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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자신이 ‘용자’라며 엄지를 치켜세우시며 이야기를 시작 하신다. 할머니의 연세는 올해로 103세가 되셨다.
▲ 지팡이를 움켜쥐고 앉아계신 할머니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자신이 ‘용자’라며 엄지를 치켜세우시며 이야기를 시작 하신다. 할머니의 연세는 올해로 103세가 되셨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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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첫 번째 눈물

인천 송림동에서 만난 김순자(가명, 103세) 할머니. 매일 오후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언덕길에 혼자 나와 멀리 하늘을 쳐다보며 앉아 계셨다. 할머니는 혼자 사신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나는 이 곳을 지날 때면 매번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가끔은 할머니 옆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착한 시누이와 못된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웃지 못할 싸움 이야기를 적절한 재현과 구수한 욕을 버무려서 생생히 들려주시기도 했다.

할머니와의 대화는 대부분 시집살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시절 어머님들이 그렇듯이, 할머니 또한 시집살이는 삶의 전부였고 투쟁이었다. 뵐 때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긴 했지만,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구체적으로 이야기의 그림이 풍부해지기도 하고, 덩그러니 밑그림만 그린 이야기로 멈추시기도 했다.

몇 주간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인사드리기를 포기하고, 송림동 윗동네에서 '아트평상'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보니, 할머니께서 계신 아랫동네에는 한동안 뜸하게 되었다.

평상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고, 마을신문이 1호가 발행되어서야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대뜸 "누구셔?" 물어보는 것이다. 이에, "할머니, 저 기억 못하세요? 얼마 전까지 여기 자주 와서 얘기하고 그랬었잖아요. 지나가면서 인사도 자주 드렸고요." 호소하듯 얘기했지만, 전혀 기억에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며 모른다고 잡아 떼셨다.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께서 기억을 잘 못하시나보다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섭섭함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그 이후로 할머니를 뵈러 가던 발걸음은 더욱 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걸음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웬만해선 나오시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겨우 걷고 있는 할머니께 냉큼 달려가서 부축이라도 하려는 듯 엉성하게 손을 뻗었다. 나의 그런 어색한 몸짓에도 이마 밑으로 웃음기를 머금으시며 반색해주었다.

심심해서 산책삼아 걸어보려고 나왔다 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나를 기억해주고 계셨다. 그땐 왜 나를 모르는 척 하신 걸까. 어쩌면 할머니 또한 내게 서운함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새로 나온 '마을신문 2호'가 있었다. 이를 보여드리면서 윗동네 이야기를 해드렸다. 나는 할머니의 눈물을 그때 처음 보았다. 주름진 눈가로 이슬처럼 똑똑 떨어지는 눈물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할머니께서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반복해 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이런 것을 자기에게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눈물을 훔치신 후, 지팡이를 짚고 느린 걸음으로 돌아가시는 뒷모습을 멀뚱히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박명자(가명) 할머니는 80세를 넘으셨다. 하지만 이순자(가명/103세) 할머니는 그런 할머니를 딸처럼 여기신다. 해질녘이면 집 앞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절친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날아와서 손등에 앉자, 활짝 웃음 짓고 계시다.
▲ 할머니 손등에 앉은 잠자리 박명자(가명) 할머니는 80세를 넘으셨다. 하지만 이순자(가명/103세) 할머니는 그런 할머니를 딸처럼 여기신다. 해질녘이면 집 앞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는 절친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날아와서 손등에 앉자, 활짝 웃음 짓고 계시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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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두 번째 눈물

9월 13일은 마을에서 행사가 있었다. 행사 역시, 윗동네 평상을 무대로 이루어졌다. 할머니께서 행사장까지 오시기에는 높은 오르막과 계단이 너무 많았다. 그래선지 "이 늙은이가 그런디 가서 뭐해"라고 하시며, 초대에 좀처럼 응하시질 않으셨다.

못 오시는 할머니를 위해 음식을 갖다드리자는 의견이 작가들 사이에서 나왔다. 선배 작가들이 손수 가득 담은 접시를 들었다. 빈대떡 두 장에 방울토마토 두 움큼, 할머니께서 좋아할 만한 과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접시를 들고서 할머니께로 향했다.

할머니는 음식을 받자말자 "아니 뭐 이런 걸 다 줘?"라고 말씀하시며 휘둥글게 놀란 눈동자를 하셨다. 구구절절 행사 얘기를 하면서 함께 나눠먹을 음식이라고 말씀을 드리는데, 뚝뚝… 눈물이 음식 위로 커다랗게 떨어졌다. 할머니께선 "내가 뭘 해줬다고 이렇게 음식을 갖다 줘, 고마워, 고마워…"라고 말씀을 그날도 반복해 하셨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선배 작가들이 준비한 음식들을 막내 작가로서 심부름 차 조금 갖고 왔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이런 소소한 관심과 인연에 깊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혼자서 먼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지만, 할머니께선 매번 혼자만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요양보호사가 오간다고 했다. 또 옆집 할아버지와 가끔 심심풀이로 술 한 잔씩 주고받기도 했다. 옆집 아주머니들도 할머니께서 잘 계신지 보러오곤 했다. 할머니의 외로움을 마을에서 작게나마 완화시켜주고 있었던 셈이다.

마을행사가 있었던 날, 원경남 할아버지께서 틈만나면 작가팀이 준비한 촛불을 들고 있다.
▲ 마을의 촛불 마을행사가 있었던 날, 원경남 할아버지께서 틈만나면 작가팀이 준비한 촛불을 들고 있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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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의미

할머니께서 흘렸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지만, 정작 내게는 슬픈 눈물로 느껴졌다. 왜 그런 걸까. 그건 아마도 나를 키워주고 길러주었던 외할머니에 대한 후회 때문일 것이다.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되기 싫어 하셨던 외할머니 또한 평생을 살아오신 집에서 혼자 기거하기를 고집하셨다. 틈틈이 어머니께서 할머니를 챙기셨다지만, 정작 20년을 길러준 손자 놈은 서울로 대학을 간 이후로 전화 한통 없었다. 가끔 명절 때나 고향 땅을 밟은 겸, 할머니를 뵈러 갔을 뿐이다.

더 자주 찾아뵙고 더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후회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 누워계신 할머니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책상 위에 두고 있다.

마을에서 오며가며 할머니께 안부를 묻고, 때론 곁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그런 후회와 아쉬움이 겹치기 때문은 아닐까. 마을사람 모두에게 그 풍경은 단순히 타인이 앉아있는 무색무취한 풍경은 절대 아닐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외로움은 쉽게 채워질 수 없는 깊은 우물과도 같다. 마을의 따뜻한 품으로 할머니를 감싸 안아주고 정을 나누는 일만이, 할머니와 마을을 아름답게 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김순자 할머니의 남은 여생이 사랑으로 넘쳐나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blog.naver.com/touchpaint)와 10월 27일 발행되는 틈만나면 송림동편 마을신문 3호(인천문화재단 지원)에도 기재합니다.



태그:#송림동, #틈만나면, #노인복지, #마을, #공동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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