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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바둑 관련된 영화가 많이 나왔잖아요. 보면서 참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드라마 미생은 달랐습니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잘 담아냈어요."

서울 성동구 홍익동에 위치한 한국기원에서 만난 프로 바둑 기사의 이야기다. <미생>(tvN, 금·토 오후 8시 30분)은 바둑 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 중에도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바둑 사범들의 마음을 열고,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며 연일 호평을 받고 있는 드라마 <미생>의 매력은 무엇일까? 실제 반상 위의 바둑 용어와 이야기를 통해 드라마의 재미와 감동 포인트를 짚어보자.

1989년, 한중일 바둑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응씨배에서 대역전극으로 우승을 차지한 조훈현을 필두로 표정의 변화가 없는 돌부처 승부사 이창호, 톡톡 튀는 성격만큼이나 바둑 스타일도 재기발랄한 이세돌까지. 1980·90년대의 대한민국 바둑은 천하를 호령했다.

최근 이세돌 9단이 중국의 구리 9단과의 10번기 대결에서 승리하며 자존심을 세웠지만, 세계무대에서 대한민국 바둑의 위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장그래(임시완 분)의 꿈속에 등장한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의 모습은 반가움을 넘어선 감동을 주었다.  

시대의 '호구' 장그래, 나와 당신의 이야기 

호구(虎口) /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과 같은 바둑돌의 모양

호구 / 흑돌 1, 3, 5번의 모양이 호랑이의 벌린 입과 닮아있다. 흑돌은 만만한 백돌이 호구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린다.
 호구 / 흑돌 1, 3, 5번의 모양이 호랑이의 벌린 입과 닮아있다. 흑돌은 만만한 백돌이 호구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린다.
ⓒ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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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그래는 호구다. 의지가 약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아직까지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는 낙하산 인턴으로 매일같이 이리 저리 치이기 바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렵다는 사법고시도 한 해 수 백 명을 뽑지만, 프로 바둑 기사는 많아야 10명 남짓이다.

일 년에 10명 정도 선발하는 프로의 문턱에서 아주 아깝게 좌절했다 하더라도, 사회에서 그만큼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이라는 타이틀 달랑 하나인 장그래의 하루 일과는 직장 상사에게 혼나고,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역 회사라는 환경만 다를 뿐,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호구인 장그래와 다르지 않다. 변변치 않은 토익 점수와 대학 타이틀, 소위 잘나가는 스펙을 고루 갖추지 못한 대부분은 취업과 승진을 고민한다. 아는 것이 없어 서럽고,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답답한 장그래의 모습에 백번 공감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사회생활은 '단수' 공격의 연속, 방어만 하는 것도 힘들어

단수(單手) / 상대의 바둑돌을 완전히 둘러싸기 바로 전 상태

단수 / 흑돌이 백돌을 감싸고 있고, 백돌 4가 살 수 있는 길은 한 곳 뿐이다. 흑돌은 백돌을 단수로 끈질기게 공격한다.
 단수 / 흑돌이 백돌을 감싸고 있고, 백돌 4가 살 수 있는 길은 한 곳 뿐이다. 흑돌은 백돌을 단수로 끈질기게 공격한다.
ⓒ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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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디에서 어디로 공격이 들어올지 알 수가 없다. 낌새가 보인다면 미리 준비라도 할 텐데 사회생활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바둑도 마찬가지다. 기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상대의 몇 수를 먼저 읽어가며 대등한 경기를 펼칠 수 있지만 내공의 차이가 있다면 쉴새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방어만 하는 것도 빠듯하다.

프로가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반상 앞에 선다. 그나마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프로 데뷔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장그래처럼 입단 대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언젠가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세상은 그렇게 많은 기회를 제공할 만큼 자비롭지 않다.

제대로 뭐 하나 가르쳐주지도 않고 화만 내는 상사와 고졸 출신이라며 대놓고 무시하는 동료들 속에서 장그래는 외롭다. 그래도 싸워야 하고, 살아남아야만 한다. 상대가 나에게 단수 공격을 걸어오더라도 너무 당황하거나 겁먹지는 말자. 바둑에서든 사회에서든 단수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호구'인 줄 알았지? '환격'으로 반전을 준비하다

환격 (還擊) / 자기 돌을 일부러 호구 속에 집어 넣어주고 바로 다시 상대방 돌을 잡는 방법

환격  / 흑돌 호구 자리에 일부러 백돌 14는 들어간다. 흑은 흑돌 15로 백돌을 잡지만, 백은 바로 백돌 16으로 흑돌 3점을 얻는다.
 환격 / 흑돌 호구 자리에 일부러 백돌 14는 들어간다. 흑은 흑돌 15로 백돌을 잡지만, 백은 바로 백돌 16으로 흑돌 3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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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의 장그래의 기억력은 남다르다. 무역사전을 며칠 만에 외우기도 하고,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머릿속에 담아 놓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프로를 준비하는 연구생이라면 수많은 기보를 접하고, 변화무쌍한 바둑  돌의 움직임을 모두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바둑 대국을 하면서 환격 기술을 펼칠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일부러 상대의 호구 속에 들어갔다가, 잡으러 들어오면 하나를 내어주고 나머지를 취하는 일종의 유인책이기 때문이다. 호구인 줄 알고 잡으러 오는 상대가 환격에 오히려 크게 당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칼이 있다(바둑계에서는 숨겨진 실력, 또는 비장의 무기를 뜻한다). 상사가 무시하고 동료들이 견제해도 나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온다. 분명한 건 기회도 준비하고 있는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시기와 질투를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며 장그래는 오늘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다.

지금은 '미생', 묵묵히 '완생'을 준비 한다

미생(未生) / 집이 아직 살아있지 않은 상태 혹은 그 바둑돌

미생이 완전히 죽은 돌인 사석(死石)과 다른 점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서 바둑 1인자의 전성기는 10년 남짓으로 유난히 길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이 바둑의 꽃을 피우는 시기라고는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풍이 더 강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세계대회에서 주춤하는 사이 대한민국 바둑의 위상이 흔들린 것은 사실이지만, 박정환과 김지석 같은 새로운 얼굴들이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흔히 바둑은 내 돌로 집을 만들어 상대방의 돌을 감싸 누가 더 많이 따내는가의 싸움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바둑은 내 집을 만들어서 얼마만큼 견고하게 잘 지켜내느냐의 싸움에 더 가깝다. 아직은 미생이지만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사활을 걸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장그래와 우리들의 완생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hstyle84)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미생 드라마, #미생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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