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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광주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임정엽) 심리로 열린 세월호 선원 28차 공판에선 유족과 생존자 등 16명이 마지막으로 피해자 진술을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진행중이란 걸 알려준다. <오마이뉴스>는 이 가운데 몇몇 발언을 가감없이 소개한다. [편집자말]
세월호 참사 48일째인 6월2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하는 종이 매달려 있다.(자료사진)
▲ '바람으로 오소서' 세월호 참사 48일째인 6월2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하는 종이 매달려 있다.(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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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으로 서기까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아직도 남편을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 때문에 준비해온 내용을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반년 넘게 겪은 슬픔과 원통함, 앞으로의 고통,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남편은 못하는 게 없는 체육교사였습니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바다에 익숙했고 인명구조에 능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도 잘하는 사람이 왜 나오지 못했을까'하며 위로해주더라고요. 정말 제 남편은 아직도 왜 차가운 바다에서 못 나오는 걸까요.

(수학여행) 떠나는 날 아침이 마지막이었는데,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한 것이 아직도 가슴이 아립니다. 사고가 있던 날, 배 침몰 소식을 뉴스로 접했습니다. 구명조끼 입고 바다로 뛰어들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원 구조 소식 들었지만 (그의) 책임감 있는 성격 때문에 걱정됐습니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진도로 가는 길에 함평천지휴게소를 지날 때쯤 진도에 먼저 와 계신 아버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가망이 없다'고.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간 남편을 찾으면서 시신이 들어올 때는 남편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이후에는 남편이길 바랐습니다. 형체라도 온전해서 손잡고 인사라도 할 수 있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꺼내주지도 못했지만, 마지막 고통이 없길 빌었습니다. 이제는 남편의 뼛조각이라도 찾아내 어린 아들들에게 아빠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지금도 남편은 깊은 바다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팔순 가까운 시어머니는 아직 아들의 죽음을 모릅니다. 시신을 찾아 장례 치를 때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어머니가) 막내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저희에겐 9살과 7살, 두 아들이 있습니다. 이제 가족이 함께 놀이동산에 가는 평범한 일상은 없겠죠. 아이들이 '너네 아빠 죽었어, 살었어'라는 질문 받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나중에 하늘나라 가면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제 모습에도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오래 자리를 비울 때마다 아이들은 저마저 사라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지난 4월 16일 이후 팽목항에서 시신이 수습되면서 (사람들 신분이) 실종자 가족에서 사망자 가족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직 못 찾은 사람들은) 가족을 찾은 이들에게 축하인사를 했고, 떠나는 가족은 미안해했습니다. 7월 18일 이후에는 더 이상 수습된 시신도 없습니다. 진도에서 실종자가 줄어들 때마다 내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젠 찾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지금도 수색이 시작된다는 문자가 오면 가슴을 졸입니다. 혹시나 이번에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까 간절히 기다립니다.

"몸보다 마음을 스치는 바람에 아프다"

진도에는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그만 좀 하라는 냉정한 시선, 민생경제를 세월호 탓으로 돌리고 실종자들이 떨어져 나가길 바라는 정부. 몸을 스치는 바람보다 마음을 스치는 바람에 아픕니다. 뇌종양이 있는 한 어머니는 수술까지 미루고 있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직도 실종자를 걱정해주는 분들이 있기에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딥니다.

많은 분들은 진상규명으로 세월호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선장이나 선원들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을 부인한다고 들었습니다. 퇴선명령만 있었다면 남편은 아이들과 살아 돌아왔을 겁니다. 

물론 교사의 본분을 지킨 남편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아빠는 형이랑 누나들 구하다가 못 나왔다'는 제 설명에 7살 아들이 물어봅니다. '운전한 아저씨는 나왔어? 왜 아빠와 형, 누나들은 못 나왔어?'라고…. 도대체 그들은 뭘 했을까요. 짐승만도 못한 저들이….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도 호사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은 선장과 선원, 해경이 (우리가) 참사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달라고 요구하러 왔습니다.

저는 저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주변의 부러움을 받는 예쁜 사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개를 들고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기가, 그들과 얼굴 마주치기가 두렵습니다. 차디찬 바다에 남편을 두고 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시기한 하늘의 장난이었을까요. (재판부와 검찰이) 꼭 (진실을) 밝혀주시리라 믿습니다.

가족의 시신을 찾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유족,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든 남편을 찾아 차가운 바다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냐고, 정말 사랑했다고 말한 뒤 마음 놓고 펑펑 울고 싶습니다. 두 아들에게 누구보다 용감하고 훌륭한 아빠 모습을 이야기하며 마지막으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밖에 못하는 현실이 너무 슬픕니다. 모든 실종자들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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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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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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