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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물살도 만만찮아요. 팽목보다 더 셀지도 몰라요."

'팽목'이라면 지난봄에 세월호를 삼킨 진도 앞바다가 아니던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곳 바다의 물살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울돌목 다음으로 거세다고 했는데, 이곳 광성보 앞의 손돌목도 물살이 세기로는 그에 버금갈 정도라고 한다. 용두돈대의 성축에 기대어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그 말에 다시 한 번 쳐다본다. 바닷물은 허옇게 뒤채며 거세게 흘러가고 있었다.

광성보 앞바다는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하다. 물이 쓸려나가거나 밀려 들어올 때면 바다가 몸을 뒤틀며 한바탕 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용틀임이라도 하는 양 바닷물이 이리 쏠리고 저리 뒤척이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군데군데 암초도 있으니 까닥 잘못하다가는 배가 뒤집힐 수도 있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김포와 강화가 나란히 있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김포와 강화가 나란히 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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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 전설도 생긴 것이리라. 광성보 앞의 바다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손돌의 전설'이다.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심한 바람과 추위가 닥쳐오는데 사람들은  이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억울하게 죽은 손돌을 기린다. 

손독목의 전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의 고종(혹은 공민왕)이 적을 피해 강화도로 건너 올 때의 이야기다. 바닷길을 잘 아는 손돌에게 길잡이를 시켰는데 자꾸만 물살이 센 곳으로 배를 몰고 가는 게 아닌가. 그래서 왕이 의심쩍어하니 손돌이 "이곳은 암초가 많아 둘러서 가는 것이니 안심하옵소서"하고 아뢰었다. 

언제 적이 뒤를 쫓아올지 몰라 다급했던 왕은 손돌이 흉계를 꾸미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그의 목을 베라고 신하들에게 명하였다. 그러자 손돌은 바가지를 하나 물에 띄우고는 "이것을 따라가면 길이 나올 것이옵니다"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의심스러운 마음에 손돌을 죽였지만, 암초가 많고 물살이 거센 바다를 건널 방법이 없었다. 그때야 정신을 수습한 왕은 손돌이 띄운 바가지를 따라가서 건너편인 강화 땅에 닿을 수 있었다.

험한 바다를 무사히 건너온 후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왕은 손돌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광성보 앞의 바다를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손돌의 기일 무렵에 부는 강풍과 추위를 '손돌바람' 또는 '손돌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거세게 흘러가는 손돌목의 바닷물
 거세게 흘러가는 손돌목의 바닷물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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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전설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몽골을 피해 내려왔다면 개경에서 가까운 강화 북단의 승천포로 바다를 건널 것이지 부러 손돌목까지 내려왔을 리가 없는데도 전설에서는 왕이 이곳 앞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또, 공민왕과 몽골의 침략과는 상관이 없는데도 일부 전설에서는 그렇게 전해 내려온다. 이것은 손돌목이 얼마나 물살이 세고 험한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왕을 빗대어서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동강에 나타난 철함(鐵艦) 제너럴셔먼호

'손돌의 전설'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김포와 강화 지방에서 전해 내려온다. 울돌목이나 손돌목처럼 '목'이 붙어있는 곳은 대개 물살이 거세고 좁은 해협을 말한다. 손돌목 또한 썰물과 밀물이 교차할 때면 바닷물이 마치 용광로 속의 끓는 쇳물처럼 허옇게 거품을 일으키며 맹렬하게 흘러간다. 광성보 앞의 바다를 특별히 '손돌목'이라 불렀던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였다.

이처럼 배를 몰기에 위험한 곳이었던 손돌목이었지만, 기계화한 군함의 위력 앞에서는 맥을 출 수 없었다. 1871년, 신미년의 여름에 함포를 쏘며 진격해 오는 미군함의 위력 앞에 손돌목도 조선군도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꺾이고 말았으니 전설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냉엄한 현실의 시대가 온 셈이다.

은둔의 나라로 알려져 있던 조선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력적인 침범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고종 3년인 1866년부터였다. 이해 초에 프랑스 신부들과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처형한 병인박해가 있자 프랑스는 이것을 기화로 그해 가을(10월 14일)에 조선을 쳐들어오니 병인양요가 그것이다.

 1866년 8월에 평양 대동강을 침입했던 미 상선 제너럴셔먼호
 1866년 8월에 평양 대동강을 침입했던 미 상선 제너럴셔먼호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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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보복 침입을 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던 그해 여름(8월 20일)에 평양의 대동강에 검은색 철선이 연기를 뿜으며 나타났다. 길이가 55미터에 너비는 15미터나 되는 커다란 이 배에는 대포가 2문이나 설치되어 있었고 장총과 권총을 비롯한 무기들도 많이 실려 있어서 유사시에는 군함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에 보트를 띄워 강의 깊이를 재고 물길을 알아보는 등 정찰 활동을 했다. 바로 미국의 상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였다.

내 집 앞마당에 낯선 사람이 출몰했으니 놀라고 당황스러울 것은 당연한 이치다. 더구나 무기까지 갖추고 위협을 하니 어느 누군들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조선은 군자의 나라답게 그들을 홀대하지 않고 먹을 것과 연료 등을 주며 '유원지의(柔遠之義)'를 보였다. 멀리서 온 손님을 잘 대접해 주는 미덕을 보였음에도 그들은 오히려 우리의 병사들을 가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조선의 장수가 포로로 잡혀있고 군졸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평양 주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이양선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화살을 쏘았지만, 미군의 화력 앞에 무력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인은 일곱 명이나 목숨을 잃고 또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월등히 우수한 무기를 가진 미군을 정공법으로 상대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군은 화공법(火攻法)을 쓰기로 하고 폭약을 실은 배 두 척을 제너럴셔먼호 가까이 접근시켰다. 때마침 대동강의 수위는 낮아져 있었다. 며칠 전에 온 큰비로 수위가 높아진 대동강을 제너럴셔먼호가 들어왔는데 물이 빠져 수위가 낮아지자 배는 그만 모래톱 위에 얹히고 말았다.

신미양요의 시작

배 2척을 한데 묶어 마른 나무를 잔뜩 쌓은 다음에 유황과 초석을 뿌렸다. 그리고 화약을 장전하고 도화선에 불을 붙여 제너럴셔먼호와 충돌하도록 하였다. 철선은 곧 화염에 휩싸였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화약이 폭발할 때 죽거나 또는 불이 붙은 채 강에 뛰어들었지만 생명을 건지지는 못했다. 간신히 살아나 뭍으로 도망간 사람도 있었지만, 흥분한 조선 사람들이 그들을 살려주지 않았다. 배에 타고 있던 스물세 명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광성보 용두돈대 앞 바다
 광성보 용두돈대 앞 바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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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셔먼호를 맞아 화공법을 펼친 평양 사람들의 지혜와 기개를 떠올려 보자니 <삼국지> 속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조조의 백만 대군을 화공법으로 물리친 제갈공명의 적벽대전이 이날 평양의 대동강에서도 있었던 셈이다. 거대한 철선이 화염에 휩싸여 가라앉았다. 교만방자하기 짝이 없던 그들을 물리쳤던 이 싸움은 조선과 미국이 만난 첫 대면이자 전투였다.

한껏 눈 아래로 낮춰봤던 조선에 자국민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안 미국은 보복하기로 한다. 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은 무력을 통한 통상 협상을 한다는 것이었다. 강력한  해군 함대를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게 미국의 기본 정책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중국과 일본 등에서 통상을 했던 미국은 조선과도 무력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

1867년부터 1869년까지 몇 차례나 조선에 군함을 보내 사건에 대해 조사를 벌인 미국 공사는 제너럴셔먼호가 먼저 공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들은 조선의 책임을 물으며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번번이 거절하자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강화도를 점령해서 조선을 협박하기로 한다.

1871년 5월에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로저스 제독은 군함 5척과 해군 1천 2백 명으로 이루어진 '조선 원정대'를 만들고 5월 16일에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발해 조선으로 향했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의 시작이었다.

 물이 빠져 암초들이 드러난 광성보 앞 바다
 물이 빠져 암초들이 드러난 광성보 앞 바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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