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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 특이한 문화재 구경 한 번 안 하실래요?"

지난 25일 토요일 아침, 지역의 문화계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아래 A로 칭함)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북 포항 뇌성산에 있는 뇌록 산지를 탐방하자는 것이었다.

뇌록(磊綠)은 회색빛을 띤 녹색 도료로, 사찰 벽화나 단청(궁궐 등 전통 목조건물의 안팎에 양식화된 무늬를 짙은 채색으로 그려 아름답게 장식한 것)의 안료로 쓰인다. 이날 방문한 포항 뇌록 산지는 우리나라 유일의 뇌록 생산지였다.

조선 시대까지 이곳에서 공급한 기록이 있지만, 1800년대 이후 생산성이 떨어져 뇌록 생산이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뇌성산에는 돌로 만든 뇌성산성이 있는데, 산성을 축조하는데 필요한 돌을 캐다 뇌록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3년 12월 16일 '포항 뇌성산 뇌록 산지'를 국가 지정 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547호로 지정했다.

파들어가다만 주상절이에도 뇌록 흔적이 남아 있다
 파들어가다만 주상절이에도 뇌록 흔적이 남아 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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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와 마주한 뇌성산

그렇게 우리는 한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 뽑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학계리 산 7-2' 지도 한 장을 들고 카메라를 준비해 울산을 출발했다.

자동차로 울산에서 경주 방향으로 1시간을 넘게 달리자 '구룡포' 이정표가 나왔다. 차량에 내비게이션이 없는 관계로 미리 뽑아온 지도에 의존해야 했다.

지도에는 뇌성산이 구룡포를 마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금 더 차를 달리자 드디어 지도에 나와 있는 산기슭의 공장 혹은 축사로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일단 건물을 찾기 위해 뇌성산 밑의 길을 찾아 올라갔다. 얼마 올라가다 보니 축사가 나왔다. 뇌성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곳이 유일한 통로라고 하는데, 건물 주인은 이곳이 양계장이라고 했다.

양계장 마당에 차를 주차 시킨 후 말로만 듣던 뇌록 산지를 찾아 무작정 올라갔다. 10분 정도 올라가니 뇌록을 채석한 뒤 굴러내린 듯한 돌무더기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문제는 여기저기 나 있는 돌무더기 중 어느 쪽으로 올라가야 하냐는 것이었다. 뇌록 산지를 안내하는 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시넝쿨 지나니 뇌록 산지가

함께 동행한 A는 사람이 다닌 흔적인 있는 넝쿨 더미를 찾아 잘도 올라갔다. 45도가량 경사진 곳으로 20여 분을 올라가다 보니 숨이 차오른다. 30년 전 군 복무 시절 60mm 박격포를 군장 위에 매고 경기도 양주 '울고 넘는 국사봉'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건만, 기자보다 너덧 살은 더 많은 A는 훨훨 날듯이 올라갔다. 그 모습이 신기할 뿐이었다.

포항 뇌록산지 현장. 왼쪽에 용암이 굳은 주상절리가 보인다. 가운데가 뇌록을 채취하기 위해 주장절리를 파 들어간 움푹파인 공간이다.
 포항 뇌록산지 현장. 왼쪽에 용암이 굳은 주상절리가 보인다. 가운데가 뇌록을 채취하기 위해 주장절리를 파 들어간 움푹파인 공간이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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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오르던 A도 뇌록 산지 채석장이 어느 쪽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듯 "이쪽으로 가보자"며 한쪽을 택했다. 넝쿨 가시를 헤치며 올라 가다보니 드디어 채석장 입구가 나타났다. 마치 미지의 동굴을 탐험하듯 뇌록 채석장으로 먼저 진입한 A가 "주상절리다!" 하고 외쳤다. 주상절리는 현무암질 용암이 식으면서 기둥 모양으로 굳은 것인데, 바다에만 있는 줄 알았던 것이 신기하게도 뇌성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아마 그 옛날 이 주변 어딘가에서 용암이 폭발해 뇌록 산지를 형성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뇌록 채석지는 깊이 10 미터, 너비 10 미터, 높이 10 미터 가량의 직사각형 형태로 들어가 있었다. 소량이지만 뇌록이 붙어 있는 돌 조각이 군데군데 보였다. A는 신기루라도 만난 듯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험한 산속에서 돌덩이를 깨부수며 귀한 뇌록을 채취한 후, 다시 지게를 지고 오르락 내리락 했을 선조들의 노고에 새삼 고개가 숙여졌다. 그렇게 30여 분을 뇌록 산지에 머물며 주상절리와 채석하다 만 돌조각에 아직도 남아 있는 뇌록 흔적을 관찰했다.

포항 뇌록산지에서 채석한 돌에 뇌록 흔적이 남아 있다
 포항 뇌록산지에서 채석한 돌에 뇌록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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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뇌성산에서 바라본 구룡포 바다
 포항 뇌성산에서 바라본 구룡포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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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면서도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이 귀한 문화재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이정표 하나 없는 험한 가시넝쿨 길을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가시넝쿨에 찔려가며 헤매다 보니 다행히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는 길을 찾게 됐다. 팔과 다리 여기저기 가시에 찔린 흔적과 얼굴 곳곳에 모기에 물린 자국이 덕지덕지 했지만 소중한 문화재를 경험하고 내려오는 길은 더없이 상쾌했다.

포항 뇌성산 뇌록산지를 오르는 지역 문화계 인사
 포항 뇌성산 뇌록산지를 오르는 지역 문화계 인사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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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록 산지 출입구인 양계장에 다다르니 마침 경운기를 몰고 있는 주인이 보였다. 그를 보자 묻고 싶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뇌록 산지의 유일한 출입구에 사는 주민 인지라 '아마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필자의 질문에 "삼국 시대부터 뇌록을 채취한 것으로 마을에 전해져 오고 있다"며 "지난해에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있었다. 수백 년을 전해져 내려오던 국내 유일의 뇌록 산지가 왜 이제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을까 하는 것이다.

양계장 주인은 "그동안 포항 지역의 한 학교 교사가 끈질기게 뇌록 산지를 탐구하고, 수 없이 지자체에 건의해 천연기념물 지정까지 오게 된 것"이라며 "그만큼 우리 사회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구룡포 앞바다에는 어느덧 해가 넘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경북 포항 뇌록 산지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뇌성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뇌록 산출지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3년 12월 16일 포항 뇌성산 뇌록산지를 국가 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47호로 지정한 바 있다.

조선 순조 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와 순조 30년 서궐영건도감의궤에는 '장기현으로부터 뇌록을 조달할 것'을 명한 기록이 있다.

뇌록을 구성하는 주 광물은 철분이 풍부한 운모류 광물의 일종인 셀라도나이트다. 현무암 내의 균열을 따라 충진된 상태로 나타나고 충진 두께는 대체로 1~3cm 이하이며, 수mm 이하의 경우도 있다.

문화재청은 "한반도 지각 진화 이해에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는 지질학적 가치와, 조선 시대 단청의 바탕칠에 사용되었던 전통안료 공급지로서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정책 브리핑 참고>




태그:#포항 뇌록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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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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