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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마주하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긴 한숨을 내쉬어본다. 그리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제 얼마 후면 담뱃값도 오르고, 그때쯤이면 나는 또 다른 세상에 있을 것이다.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한동안 이곳에 남겨질 그녀 때문이다. 비통한 가슴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몇 자 적어본다.

국경에 서서 전하다

엄마, 잘 지내지?

단풍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어. 큰 결정을 앞에 두고 보니,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찾게 되네.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혹시 나중에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상실과 고독을 한꺼번에 느낄까 봐 걱정이 좀 돼서.

엄마한테 처음 스마트폰을 사주던 그날을 난 아직도 기억해. 손주들의 사진이 너무 작게 보인다고, 큰 화면이면 좋겠다던 엄마의 흐려지던 말끝은 내심 스마트폰에 닿아있었지. 엄마는 극구 싼 기종을 원했지만, 사실 36개월 할부라서 큰 부담은 없어.

그동안 메신저를 통해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정든 이곳을 떠나야 할때다.
▲ 엄마와의 메신저 대화 그동안 메신저를 통해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정든 이곳을 떠나야 할때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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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받아 쥐고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엄마의 모습, 그리고 이제 이웃 아주머니들과 메신저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그 모습들이 아직도 선해. 그때야 비로소 내가 자식 노릇 제대로 했구나, 하고 느꼈으니까.

전 국민의 메신저라는, 노란 바탕에 까만 말풍선 메신저를 통해 우리는 예전답지 않게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 아들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무뚝뚝하잖아. 그래도 메신저 상에서는 애교도 부리고, 손주들 노는 사진들도 보내주고, 그러면서 모자간의 정을 확인할 수 있었지. 엄마가 이렇게 스마트폰을 잘 사용할 줄은 몰랐어. 복사하기 기능을 통해 신종 사기 수법에 조심하라고 대화를 보내왔을 때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어. 아직도 내가 엄마 품에 있다는 따뜻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엄마. 한동안은 이런 만남이 힘들 것 같아. 나는 이제 그곳을 떠나려 해. 우리만의 공간, 우리만의 추억을 쌓는 장소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엄마도 궁금할 테지. 쉽게 한 번 설명해 볼게.

지난 추석 때, 아파트 현관 앞 화단에 무성하게 열매 맺은 대추나무를 보면서 했던 말 기억나? "대추를 뭐 하러 사다 써, 여기서 몇 개 따서 쓰지" 그랬더니 엄마가 말했지. "야, 그거 다 주인이 있는겨, 노인네가 자기가 물주고 비료 줬다고 자기 꺼라고 얼마나 눈 무섭게 뜨고 감시하는디…."

공공주택 화단에 열매 맺은 나무를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김씨 할머니를 두고 우리는 메신저로 많은 흉을 보았었지. 그런데 만에 하나, 엄마가 이웃 아주머니들한테 흉보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 얘기가 김 할머니한테 전해지면, 우리의 메신저는 검열을 받을 수 있어. 우리의 행위는 김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되거든. 더구나 자식들 중에 검찰 관계자라도 있다면 그건 백발백중이야.

더구나 김 할머니가 고소 고발을 하지 않아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검찰은 선제적 수사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해. 김 할머니는 가만히 있어도 엄마와 나의 대화가 담긴 메신저는 검열 당할 수 있는 거야. 물론, 그런 정의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에 대해 한편으로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어. 바닥부터 훑어서 불순의 씨앗을 말리겠다는 검찰의 의지는 존경받아 마땅하지. 우리 같은 서민들이야 무슨 피해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아. 김씨할머니가 근거 없이 우기는 데는 뒤에 무언가 막강한 권력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해.

비겁한 중생의 사이버 망명기

엄마, 그렇다고 이런 결정을 내리기가 쉬웠다는 건 아니야. 노란 메신저에는 그동안 정들었던 400여 명의 소중한 친구들이 남아 있어. 그리고 거기에 적던 나의 스토리들은 더없이 행복했던 기억들이야. 하지만 그렇게 정들었던 그곳을 대변한다는 법률대리인의 글은 나를 더욱 처참하게 만들고,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이 글을 쓴 변호사는 지난 10일 직을 사임했어).

"자신의 집에 영장 집행이 와도 거부할 용기가 없는 중생들이면서, 나약한 인터넷 사업자에 돌을 던지는 비겁자들"이라는 글을 SNS에 남겼더라고. 맞아, 나는 영장 집행이 오면 그걸 거부할 용기가 없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야.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에 맞서 싸우지 못하는 비겁자인 셈이지. 그렇기 때문에 30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나약하고 영세한 인터넷 사업자에게 돌을 던질 생각은 없어. (그 돌을 맞는다고 정신 차릴 사람들이 아니니까. 맘 같아서는 방파제에 쓰는 테트라포드(다리 4개 달린 콘크리트 블록)라도 던져주고 싶지만 말야) 그래서 그냥 말없이 돌아서는 거야.

마침내 사이버 망명에 성공하다!
▲ 텔레그램 업데이트 마침내 사이버 망명에 성공하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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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알겠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 말씀,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였어. 가만히 있으라면 끝까지 움직이지 않고, 윗사람들의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들어야한다고 생각했지. 지금도 그 생각에 큰 차이는 없어. 국가 기관이 검열하겠다는데, 고분고분 말 잘 듣고 협조하는 게 국민의 마땅한 의무니까. 다만, 일기장 같은 메신저를 남이 들여다보는 게 부끄러울 뿐이야.

엄마, 이제 나는 망명의 길에 올라.

새로 시작하는 이국땅의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겠지. 엄마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남아 있는 이곳이 그리울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먼저 간 동지들이 반겨주고 이끌어줄 테니까 크게 겁나지는 않아. 적어도 그곳의 공기는 훨씬 더 가볍고 자유로울 테니. 먼저 가서 자리 잡는 대로 모시러 올게. 엄마도 당분간은 다른 사람 흉보는 글 같은 거 절대 올리지 말고, 몸 사리고 있어. 그때까지는 김씨 할머니와도 좋은 관계 유지하길 바라.

추신. 고속도로 통행료가 오른다 해서 앞으로는 집에 자주 못 갈 것 같아. 가더라도 국도로 가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손주들 사진은 앞으로 현상해서 우편으로 보내줄게. 그럼, 이만.


태그:#사이버 망명, #사이버 검열, #텔레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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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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