 적응성 여부는 옳고 그름의 여부와 별개라는 것. 같은 적응이라도 고도의 언어 능력은 좋지만 강간은 나쁜 행위이다. 자연은 윤리적 기준을 갖고 선택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일부 페미니스트의 주장처럼 여성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남성 편도 아니다.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 (94쪽)

진화론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에 웬 종교?

글머리에 소개한 'FOX P2'를 보자. FOX P2 유전자는 언어의 기원과 본질적을 밝히는 첨단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진화론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굴드 진영의 한 명으로 나온 세계적인 언어학자 촘스키는 언어를 단지 두뇌 활동의 부산물로 본다. 두뇌가 커지고 일반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나온 부산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도킨스 진영을 대표하는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언어를 진화에 따른 적응의 하나로 본다. 그는 언어만을 위한 특별 장치가 두뇌 속에 있는 게 아니냐는 전제를 내건다. 구체적인 근거로, 언어 능력은 멀쩡하지만 논리 추론이나 시공간 지각 능력 등 일반적인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윌리엄스 증후군', 언어 문법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일반 지능에는 문제가 없는 '특수 언어 장애' 등이 제시된다. 이런 예들을 통해 보면 FOX P2 유전자는 분명 핑커의 언어 모듈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물이 될 수 있다.

굴드 진영과 도킨스 진영의 대립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저자에 따르면 굴드 진영은 과학이 사회적 이념에 오염될 수 있는 가능성에 상대적으로 더 주의를 기울인다. 반면 도킨스 진영은 과학 자체의 신빙성에 대해 강한 신뢰를 보낸다. 과학 외적인 맥락을 배제한 채 순수하게 과학적인 접근을 지향하는 것이다. 굴드와 도킨스에게 각각 '사회구성주의'와 '과학주의'라는 세칭이 따라붙는 까닭이다.

논쟁의 마지막 날은 굴드와 도킨스의 공개 강연으로 이루어진다. 주제는 종교다. 고백하건대 나는 불가지론자와 유신론자 사이 이쪽저쪽을 오가는 '나이롱' 개신교도다. 그래서 무신론자임에 분명해 보이는 도킨스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유전자와 환경의 산물임에 분명해 보이는 인간을 유전자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쯤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창안한 독특한 개념인 '밈'(meme, 문화유전자)을 빌려 종교를 '기생 밈'이자 '정신 바이러스'로 비판하는 대목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악행을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보았고, 지금도 생생하게 보고 있는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의 다음과 같은 말도 각별하게 다가온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악한 사람은 악한 짓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한 짓을 할 때에는 꼭 종교가 개입된다" (263쪽)

현대 진화론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에 웬 종교일까. 종교는 진화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실험 도구'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진화론은 단순한 과학 이론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고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데 귀한 고갱이가 될 수 있다. 이 책이 그 생생한 증거물이다.

덧붙이는 글 | <다윈의 식탁>(장대익 지음 / 바다출판사 / 2014. 10. 10 / 407쪽 / 14,8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다윈의 식탁 - 논쟁으로 맛보는 현대 진화론의 진수

장대익 지음, 바다출판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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