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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사람들 틈에 끼어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인도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차, 홍차에 우유를 섞은 짜이를 마셨다. 어제 저녁은 사람들에 떠밀리다시피 식당을 오고 갔기에 식사를 마치고 짜이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짜이 컵은 거의 대접 수준이다. 우리의 시골 할머니들이 대접으로 내주는 커피처럼 달달한 짜이 역시 무료였다.

시크교인의 넉넉한 인심

사원 관리소에 맡겼던 신발을 찾아 신고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황금 사원을 빠져나왔다. 사원 입구에는 어제 미처 보지 못했던 시내버스 주차장이 있었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자마자 줄지어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기차역을 오가는 시크교 전용 버스인데, 이 또한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시크교 사람들은 황금사원을 찾는 이들에게 구경하고, 먹고, 마시고, 잠자는 숙소에서 버스 운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황금사원에 딸린 부속건물에서 유일하게 돈이 오가는 곳이 있다. 음료수 가게다. 시내버스가 왕래하는 주차장 주변에 탄산 음료수를 판매하는 작은 상점이 있는데 이 또한 시중보다 1/3 정도 싼 가격으로 내놓고 있다고 한다. 가격이 싼 만큼 사람들에게 내놓는 음료수가 늘 부족한 모양이다. 음료수를 사기 위해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암리차르에서는 전통복장을 요란하게 차려입고 창을 들고 있거나 칼을 차고 다니는 시크교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암리차르에서는 전통복장을 요란하게 차려입고 창을 들고 있거나 칼을 차고 다니는 시크교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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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하게 수많은 사람이 서로 몸을 부대껴 가며 음료수를 사 먹고 있었지만 그 표정들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황금사원 주변 전체가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버스 주차장 주변에는 경찰과 사복을 입은 몇몇 사람들이 기관총을 들고 서 있다.

사원 안에서 위장대의 위병처럼 창을 들고 오락가락하는 시크교인들이 어쩌다 보였지만 어떤 위압감도 없었다. 하지만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은 달랐다. 그렇다고 황금사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삼엄한 눈빛으로 검문검색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경비병들이 시크교인들을 보호하는 것인지, 분리 독립을 외치는 시크교인들을 감시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함부로 사진기를 들이댈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황금사원 주변에서 시크교인들이 운영하는 음료수 상점에서는 시중 가격보다 1/3 정도 싼 음료수를 팔고 있다.
 황금사원 주변에서 시크교인들이 운영하는 음료수 상점에서는 시중 가격보다 1/3 정도 싼 음료수를 팔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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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가 그러하듯 현재의 평화 속에는 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기관총을 든 경비병들을 보면서 1984년 황금사원에서 있었던 '황금사원 학살 사건'을 떠올렸다.

학살의 아픔 딛고 일어선 시크교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크교도들은 인도의 경제계와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이 힘을 바탕으로 인도 대연방 내의 자치를 추구하게 됐다. 급진적인 시크교도들은 펀자브에 독립적인 시크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크교의 과격파와 인도 정부 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84년 6월 인도를 비롯한 유럽, 북미, 홍콩 등 전 세계에서 모인 1만여 명의(인도 경찰 추산 4천여 명) 시크교도들은 펀자브 주의 독립을 외치며 황금사원을 점거했다. 이에 인도의 총리 인디라 간디는 탱크까지 앞세워 무자비한 진압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크교도들이 사망했다. 인도 정부에서는 4백여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시크교도들은 순례자들을 포함해 수천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 해 10월 인디라 간디 총리는 자신을 경호하던 시크교도들에게 암살됐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암살되자 인도의 수도 뉴델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시크교도들과 힌두교도의 충돌이 일어나 수천 명이 숨졌다. 1984년 황금사원 학살 사건 당시 영국군이(마거릿 대처 총리 정부 시절) 개입했다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됐는데 그 사실은 최근에야 밝혀졌다.

지난 2월 4일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은 의회에서 당시 인도 정부의 진압 작전에 SAS(영국 특수부대) 요원의 조언이 있긴 했지만, 영향이 제한적이었다는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헤이그 장관은 "3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고된 당시 진압 작전은 끔찍한 비극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인도 정부로부터 시크교도를 진압하는 데 지원을 요청받았으며, 이에 영국군을 파견했다.

크나큰 수난을 겪어 오면서도 인도에서 근면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는 시크교 사람들. 2004년에는 힌두교 신자가 80% 이상인(시크교 신자는 인도 전체 인구의 2% 정도에 불과하다) 인도에서 첫 시크교도 총리인 만모한 싱을 배출하기도 했다.

황금사원 주변에서 시크교인들의 장식물인 칼을 파는 상점을 쉽게 만날수 있다
 황금사원 주변에서 시크교인들의 장식물인 칼을 파는 상점을 쉽게 만날수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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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10년에 걸쳐 두 차례 인도 총리를 역임한 만모한 싱은 재임 동안 힌두와 시크의 갈등은 물론이고, 여타의 종교 간 균형을 잘 맞췄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살아온 여정이 가장 깨끗한 지도자이자 재임 동안 국경을 맞대고 영토 분쟁을 벌이던 중국, 파키스탄과 큰 마찰 없이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

인도에서 잘 사는 지역으로 손꼽고 있는 펀자브 주 암리차르. 시크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암리차르 거리는 인도의 다른 도시에 비해 깨끗한 편이었다. 암리차르에서는 칼을 차고 다니는 시크교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히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 주변에서는 시크교인들이 착용하고 다니는 칼을 비롯한 다양한 장신구들을 파는 상점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시크교의 전통이다. 세례받은 시크교도들의 남자는 사자를 뜻하는 '싱'(Singh), 여자는 공주를 뜻하는 '카우어'(Kaur)라는 성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칼을 뜻하는 끼르판(Kirpan. 단도 혹은 검)을 포함해 다섯 가지 K, 즉 께시(kesh, 깎지 않은 머리카락), 카다(kada, 쇠 팔찌), 강가(kangha, 나무 빗), 가차(kaccha, 무릎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느슨한 속옷)를 몸에 지니고 다닐 것을 장려한다.

상점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길을 둘러보고, 외국인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인도의 공원은 어떤 모습일까' 싶어 무작정 공원을 찾아 들어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황금사원으로 쏠려 있어서 그런지 공원은 한적했다.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다만 인도 아이들 몇몇이 눈에 띄었다. 녀석들은 내가 어깨에 메고 다니는 천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자 '나마스테'를 연발하며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칼을 비롯한 시크교인들의 다섯가지 상징물을 판매하고 있는 상점들이 즐비한 암리차르 상점 골목.
 칼을 비롯한 시크교인들의 다섯가지 상징물을 판매하고 있는 상점들이 즐비한 암리차르 상점 골목.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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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너희들 사진 찍어도 좋냐?"
"오케이!"

녀석들은 앞다퉈 카메라 앞에 몰려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한국의 개구쟁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아이들과 어울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인도에 왜 왔냐'등의 기초 영어 회화반 동기생처럼 짧은 영어를 주고 받으며 놀았던 공원은 인도 사람들에게 아주 특별한 역사의 현장 주변이었다. 평화롭기만 이 공원 근처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 암리차르 학살 사건 벌어진 무대이기도

조선인들이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1919년 3월.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4월 13일. 일제가 만세운동을 벌였던 조선인들을 학살했듯이 영국군은 1만 명 넘게 모인 인도 사람들의(대부분 시크교도) 집회 현장을 향해 총탄을 퍼부어댔다.

영화 <간디>에서도 당시 그 충격적인 학살 장면을 그려내고 있다. 영국군은 집회에 모인 군중이 빠져나갈 출구를 모두 막았다. 광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다. 출동한 군대가 장착하고 있던 총탄 1650발이 10여 분 만에 모두 소진된 뒤에야 비로소 광란의 총성이 멈췄다고 한다.

이 사건을 조사한 영국 정부는 379명이 숨지고 1200여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지만, 인도 측은 사망자만 1천 명 가까이 된다고 발표했다. 총 맞아 죽은 사람보다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피할 곳이 없어 우물로 뛰어든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는데 우물에서만 120여 구의 시신이 나왔다고 한다. 전체 사망자 가운데는 어린이 41명, 태어난 지 6주밖에 안 된 영아도 있었다고 한다.

공원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
 공원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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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차르 학살사건'으로 불리는 이 학살 사건은 인도의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이 사건으로 영국으로부터 받은 기사 작위를 항거의 뜻으로 곧바로 반납했다. 이전까지 영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마하트마 간디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의 완전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우연히 찾아간 곳이 '암리차르 학살지'라는 것을 암리차르를 떠난 후에 알게 되어 그 현장을 세세히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암리차르 학살에 관련된 자료를 찾던 중 놀라운 사건을 접하게 됐다.

1940년 런던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상케 하는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암리차르에서 학살이 벌어졌던 1919년 당시 펀자브 대리 총독이었던 오드와이어가 런던에서 인도 독립운동가 우담 싱에게 사살 당했다. 우담 싱은 1919년 당시 학살 현장에서 총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런던 저격 사건이 있었던 그해 교수형에 처한 우담 싱은 재판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그를 죽인 것은 그에게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학살의 진짜 원흉입니다. 그가 우리 사람들의 정신을 짓밟으려 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짓밟은 것입니다. 복수를 위해 21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해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나는 내 조국을 위해 죽습니다. 조국을 위한 죽음보다 더 큰 어떤 명예를 내가 바라겠습니까?"
- <프레시안> '암리차르 학살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기억한다' 2014. 07. 02 김기협 편집위원 기사 인용

1919년 암리차르 학살 명령의 몸통으로 알려진 당시 펀자브 대리 총독 오드와이어를 암살한 우담 싱, 그리고 1984년 황금사원 학살을 명령한 인디라 간디 총리를 암살했던 경호원들은 모두 시크교인이었다.

1919년 영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암리차르 학살'지 근처 공원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
 1919년 영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암리차르 학살'지 근처 공원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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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저항 정신, 이들 앞에서 운운할 수 있을까

내가 암리차르에서 만난 시크교인들의 평화롭고도 자비로운 미소에는 불의에 맞서는 강인한 저항 정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의와 평화는 거저 지켜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품고 다니는 단검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스스로 담금질하고 정의와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저항 정신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수없이 많은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원흉들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활개치고 다니는 대한민국. 이 시대의 대한민국의 정신은 무엇일까. 일제 앞잡이 노릇을 했던 매국노들의 후손들이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있는 현실에서 대한민국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참담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 그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친일, 독재를 미화시켜 가며 "일본의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는 자를 총리로 내세우려 했던 대한민국의 현 정부. 이보다 더 참담한 것은 이런 정부를 국민의 절반이 지지하고 있고, 그들 중에는 내 형제와 가까운 이웃들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를 청산하자는 것은 과거에 머물자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진실로 과거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 끔찍한 현실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참담한 현실처럼. 이 참담한 대한민국의 현실과 함께 시크교인들이 지니고 다니는 칼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왔다.

1984년 학살이 일어났던 황금사원
 1984년 학살이 일어났던 황금사원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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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시크교 수난사, #황금사원 학살사건, #암리차르 학살사건, #저항정신, #시크교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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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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