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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부부 영주씨랑 보람씨.
▲ 코론 신혼부부 영주씨랑 보람씨.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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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여자의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다정한 손길로.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맞춘다. 미소를 지으며. 바닷바람을 타고 그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행복한...'

둘에게서 눈을 못 떼겠다. 그렇다고 빤히 쳐다볼 수 있겠나. 달리는 '방카(배의 일종)' 위에서 두 걸음 떨어져 마주보고 앉았는데 안 보는 척, 힐끗힐끗 훔쳐봤다. 사랑에 빠진 남녀 주인공을 바라보는 조연처럼. 그들의 젊음과 건강과 사랑을 질투하듯 실 눈으로. 애련하게 흘러간 내 청춘이 뜨문뜨문 떠올랐다. 저들 나이쯤에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영주씨랑 보람씨, 팔라완의 코론으로 신혼여행을 온 커플이다.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는 30대 초반의 선남선녀였다. 젊음과 사랑이 절정에 오른 신혼부부. 그들을 아침에 방카 위에서 만났다. 오늘 하루 스쿠버다이빙을 같이 하게 됐다.

내가 팔라완에서 배낭여행 중이라고 하자, 둘은 배낭을 메고 곧 세계일주를 떠날 거라고 했다. '결혼이란, 한 쌍의 남녀가 돌아오는 차표도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라는 말이 불쑥 떠올랐다. 직업을 묻자, 신랑인 영주씨가 마지못해 밝히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통증클리닉 의사라고.

버디(짝) 승환씨랑
▲ 코론 버디(짝) 승환씨랑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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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쿠버다이빙 경력이 꽤 되는지 능수능란하게 잠수를 즐겼다. 수중카메라로 바다 풍경과 신부 보람씨의 모습을 찍으며. 보람씨는 아영씨에게 오픈워터 다이빙 강습을 받는 중이었다. 이틀째라니 완전 초짠데, 바닷속에서 나보다 훨씬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황홀한 바닷속... 홀딱 반했다

신혼부부의 달콤한 무드 때문일까.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블루 라군>(The Blue Lagoon)'이 떠올랐다. 산호초 열대 바다의 무인도에서 펼쳐지는 어린 연인의 성장, 원초적 본능, 순수한 사랑, 브룩 실즈의 풋풋한 누드... 파라다이스를 꿈꾸게 만든 아름다운 영화였다. '기분이 이상해. 심장이 마구 뛰어!'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심장도 리차드의 대사처럼 쿵쿵 뛰었다. 그때처럼 내 심장이 아침부터 쿵쿵쿵 빠르게 뛴다.

우리는 CYC섬 앞 바다에서 첫 스쿠버다이빙을 마치고, 곧바로 두 번째 잠수 장소로 이동했다. 날은 맑고 바다는 잔잔했다. 오늘은 다이브 숍에서 마스터 과정을 밟는 승환씨가 내 버디(짝)가 됐다. 그는 첫 다이빙부터 나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4일 만에 다시 뛰어든 바다였다. 어제도 종일 바다에 있었지만, 호핑 방카를 타고 다니며 스노클링만 했다. 그런데 며칠 만에 나는 스쿠버다이빙 기술을 모두 까먹었나 보다. 무지 허둥댔다. 중성부력을 못 맞춰, 바닷속에서 너무 가라앉거나 너무 떠오르거나. 그때마다 승환씨가 나를 끌어 내리거나 끌어 올리느라 정신 없었다.

코론의 절경
 코론의 절경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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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앞 사람의 오리발에 얼굴을 세게 맞았다. 내가 너무 붙어갔던 거였다. 그 충격에 물고 있던 호흡기가 빠졌다. 아찔했다. 팔을 뻗어 승환씨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살려 줘!'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붙들고 발버둥쳤다. 덩치 큰 승환씨가 균형을 잃고 확 끌려왔다. 다행히 내가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입을 앙 다물고 숨을 참아냈다.

몸부림을 멈추고 호흡기를 끌어다 입에 물었다. 후-! 흡-! 호흡기에 찬 물을 빼며 숨을 몰아쉬었다. 잠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불시에 일어날지 모르는 작은 사고가 패닉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 위험한 짓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 거다. 그럴 만한 이유들을 대며.

잠수 두 번째 장소인 코론 섬의 바라쿠다 호수에 도착했다. 나는 5일 전 이곳에서 경험했던 황홀한 물빛과 수온약층의 신비를 다시 체험했다. 첫 번째 잠수보다 몸도 풀어지고 감각도 살아났다.

세븐 아일랜드 가는 길
 세븐 아일랜드 가는 길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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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테 페가도스(Siete Pecados) 해역의 세븐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곳이 세 번째 다이빙 포인트였다. 해양보호구역으로 일곱 개의 바위섬들이 우죽비죽 솟아 있었다. 부수앙가 섬이 바로 코앞이었다. 북쪽으로 마키닛 온천의 맹그로브 숲이 보였다. 산호가 다양하고 아름다워 스쿠버다이빙과 스노클링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나는 바다에 입수하자마자 뭔가에 쏘였다. 마스크와 잠수복 사이로 맨살이 노출된 턱 밑을. 따따따끔 따끔, 기분이 싸했다. 겁이 났다. 뭐지? 해파리에 쏘였나? 별일 아닌 일인데도 바닷속에서는 겁을 집어먹기 일쑤였다. 바다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거다.

심해엔 죽음과 대면하는 위험이 사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식인상어처럼 공격적인 생명체만 위험하겠나. 거대하고 기이하게 생긴 대왕문어나 고래 같은 생명체만 위압감을 주겠나. 해파리, 히드라, 산호, 말미잘, 가시성게, 라이온 피시처럼 독을 품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흔했다. 쏘이거나 찔릴 수 있었다.

바다거북
 바다거북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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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브라보다 800배 센 독을 갖고 있다는 바다뱀은 또 어떻고. 그뿐이겠나. 질소마취, 산소마취, 잠수병, 패닉, 귀에 염증이 생기거나 고막이 터지는 사고,  순식간에 쓸고 가는 조류... 깊고 넓은 미지의 물속 풍광이 주는 원초적 공포감. 

그 모든 공포감에 맞장 뜨며 내가 바다로 뛰어드는 이유가 뭘까. 모험심? 형언할 수 없는 바다의 신비와 황홀감? 실재 바다속에 들어오고서야 알았다. 바다엔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를 읽으며 느꼈던 두근거림과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는 걸. '노틸러스' 호의 네모 선장이 이끄는 해저세계여행만으론 느낄 수 없는 것. 아무리 해상도 높은 3D 해양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느낄 수 없는 것.

간접경험으론 지구, 생명체, 진화, 물, 그리고 무중력 상태에서의 날아다님 같은, 바다를 진짜 느끼기엔 어림도 없다.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앞으로 베테랑 바다 탐험가가 된 양 '바다 예찬가'를 부르며 나댈 것 같다. 잔잔하고 따뜻한 열대 바닷 속, 수심 30여 미터에서 고작 며칠 허우적거린 주제에. 사람들을 붙들고 '바다의 감동'에 대해 허풍 떨며, 우쭐거리게 생겼다. 죽기 전에 꼭 가보라며.

바다속 풍경
 바다속 풍경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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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바다는 사랑과 같은 속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옥의 맛과 천국의 맛을 다 품고 있는 사랑. 쓴맛, 단맛이란 표현은 약하다. 지옥과 천국, 그 극단의 맛이 그토록 매혹적인가? 소용돌이에 빨려들 듯 저항할 수 없는 유혹. 종일 내 심장이 쿵쿵쿵 뛴 것도 그 지독한 지옥과 천국을 대면한 탓이었나?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세븐 아일랜드의 바닷속에서 본 생명체들의 이름을 나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방면에 무지하다. 그러니 그 기이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겠나?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됐다. 마침내 바닷속 구경을 마치고 방카로 올라왔다. 45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내 몸엔 아직 비늘 하나 돋지 않았는데.

밤에 아영씨랑 맥주를 마셨다. 아영씨는 이제 20대 후반쯤 됐을까. 그런데 많이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최근 하루도 쉬지 않고 바다에 나가 다이버 손님들을 가이드 하고 있었다.

"강 쌤, 정말 신기해요! 우리 엄마보다 더 나이 많은 강 쌤이랑,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가 되다니... 감 쌤 몸매며 말이며, 생각이며, 너무 젊은 것 아니에요?"

아영씨의 달뜬 목소리가 내 기분을 고조 시켰다. 기분 좋았다. 젊어 보인다는 말이 기분 좋게 들린다는 건, 정말 늙었다는 거라는데. 

"그래요? 어디서나 자주 듣는 말이에요."  

내가 일부러 턱을 빳빳이 내밀며 말했다.

"권위같은 걸 쥐뿔도 못 가졌거든."

스쿠버다이빙을 마치고 수면 위로 올라오다.
 스쿠버다이빙을 마치고 수면 위로 올라오다.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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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며, 킬킬킬 웃었다. 산 미구엘을 두 병쯤 비웠나. 아영씨가 자신의 러브스토리를 풀어놓았다. 사진을 보여주며. 잘생긴 재남씨가 그녀의 남자였다. 둘은 같은 다이브 숍에서 다이버로 일했다. 바쁘고 건강하고 활기찬 커플이었다. 일 욕심도 많아 보였다.

"다이버들이라 다르네요. 바다에서 이렇게... 멋져요!" 

하늘에서 바다가 보였다

아영씨는 소녀처럼 머리에 화관을 두르고 짧은 흰 드레스를 차려 입었다. 훤칠한 재남씨는 셔츠가 잘 어울렸다. 바다에서 노는 둘의 모습 위로, 영화 <블루 라군>의 브룩 실즈와 크리스토퍼 앳킨스가 어른거렸다. '바다와 사랑' 역시, 아름답고 순수해 보였다. 

"얼마 전에 양가 부모님 모시고 약혼식 같은 걸 했어요. 결혼식은 한국 나가서 할 거고요. 친구랑 코론으로 여행 온 첫날, 재남씨를 만났어요. 재남씨는 그때 산호 다이브 숍의 강사였어요. 첫 인상은 정말 별로였어요. 남자가 얼마나 말이 많은지... 그런데 같이 다이빙을 하면서 알게 됐죠. 그냥 시끄러운 남자가 아니라, 손님을 즐겁게 해주려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손님들에게 생선이나 게살을 직접 발라 주며 음식을 챙겨 주는데... 남자 손님, 여자 손님 가리지 않고요. 본인은 정작 밥을 못 먹으면서까지 그러는데...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재만씨는 제 수영복 몸매에 반하지 않았을까요? 강 쌤! 진짜예요. 제가 키는 작지만 한 볼륨 하잖아요!"
"인정!"

"그리고 아마 그때 재남씨는 내가 엄청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걸요."
"아, 그것도 인정! 아영씨는 정말 어떻게 중국어, 일어, 영어, 타갈로그어까지 그렇게 잘할 수 있어요? 난 영어 단어 하나 외우는 것도 절망스러운데... 아영씨가 외국 손님들과 의사소통하는 거 보면... 혹시, 천재?
"언어는 단어든 문법이든 암기잖아요. 나만의 연상 암기법이 있어요."

시간이 난다면, 그 방법을 전수 받고 싶었다. 

"아무튼 우리는 그때 7일 동안 쉬지 않고 다이빙을 같이 했어요. 마지막 날엔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지쳐서... 바라쿠다 레이크로 마지막 다이빙을 나간 날, 다른 손님들만 다이빙을 하고, 우리는 호숫가에 앉아 얘기만 했는데, 그때 서로 마음을 확인하게 됐어요. 여행 왔다가 재남씨 만나 결국, 코론에 눌러앉게 된 거죠.

다이버 아영씨랑 재만씨의 특별한 날.
 다이버 아영씨랑 재만씨의 특별한 날.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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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같은 다이버라 좋은 점이 많아요. 취미도 같죠, 직업도 같죠,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는 게 좋아요. 매일 붙어 다닐 수 있어서 좋고. 하지만 일이라, 의견이 다를 땐 부딪히게 돼요. 우리 사이를 모르는 손님들이 가끔 재남씨나 내게 유혹의 눈길을 던질 때가 있는데, 옆에서 그 꼴을 지켜볼 때는... "

알딸딸해질 때까지 맥주를 마셨다. 즐거운 술자리는 시간이 빨리 간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졌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 쓰레기 매립지 넓은 공터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총총총, 많았다. 어? 하늘에서 바다가 보였다. 별들이 꼬리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태그:#스쿠버다이빙, #코론, #팔라완,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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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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