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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술집 출입문에 적힌 '낮술 환영'
 어느 술집 출입문에 적힌 '낮술 환영'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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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로 끝나는 말은>이라는 동요가 있다.

"리리리자로 끝나는 말은 괴나리, 보따리, 댑싸리, 소쿠리, 유리항아리… 리리리자로 끝나는 말은 꾀꼬리, 목소리, 개나리, 울타리, 오리 한 마리…."

'낮'자로 시작되는 말은 뭐가 있을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로는 이런 게 있다. 낮잠, 낮달, 낮술, 낮거리…. '잠'이나 '달'이나 '술'은 모두 저녁이나 밤에 어울린다. 그것과 구분하려고 굳이 '낮'을 앞에 덧댄 것이다. 마치 숫처녀, 숫총각처럼….

잠은 늦은 저녁이나 밤에 자야 제맛이다. 달도 밤하늘에 두둥실 떠올라야 그 고운 자태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술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럼 낮거리는? 이 말의 뜻이 궁금하면 짬이 생기는 대로 각자 알아서 스마트폰을 노크해 볼 일이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

안도현 시인이 쓴 <퇴근길>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다. 바로 그거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저녁 어스름이 밀려오면 거의 모든 술꾼들의 속은 헛헛해진다. 한잔 생각이 제일 간절한 이가 '번개'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작당을 시작한다. 온갖 '껀수'를 만들어서 주변의 술꾼들을 긁어모으는 것이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참새가 어디 있던가. 의기가 투합된 술꾼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삼겹살집으로 들어선다. 바야흐로 술꾼들의 마음을 마냥 설레게 하는, '술시'다.

'술시'에 시작된 술자리는 대개 자정 무렵까지 차수를 바꿔가며 이어진다. 마신 술병의 수든 차수든 홀수로 가야 제맛이라는 술꾼도 있다. 자정도 되기 전에 끝나는 술자리는 무효라고 억지를 부리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들은 노래방으로 차수만 늘리는 술꾼은 아예 '초짜하수'로 친다. 악을 써가며 노래를 부르면 애써 마신 술이 다 깨기 때문에 반칙이라는 것이다.

낮술은 모름지기 왁자하게 웃고 떠들면서 마시지 않는 법

술은 뭐니뭐니해도 낮술이라는 술꾼들 또한 적지 않다. 기원을 따지자면 낮술은 새참과 함께 내온 '농주(農酒)'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꼭두새벽부터 들일을 하느라 고단해진 몸을 시원한 막걸리 한두 사발로 풀어내기 시작했던 게 바로 오늘날 일부 술꾼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낮술'의 시초였으리라. 

낮술은 반드시 점심식사와 더불어 시작해서 해가 지기 전에 끝내는 것이 원칙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술꾼이 의외로 많다. 초저녁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는 이들도 물론 있다. 낮에 마시는 술이라고 모두 낮술인 것은 물론 아니다. '술시'에 마시는 술과 달리 낮술은 낯가림이 좀 심하다. 때와 장소와 주종을 퍽도 가리는 게 낮술이다. 

우선 하늘이 천장 높이로 낮게 내려앉았다 싶은 날씨여야 한다. 천둥번개가 야단법석을 떨면서 굵은 빗줄기를 퍼부어대는 날은 낮술에 적합하지 않다. 아침부터, 혹은 점심 무렵부터 가랑비든 이슬비든 보슬비가 거리를 초작초작 적시는 그런 날이어야 낮술로 제격이다.

그런 날 열일을 작파하고 근처의 시장골목으로 은근슬쩍 발걸음이 가는 데서 낮술은 시작된다. 재래식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후덕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즉석에서 부쳐내는 해물파전에 막걸리를 들이켠 다음 손등으로 입가를 닦을 줄 알아야 한다. 돼지 머리고기나 순댓국을 안주 삼아 소주를 곁들이는 것도 낮술로는 손색이 없다.

낮술에 취하면 제 부모조차 못 알아본다는 말도 있기는 하다. 이 땅의 수많은 '잘난' 이들을 안주 삼다 보면 감정이 격해지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는 술꾼도 더러 있긴 하지만, 낮술은 모름지기 왁자하게 웃고 떠들면서 마시지 않는 법이다. 정겨운 이와 마주 앉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나눠 밟으며 조용히 술잔을 비울 줄 알아야 한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서 얼굴이 불콰해질 무렵까지 창밖으로 가는 빗줄기가 보인다면 금상첨화다.

술집 창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시련의 아픔을 삭이는 여인의 눈물처럼 애잔해 보여야 낮술은 비로소 온몸에 젖어드는 법이다. 그림처럼 출입문에 '낮술 환영'이라고 적어 붙인 '쥔장'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정겹다. 그 또한 낮술의 정취를 제대로 알고 있으리라.


태그:#술 , #낮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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