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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는 사도세자 부부의 무덤인 융릉, B는 정조 부부의 무덤인 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A는 사도세자 부부의 무덤인 융릉, B는 정조 부부의 무덤인 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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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는 두 개의 왕릉이 있다. 하나는 사도세자 부부가 묻힌 융릉이고, 또 하나는 아들 내외인 정조 부부가 묻힌 건릉이다. 두 왕릉은 합쳐서 융건릉으로 통칭되고 있다.

1762년에 죽은 사도세자는 고종 때인 1899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이때 사도세자의 무덤도 왕릉으로 격상되면서, 현륭원이던 종래의 명칭이 융릉으로 바뀌었다. 왕실 무덤에서는 묘(墓)가 가장 낮고 원(園)이 중간이고 능(陵)이 가장 높다. 

방문객에 따라서는, 이곳 융건릉에서 진한 가족애를 느끼는 이도 있을 수 있다. 스물여덟 살에 쌀통(뒤주)에 갇혀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그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친 아들 정조. 이 두 사람이 각자의 아내와 함께 누워 있는 장면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끼는 방문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곳에 묻힌 네 남녀 중에서 한 사람은 '왜 내가 이곳에 누워 있어야 하나?'라며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 속편하게 혼자 묻히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은 바로,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1735~1816년)다. 그는 자기가 사도세자 옆에 누워 있다는 게 끔찍하고 소름끼칠지도 모른다. 

혜경궁, 외척·노론당 이익 침해당할까 '전전긍긍'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가 함께 묻혀 있는 융릉.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가 함께 묻혀 있는 융릉.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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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은 혜경궁에게 그다지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의 친정 식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열 살 때 사도세자와 결혼한 혜경궁은 남편이 보수파(외척+노론당)를 비판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혜경궁 집안인 홍씨 가문이 바로 외척이요 노론당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못마땅했던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아내로 살기보다는 홍봉한의 딸로 사는 쪽을 선택했다. 현재까지 방영된 것을 기준으로 하면, SBS 월화드라마 <비밀의 문>에 나오는 혜경궁은 남편에 대해 좀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남편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혜경궁은 남편이 혹시라도 외척과 노론당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는 홍씨 가문의 스파이 노릇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의 움직임을 친정에 알려주는 첩자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출가(出嫁)한 뒤에도 여전히 내인(內人)이었다.

혜경궁은 1762년에 남편을 쌀통에 가둬 죽이는 데도 일조했다. 아들 이산(훗날의 정조)의 후계자 지위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남편을 죽이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것이다. 또 혜경궁은 아들이 자기 남편을 구명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차단했다. 고립무원에 빠진 사도세자를 구명하고자 세손인 이산이 영조 앞에 달려가 울며불며 간청하자, 혜경궁은 이산을 데리고 궁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도세자 편에 서서 영조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을 궁 안에서 없애버린 것이다.  

 <비밀의 문>의 혜경궁 홍씨(박은빈 연기).
 <비밀의 문>의 혜경궁 홍씨(박은빈 연기).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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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왕이 된 뒤의 행보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정조의 국정 목표 중 하나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이었다. 그 정도로 사도세자는 정조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를 쌀통에 가두는 데에 있어서 어머니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마음은 복잡하고 미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된 뒤에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세력 중에서 핵심 인물들은 모두 죽였다. 심지어는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에게도 사형을 내렸다. 그리고 외가인 홍씨 가문을 사실상 몰락시켜버렸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핵심 인물들에 관한 한, 정조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어머니에 대해서는 어찌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에게 법적 처벌을 가할 수는 없었다. 법적 처벌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뭐라고 따질 수도 없었다.

정조는 어머니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지만, 죽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지만, 정조는 어머니 면전에서 그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정조는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어머니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기로 결심했다. 정조가 왕이 된 지 이듬해인 1777년이었다. 이 해에 정조는 창경궁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어머니를 위한 건물인 자경전을 지었다.

지금의 창경궁에는 자경전 건물은 없지만, 자경전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는 남아 있다. 정조가 하필이면 가장 높은 언덕에 자경전을 지은 이유는, 그곳에서 길 건너편에 어떤 건물이 보이는지를 확인하면 이해할 수 있다.

창경궁 자경전 터에서는, 길 건너편에 있는 서울대병원 뒷마당이 보인다. 그곳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다. 정조는 어머니가 자경전을 출입할 때마다 경모궁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느끼기를 바랐던 것이다.

끊임없이 사도세자를 상기시킨 정조의 의도

 창경궁 자경전 터.
 창경궁 자경전 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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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세자는 남편이자 정적이었다. 또, 비록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혜경궁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동참한 사람이다. 따라서 혜경궁에게 사도세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 사도세자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동시에, 양심의 가책도 느끼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혜경궁이 방문을 열 때마다 사도세자를 생각하도록 기획한 정조의 행동은 혜경궁을 정신적으로 고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고문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환갑잔치도 그런 식으로 기획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화성에서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연 것도 똑같은 취지였다. '어머니, 이런 뜻 깊은 날, 아버지를 생각해보십시오!'라고 정조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마를 타고 화성까지 가는 동안에, 혜경궁은 아들의 의도를 생각하며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겉으로는 미소를 지었겠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혜경궁은 환갑잔치를 한 그 해부터 회고록인 <한중록>을 열심히 집필했다. <한중록>의 주제는 '우리 집안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무관하다. 사도세자는 정신병 때문에 죽었다'라는 것이다. 은근히 자신을 압박하는 아들에 맞서 혜경궁도 은근히 자신을 변호했던 것이다.

 육순잔치에서 축하를 받는 혜경궁 홍씨를 형상화한 밀랍인형. 잔치가 열린 곳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내에 있는 봉수당이다.
 육순잔치에서 축하를 받는 혜경궁 홍씨를 형상화한 밀랍인형. 잔치가 열린 곳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내에 있는 봉수당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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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혜경궁과 정조 모자는 평생 동안 무언의 싸움을 벌였다. 아들은 아닌 척하면서 어머니를 아버지의 굴레에 가두려 했고, 어머니는 모른 척 하면서 그 굴레를 거부했다.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쪽은 아들이었다.

혜경궁은 아들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그늘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들 정조가 죽고 16년 뒤인 1816년 1월 13일 혜경궁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손자인 순조는 혜경궁의 시신을 사도세자의 무덤에 함께 묻어버렸다. 혜경궁이 가장 꺼림칙해하는 곳에 혜경궁을 합장해버린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 무덤에 합장된 혜경궁의 시신

참고로, 대부분의 백과사전이나 논문에는 혜경궁이 1815년 12월 15일에 죽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 사망 일자는 음력으로 순조 15년 12월 15일이다. 이 날짜가 음력이라는 점을 간과하다 보니, 1815년 12월 15일이 사망 일자라고 잘못 기록하게 된 것이다. 순조 15년 12월 15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816년 1월 13일이 된다.

순조가 혜경궁을 사도세자 무덤에 합장한 것은 정조가 남긴 메시지 때문이다. 죽기 11년 전인 1789년에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아버지 왼쪽에 사람 하나를 더 묻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어머니가 묻힐 자리를 마련해둔 것이다.

혜경궁의 무덤은 사도세자 무덤과 전혀 다른 지역에 조성될 수도 있었고, 사도세자 무덤의 바로 옆에 별도로 조성될 수도 있었다. 부부라고 해서 꼭 함께 묻히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의 의도와 관계없이 혜경궁의 무덤이 별도로 조성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조 15년 12월 18일자(양력 1816년 1월 16일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당시의 정부 각료들은 사도세자의 무덤에 담긴 정조의 메시지를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사도세자 옆 자리에 빈 공간을 마련해둔 정조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로 인해 혜경궁의 시신은 사도세자의 무덤에 합장됐다. 이렇게 해서 혜경궁은 생전에 자신이 가장 꺼림칙해 하던 남자와 죽어서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어머니를 아버지의 둘레에 가두고 어머니의 반성과 사과를 받아내려 했던 정조의 의도가 이런 결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의 융건릉에 모셔진 사람들의 이 같은 사연을 고려해보면, 사도세자 옆에 누워 있는 혜경궁의 심경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왜 나까지 이곳에 누워 있어야 하나?'라며 불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곳이 무척 갑갑하고 불편할 것이다. 당장에라도 뛰어나오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곳의 지명은 안녕(安寧)동이지만 혜경궁은 조금도 안녕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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