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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금오산

 

장백산맥은 만주대륙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치닫고 있다. 그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백두산이요, 그 백두산에서 남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줄기가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은 마천령산맥, 낭림산맥으로 이어져 동해안을 따라 태백산맥으로 이어 내려 줄곧 한반도 남단 끝머리 부산까지 치닫고 있다.

 

그러면서 백두대간은 강원도 끝자락인 도계 장성에 이르러 주능선 태백산맥이 다시 소백산맥으로 나뉘어 서쪽으로 기울어 호남의 심장부인 지리산에 이르고 있다. 태백산에서 뻗어 내린 소백산맥의 줄기가 주홀산, 속리산, 추풍령을 지나 김천 황학산에서 한 발 동으로 훌쩍 건너 뛰어 우뚝 솟은 산이 금오산(金烏山)이다.

 

이 금오산은 구미와 김천, 칠곡 세 지방에 똬리를 틀 듯 주저앉아 예로부터 이 지방 사람들의 영산(靈山)으로 받들어져 왔을 뿐 아니라, 그네들에게 먹을거리와 땔감을 제공해준 삶의 터전이었다. 금오산은 경상북도 서남쪽에 있는 해발 976미터로 그리 높지 않으나, 그 위용과 준엄한 자태가 빼어나다. 이 산은 그 경관이 빼어난 영남팔경(嶺南八景)의 하나로, 골짜기마다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또 산봉우리가 웅장한 기상이 넘쳐 예로부터 '남숭산(南嵩山)'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경치가 아름다워 '소금강(小金剛)'으로도 불리고 있다. '금오산(金烏山)'이란 이름의 유래는 아득한 옛날 이 산 멧부리로 금빛까마귀가 날아갔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금오산 주봉인 현월봉(懸月峰)과 약사봉(藥師峰), 보봉(普峰)이 구미 시가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왕산 허위의 탄생

 

김해에 살았던 허돈(許暾, 1753~1815)은 돛단배로 김해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던 가운데 금오산 일대 산수에 반한 나머지 구미 임은동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구미 임은허씨 집안에서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증손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평리원 재판장(오늘의 대법원장),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오르는가 하면, 13도창의군 군사장으로 그 이름을 나라 안팎에 떨쳤다.

 

1855년에 태어난 왕산 허위는 맏형 방산(舫山) 허훈(許薰)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8세 때에 시문을 지어 언저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달이 대장군이 되니(月爲大將軍)

별은 많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星爲萬兵隨)

 

이에 집안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장차 크게 될 인물로 기대하였다.

 

꽃을 꺾으니 봄이 손에 있고(折花春在水)

물을 길으니 달이 집에 들어온다(汲水月入家)

 

이런 시를 지어 더욱 집안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왕산은 사서삼경뿐 아니라 천문 지리, 육도삼략과 같은 병서도 익혔다. 그를 가르치던 방산은 "유학에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만,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허위는 인간적인 포부와 경륜, 그리고 그릇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산의병대 참모장이 되다

 

왕산 허위는 15세 때 순천 박(朴)씨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곧 부인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24세에 평산 신(申)씨와 다시 혼인하여 4남2녀를 두었다. 18세에 어머니를, 27세에는 아버지를 여읜 뒤 10여 년 동안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며 학문에 힘쓰다가, 시국이 어려워지자 의연히 창의(倡義)의 대열에 앞장섰다.

 

1894년 갑오년, 왕산 허위는 마침내 붓을 던지고 구국대열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인 1895년 10월, 국모 명성황후가 일제 낭인들의 손에 무참히 시해 당하고, 11월에 단발령이 반포되어 민족의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입었다. 이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3월, 왕산 허위는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贊)·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 이웃 지사들과 뜻을 모아 항일의 깃발을 올렸다. 그해 3월 26일 장날에 맞추어 김천 읍네로 들어가서 수백 명의 장정들을 규합하여, 이기찬은 의병대장, 허위는 참모장이 되었다. '김산의병대'라고 불리는 이 의병대는 이후 충북 진천까지 올라갔으나 고종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해산했다.      

 

이 의병대 해산 후 왕산은 다시 학문을 연마하던 가운데, 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섰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왕산은 성균관박사, 중추원의관, 평리원재판장, 의정부 참찬, 칙임 비서원승 등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지위에까지 올랐다.

 

1904년 일본은 한국 침략을 독점하고자 러일전쟁을 도발했다. 그런 뒤 그해 2월 23일에는 조선정부(대한제국)에게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함으로써, 그들은 한국 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런 사태에 이르자, 왕산은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 등의 관료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의 분발을 촉구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여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지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오만은 꺾일 것이다.

 

…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고리를 부숴 칼을 만들고 …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를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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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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