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관련사진보기


공포의 어느 날 밤이었다.

동네 전체가 깊은 잠에 떨어진 시간에 낯선 손님이 소리 없이 이소선네 방으로 찾아들었다. 인기척에 전깃불을 켠 이소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국에 수배가 떨어지고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장기표가 이소선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이소선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는 잡히는 즉시 사형을 당할 사람이다. 사형이 아니라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평생을 지옥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사형이든 무기징역이든 그가 경찰에 잡히는 순간부터 이소선은 영원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표는 전태일 사건이 났을 때, 그 사건을 학생운동과 결합시키기 위한 투쟁을 했던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전태일 사건 이후로도 그는 학생운동과 관련해서 늘 쫓겨 다니거나 구류를 살았다. 1972년 5월에는 소위 '국가내란음모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사건에 관계되어 구속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었던 탓에 결국 재판이 흐지부지되어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나왔다.

이처럼 구속·구류·수배의 연속에서도 그는 청계피복노조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밖에서 이소선과 조합 간부들을 만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고 문제가 생기면 토론을 통해 이견을 좁혀나갔다. 사용주들 세금투쟁 때 "노동조합끼리 똘똘 뭉쳐 투쟁에 임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하거나, 한영섬유의 김진수 사건이 났을 때 이소선에게 그 사건의 내막을 알려주면서 "김진수 어머니와 함께 싸워야 한다"고 부추긴 사람도 장기표였다.

처음에 이소선은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이 뭔가 옳기는 옳은 듯싶었으나 우리 같이 못 배운 사람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정치색을 띤 수준 높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이 차원이 다른 내용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나 서민의 문제를 가지고도 함께 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장기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우수한 두뇌로 일류대학의 일류학과를 나왔다.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지만 일찌감치 그런 것을 다 때려치우고, 불의와 맞서 투쟁하기 위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소선은 그가 고난의 길을 택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는 전태일이 죽었을 때 명동의 삼일다방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가끔 만난 사이였다. 수배를 당했을 때는 지금처럼 경찰의 눈을 피해 이소선의 집에 찾아오기도 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소선이 놀란 가슴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그가 입을 뗀다.

"어머니가 방을 하나 얻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일이라도 좋으니 빨리 얻어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 종인이, 승철이, 승조가 눈치 채지 못하게끔 나직했다.

"갑자기 방을 어떻게 얻어?"
"어머니가 어디 아는 데 가서 얻을 수 없겠소?"
"알았어. 내가 한번 알아보고 얻어 볼게."

그는 안도가 되는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당부하듯이 말문을 이었다.

"어머니, 저 방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도록 하고 어머니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았어."

1985년 9월 8일, 청계피복노조 대의원 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장기표씨의 모습
 1985년 9월 8일, 청계피복노조 대의원 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장기표씨의 모습
ⓒ 민종덕

관련사진보기


그는 이소선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창문을 넘어서 공동묘지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잘 가라는 인사말도 듣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소선은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적셨다. 이소선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지금 어둠을 가르고 사라지는 그의 안전과 건강을 기원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고 언젠가는 이 짙은 어둠을 이기는 빛이 되리라는 믿음을 되새겨 보았다

이소선은 이리저리 궁리하기 시작했다.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을 당장 어디 가서 어떻게 얻어야 할까? 고민 끝에 방학동에 살고 있는 집사님의 방을 생각해냈다. 자신도 집사니까 같은 교회의 집사로서 사정을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이튿날 일찌감치 그 집사님 댁으로 찾아갔다.

"집사님, 대구에 사는 우리 조카가 공무원시험을 봐야 한다면서 고모인 나한테 방 하나만 얻어달라고 해서 왔는데, 방이 있으면 하나 빌려줄 수 없겠소? 시험만 끝나면 내려간다고 하니까 집사님 네 학생이 쓰는 방을 좀 빌려주면 좋겠는데요."

그 집사님은 이리저리 얘기한 끝에 보증금을 안 주는 대신 월세를 꽤 많이 주겠다고 하니까  솔깃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의 남편이 공사판에 다니는 탓으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소선이 돈을 갖다 주면서 한 달을 살든 두 달을 살든 하여튼 공무원시험만 보면 방을 비워주겠다는 조건으로 장기표는 그 집에 이사해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이사를 들어가기는 했는데 사방이 경찰과 방범대원으로 완전히 포위되다시피 해서 위험천만이었다. 하루는 수배전단 하나가 그 집 담벼락에 붙었다. 전단에는 장기표의 사진과 인적사항도 똑똑히 적혀있고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이소선은 불안해서 장기표에게 말했다.

"이 집 담벼락에 형 잡는다는 종이가 붙어 있어!"

이소선은 장기표를 '형'이라고 부른다. 최종인이나 이승철 등 전태일 친구들이 그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마땅한 호칭이 없어 그대로 따라 부른 것이다.

"나도 알아요."
"어떻게 도망가야 하잖아?"

이소선은 숨을 죽여 말했다.

"지금은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떡해?"
"나도 그 종이를 봤는데, 아는 사람이 똑똑히 들여다보면 누구라고 알아볼지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거요."

그는 별로 초조해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머니 조카라고 했기 때문에 전씨인지 알겠지요."

여전히 문 밖에서는 경찰과 방범대원들이 길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나가지 마시고 이따가 어두워지면 나가세요."

그가 시키는 대로 이소선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