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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해가 바뀌자 사는 아파트 전세계약 만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3월이면 2년 계약이 끝나는 터라 은근 불안해졌다. 한편으로는 타지에서 사는 집주인이 설마 바로 나가라고 하겠느냐 싶었다. 일단 이사 갈 집도 알아보지 않은 채 느긋하게 있었다.

혹시나 하는 우려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집주인 동생의 신혼집으로 꾸민다며 당장 집을 빼달라고 했다. 심히 당황스러웠다. 세입자인 우리 처지에서는 야속할 수도 있겠지만, 집주인으로서는 타당한 이유였다. 흥정이나 온정 따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새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셋집 구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무리 지방 소도시라고 하지만 내가 사는 신도심 지역은 기존 전세가 대부분 월세로 바뀌고 말았다. 전세 수요자만 급증하니, 전세 물건은 눈을 씻고 찾을 수 없었다.

부동산에 부지런히 전화도 돌려봤지만, 너무 비싸거나 전세가 나온 게 없었다. 설령 있다 할지라도 워낙 전세 자체가 품귀 상태니, 나오는 대로 계약이 이뤄졌다. 결국, 조금씩 현실과 타협하며 사람들이 가장 꺼린다는 1층까지 고려했다.

다행히 계약만료 보름을 앞두고 부동산 사무실에서 아파트 1층 전세가 나왔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아무리 1층이라지만 25평을 넘어서니 기존에 살던 집의 전세보증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만만찮은 이사 비용에 부동산 소개비는 물론 벽걸이 TV, 에어컨, 정수기, 비데 등 이전 설치비도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가진 돈에 맞춰 집을 구하려 해도, 걸림돌이 너무나 많았다. 일종의 '하향 지원'을 했지만 오르는 전세보증금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부족한 돈은 일단 급여생활자를 대상으로 은행에서 시행하는 대출금으로 해결했다. 프라이버시가 침해 당한다는 것,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주민으로 인해 소음이 좀 심하다는 것, 그것만 제외하면 크게 불편함이 없을 거라 믿었다. 방도 세 개에 거실이 비교적 넓고 주방은 따로 분리돼 있었으니까.

집 상태는 꽤 좋은 건 아니었지만, 집주인이 사는 상황에서 집을 꼼꼼히 살핀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집주인 부부 모두 교직에 있고, 사람 겉모습도 깔끔하다고 믿은 것이 화근이었을까? 등기부 등본도 깨끗하고 도배와 장판만 새로 하면 아주 좋은 집이라며 부동산직원도 옆에서 거들었다.

집안 상태 점검 못한 것이 '화근'

어차피 어디 가도 이 돈에 전세 구하기는 어려운 터라, 그 자리에서 그만 계약금을 치르고 말았다. 전세를 시중보다 싼 값에 급하게 구하려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구두 상으로 입주 예정일을 협의하고, 며칠 후 일단 등기부 등본부터 떼어 봤다. 집안 상태를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것이 꺼림칙했지만, 더 중요한 건 전세금의 안전장치였다.

그런데 깨끗하다던 등기부 등본에는 은행의 근저당 설정이 두 건이나 있는 게 아닌가. 계약 시 전혀 문제가 없다며 부추기던 부동산 중개인의 말이 떠올랐다. 상식적으로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하면 전세금 안전이 보장되는지 않나? 중개업소는 전 재산의 목돈이 걸린 계약을 집주인의 말만 믿고 과장된 정보를 마치 진실처럼 나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우리도 몰랐다. 예전에 대출받았던 은행에서 근저당 설정을 모두 해지한 줄 알았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곧 해결하겠다. 그것은 내가 책임을 진다. 인생을 속고만 살았나?"

등기부등본이 지저분한 집주인이나 중개인들이 흔히 쓰는 말 아닌가?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전세금은 집 주인에겐 빚의 일종이다. 빚을 얻기 위해 돈이 급한 이들이 오히려 큰소리부터 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집주인의 핑계가 더 가관이다. 은행대출금은 이미 갚았는데 근저당설정을 해지하는 절차를 깜빡했단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그렇게 말하는 집주인에게 이런 요구를 했다.

"등기부등본 설정 정리해서 담보력 확보한 후에 전세금 입금할게요!"

부동산 사무실에도 계약서에 '근저당 설정 선 해지 조건'을 특약으로 기재해 달라고 요구했다. 다행히 이사 직전 근저당 문제는 해결되어 한시름 놓았다. 그런데 예상하지도 못했던 또 다른 문제가 발목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수리업자도 혀를 찬 집의 상태는...

10여 년간 도배 한번 안 한 듯한 벽과 바닥, 검은 때로 얼룩진 콘센트 뚜껑, 싱크대 주변에 미친 듯이 튀어 있는 음식물 자국….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상황, 돼지우리는 저리 가라였다.
 10여 년간 도배 한번 안 한 듯한 벽과 바닥, 검은 때로 얼룩진 콘센트 뚜껑, 싱크대 주변에 미친 듯이 튀어 있는 음식물 자국….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상황, 돼지우리는 저리 가라였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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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 시 수리비용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상 현장을 목격하니 돼지우리는 저리 가라 수준이다. 10여 년간 도배 한 번 안 한 듯한 벽, 청소 한 번 안 해 그을음으로 가득한 보일러실, 코팅이 다 벗겨져 녹물이 흐르는 빨래 건조대, 검은 때로 얼룩진 콘센트 뚜껑, 싱크대 주변에 미친 듯이 튀어 있는 음식물 자국은 얼마나 굳었는지 떡이 돼 있고....

다른 집은 다 있는데 이 집에만 없는 방범창은 물론 그나마 있는 방충망도 너덜너덜했다. 화장실은 문을 열자마자 토할 뻔했다.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상황, 하지만 그것은 내 눈앞에 보이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청소 한 번 안 해 그을음으로 가득한 보일러실과 온통 검은색으로 변한 실리콘 곰팡이는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청소 한 번 안 해 그을음으로 가득한 보일러실과 온통 검은색으로 변한 실리콘 곰팡이는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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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큰 것만 그렇다. 싱크대와 화장실의 부속물 상태나 온통 검은색으로 변한 온 집안의 실리콘 곰팡이는 이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세면대는 물이 새고 어두침침한 조명에 누렇게 찌든 때와 칙칙한 변기... 어디 하나 부담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이런 집에서 과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돈 앞에선 아주 매몰차게 칼 긋는 게 집주인이랄까? '살려면 살고, 안 살려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우리의 하소연에 집주인도 미안했는지 도배와 장판은 새로 해준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의 수리는 무시 당하고, 심지어 앞으로 잘 관리하라는 경고부터 들었다. 애초에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이라면 수리를 미리 요구했어야 했지만 '담보력 확보'만 계약서 특약조건에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전세 놓는 건데 내가 비싼 비용 들여서 공사까지 해줄 수는 없잖아. 뭐, 리모델링할 것도 아니고 잠깐 살고 갈 건데 대충 살지 그래? 우리도 정말 시세보다 싸게 준 거야. 별로 전세 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

집주인은 이제 더는 해줄 게 없으니 다른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말라고 했다. 나름대로 서비스 차원에서 해줄 것은 모두 다 해줬다는 거드름을 피우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사전에 확인 못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고, 또 전세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갈 수밖에.

더구나 입주가 바로 코앞이니 급한 쪽은 바로 우리다. 집수리 전문 업자에게 알아보니 수백만 원의 견적이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리하러 집에 온 설비 기사의 한마디 말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이런 집에 사흘만 살았다간 바로 무슨 병이라도 걸리겠구먼. 삼십 년 설비 경력에 이런 집은 또 처음이야. 게다가 세입자는 또 뭔 죄라고 돈까지 들여? 쯧쯧..."

이런 집에 사흘만 살았다간 바로 무슨 병이라도 걸리겠다고 푸념하는 설비기사의 한마디가 더욱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이런 집에 사흘만 살았다간 바로 무슨 병이라도 걸리겠다고 푸념하는 설비기사의 한마디가 더욱 나를 더 슬프게 한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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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가 끝나고 입주 하루 전, 집에 들른 집주인. 수리를 말끔히 끝낸 집을 보더니 흡족한지 아주 만족한 표정이다. 그런데 갑자기 또 황당한 요구를 시작한다.

"장식장과 탁자 몇 개, 수석 몇 점을 놓고 갈 테니 잘 쓰고 2년 후에 돌려줘. 어차피 쓸 수 있는 거니까 따로 사지 말고. 수석은 베란다에 놓으면 되겠네?"

집주인이 말한 가구류를 힐끗 보니 10년도 더 되어 보이는 낡은 것이었다. 그것도 입주 시 분양사 측에서 끼워 넣기로 제공한 것들이었다. 우리도 쓰고 있는 가구가 있다고 항변하니 오히려 우리에게 유난히 깐깐하게 군다며 구시렁거렸다. 그 집주인, 결국에는 그 가구들을 버리고 갔다.

돼지우리 전셋집, 결국 내 돈으로 수리

우여곡절 끝에 입주하고 나니 10년은 더 늙어 버린 것 같다. 그런데 앞으로가 더 문제다. 무사히 집에는 들어왔으나, 이젠 후환이 더 두렵다. 계약이 끝나는 2년 후, 그날 이후 벌어질 집주인의 행동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그땐 또 무엇으로 트집을 잡을까?

집주인이 새로 해준 도배와 장판을 원상회복해 달라고 하면 어찌지? 2년 후 집의 상태를 놓고 옥신각신할 게 불 보듯 뻔해 보였다. 보증금은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을까? 나 지금 떨고 있나?

이제 여러 번의 이사를 통해 나름 터득한 것이 있다. 전세든 월세든 집주인은 주거할 수 있는 상태로 임차인에게 양도할 당연한 책임이 있다. 고장 난 부속물은 기본적인 수리를 해줘야 하고, 벽지나 장판 등도 임대차와 관련된 법 이전에 쌍방 합의가 원칙이다. 아주 심하게 훼손된 경우, 임대인이 모두 해줄 수도 있지만 서로 절반씩 부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계약이 이뤄졌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집주인이 안 해 줄 가능성이 크다. '집주인이 참, 사람 좋다'는 인상은 그저 느낌으로 끝내야 한다. 돈 앞에 놓인 인간의 다양성은 이사를 몇 번 해봐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 사전에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만이 세입자가 살길이다. 계약서에 이미 도장을 찍은 순간, 세입자에겐 아무런 권리도 없다.

수백만 원을 들여 수리를 마친 후 단장된 집. 이제는 이사 갈 때 집주인의 원상회복 요구부터 미리 걱정하고 있다.
 수백만 원을 들여 수리를 마친 후 단장된 집. 이제는 이사 갈 때 집주인의 원상회복 요구부터 미리 걱정하고 있다.
ⓒ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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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금은 치솟고 집 장만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요즘, 성큼 다가온 추위는 가뜩이나 추운 세입자들의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한다. 집주인들이여, 조금만 더 애정을 가져 설 자리 더욱 좁아진 집 없는 설움의 세입자들 처지도 한 번쯤은 생각해주길 바란다.

세입자들을 위한 정책적 배려는 실종한 지 오래다. 세입자들을 위한다며 내놓은 주택임대차시장 선진화 방안도 결국엔 모두 집주인 지원 위주 아니었던가. 제발 서민을 위한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뜬구름 잡는 계획 좀 내놓지 않길 바란다.

벌써 16년 차 세입자, 앞으로 이보다 더한 기간을 세입자로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이사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사 갈 때 집주인의 원상회복 요구부터 미리 걱정하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정말이지 이 집주인의 횡포, 우리 가족에서 끝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태그:#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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