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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오전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고 신해철의 빈소가 마련됐다. 17일 장협착 수술을 받은 신해철은 22일 심정지로 심폐소생술을 받고, 서울 아산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에 머물렀으나 27일 오후 8시 19분, 46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발인은 31일 오전 9시.
▲ 굿바이, 미스터 신해철! 28일 오전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고 신해철의 빈소가 마련됐다. 17일 장협착 수술을 받은 신해철은 22일 심정지로 심폐소생술을 받고, 서울 아산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수술을 받은 뒤 중환자실에 머물렀으나 27일 오후 8시 19분, 46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발인은 31일 오전 9시.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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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야 한다면 사라질 뿐, 두려움 없이." - <불멸에 관하여> 중

시대를 아우르며 모든 청춘들의 삶과 죽음을 투영했던 천재 뮤지션 신해철. 그는 음악가 이전에 누구보다 삶을 사랑했던 열정의 철학가였다. 음악을 통해 삶의 철학을 노래했던 그는 분명 진보적 사상가였다. 절망의 껍질을 깨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노래는 그 자체로 혁명가의 메아리가 됐다. 그리고 그 자체로 청춘들은 가슴속에 저마다의 희망을 품었다.

"학생의 본분은 자신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아 가는 것이다. 이 세상이, 무엇이 부당하고 무엇이 합당한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가수의 삶 속에 부당하고, 합당하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는 언제나 불의와 부당함에 맞선, 사회운동가로서의 거친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청춘들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에 공감했다. 정태춘, 안치환, 김제동, 윤도현, 권해효, 김미화, 문소리, 박혜경 등등 수많은 소셜테이너의 삶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마왕의 독설, 자유를 향한 항거

마왕 신해철의 독설은 그렇게 탄생했다. 대마초 비범죄화 주장, 학생 체벌금지, 간통죄 폐지 등등. 자신의 소신과 맞는 주장이라면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냈다. 또한 신해철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그리고 2003년엔 이라크전 파병반대를 위한 결의대회와 1인시위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신해철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누구보다 그를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했다.

이명박 정권에서도 그의 쾌변독설은 이어졌다. 당시 인수위가 추진했던 영어공교육 정책을 비판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스스로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든지, 영국의 영연방에 들어가 스스로 식민지가 되든지... 이게 무슨 엿 같은 소리냐. 

신해철은 북한에 대해서도 소신 있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이유로 그는 여론의 뭇매를 자처했다. 그는 2009년 4월 북한의 로켓발사를 축하하며 메시지를 남긴다.

"북한이 합당한 주권과 적법한 국제절차에 따라 로켓을 발사하였음을 민족의 일원으로 축하한다."

이 때문에 그는 보수우익단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무혐의 처리됐다. 지난 4월엔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이 음원유통 구조의 불합리성을 논하자 신해철도 적극 가담했다. 그는 "MP3가 생겨나고 이동통신업체가 음원 서비스를 맡는 등 창작 환경이 많이 바뀌어왔는데 그때마다 항상 착취당하는 것은 항상 음악가들이었다"고 쓴 소리를 퍼부었다.

신해철은 그의 저서 <쾌변독설>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독설을 쏟아냈다.

"음악 전문가들은 1970년대에 있었던 대마초 파동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건을 우리나라 대중음악계가 치명타를 입었던 사건으로 판단하거든요.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가 30년 후퇴했다고 보는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가 뭘 때려잡는지도 모르면서 잡은 거예요. 향후 이 나라의 대중음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장르가 분화되어 나가면서 파죽지세로 성장하던 음악의 정상적인 발전 단계를 완전히 퇴행시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겠죠"

음악을 통해 자유를 부르짖다

그의 독설은 그대로 음악이 됐다. 그가 직접 작사작곡한 수백곡의 노래가사에는 가수 신해철이 아닌 철학가이자 혁명가인 신해철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그래서 그의 노래에는 삶과 죽음, 불의와 저항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한 때 그가 결성한 밴드 이름도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의 영국 유학시절 별명은 혁명가 '올리버 크롬웰'의 약칭인 크롬이었다.

신해철의 노래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사상을 입증할 수 있다.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길 위에서>, < 껍질의 파괴>, <민물장어의 꿈>, <날아라 병아리>, <70년대에 바침>, <슬퍼하는 모든 이를 위해>, <절망에 관하여>, <먼 훗날 언젠가>, <더 드리머>, <불멸에 관하여> 등등.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 <민물장어의 꿈>

두려움, 고독, 불안함, 삶과 죽음은 언제나 그의 음악을 결정하는 화두였다. 사람이란 무엇을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오는가. 그리고 그 대답을 찾기 위해 홀로 걸어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연함을 투영했다.

"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선생님 가르치는 대로 친구들과 경쟁하며 걷는다 / 각본대로 짜여있는 뻔한 인생의 결론 향해 생각없이 발걸음만 옮긴다 / 세상은 날 길들이려 하네 이제는 묻는다 왜 /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껍질 속에 나를 숨기고..." - <껍질의 파괴>

불안했던 청춘시절 <껍데기를 벗고서>라는 책을 읽는 느낌이다. 신동엽 시인이 혁명의 본질을 던졌던 <껍데기는 가라>가 떠오르는 노래다. 허위의 가식을 벗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연의 가치에 대해 묻고 있다.

가수 신해철은 <슬픈표정하지말아요>라며 우리에게 위안을 주며 떠났다. 철학가 신해철은 <일상으로의 초대>를 끝으로 <길 위에서> 혁명을 노래하며 <70년대에 바침>으로 선배들을 위로했다.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신해철은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엔 대한 화두를 남기며 별이 됐다.

그가 떠난 <50년 후의 내모습>을 생각해본다. <먼 훗날 언젠가> 마왕 신해철을 생각하며 <우리가 만든 세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불멸..>의 메시지가 되어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함께하리라.

"처음 아무런 선택도 없이 그저 왔을 뿐이니 / 이제 그 언제가 끝인지도 나의 것은 아니리 / 시간은 이렇게 조금씩 빨리 흐르지만 / 나의 시간들을 뒤돌아 보면 후회는 없으니 / 그대 불멸을 꿈꾸는 자여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으라 말하는가 / 왜 왜 너의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다..." - <불멸에 관하여>


태그:#신해철, #마왕 , #무한궤도, #천재 뮤지션, #불멸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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