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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한국군에게 월남전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한국보다 더 가난하고 후진적인 월남과 보다 물자가 풍부하고 선진적이고 미국 사이에서 겪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월남에는 적과 동지가 있었고 한국군의 물주인 미국에서는 감시와 후원을 받아야 했다. 월남과 미국 사이에서 비록 병력은 5만 정도 군단 수준이었지만 넓고 큰 세계가 있어서 사령관이라고 해도 전체를 알 수 없고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 아니면 전혀 알 수가 없는 일들이 무수하게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참전의 경험이 있는 이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놀랄만한 일들이 많은 것이다. 전반적으로 한국군으로서는 믿을 수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월남과의 사이에서 보다는 미국과의 사이에서 많이 벌어졌다.

80 년대 젊은 대학생들의 필독서이었던 이영희 교수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최초로 월남전에 관한 흑과 백의 이분법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비로소 베트남전을 '이성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정권에 의해서 금서가 된 이 책에서 베트남전 개입은 공식적으로는 월남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미국에 '월남전 카드'를 제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승인을 받기 위해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해서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먼저 밝혔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전면 철수,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던 케네디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케네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달라스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후임 존슨 정부는 1964년 봄부터 베트남 전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최대 54만 명까지 병력을 늘리는 한계에 도달하자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청했다. 여기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나라는 한국과 태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한국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1965년 5월 16일 박 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다시 미국을 방문 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들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낸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 가난한 한국은 대통령 전용기가 없었지만, 미국 대통령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전용기를 이 작은 나라에 보낸 것은 드문 사례였다. 그만큼 당시 베트남 전쟁의 뻘 밭에 빠진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다음날 워싱톤에 도착한 박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영접한 존슨 대통령은 큰 리무진에 동승해 영빈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3만 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앞차에는 양국 정상이, 뒷 차에는 양국 영부인이 타고 21대의 모터사이클이 선도하는 행렬이었다. 이날 오후 5시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틀 후 뉴욕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번화가인 브로드웨이를 지나가는 동안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들이 눈처럼 쏟아졌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융숭한 대접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그러나 월남은 힘을 가진 놈들끼리 서로 정권을 강탈하는 곳이었다.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도둑놈 투성이었기 때문에 그 탓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 없는 민중들뿐이었다. 미국은 월남전을 핑계로 군수산업이라도 일으켰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아쉬울 일이 없는 한국군이 하는 일도 도둑질뿐이었다. 군대 안에서 상납을 하는 풍토가 고질화된 것도 월남전 참전 이후부터라고 하니 월남전이 한국군을 얼마나 병들게 했는가 하는 점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내사 겪은 것처럼 때가 되면 일등병이 상병으로 자동적으로 진급이 되는 것-월급은 어차피 미군이 주는 것인데도-에서도 진급한 첫 달 월급은 사병계에 상납을 해야 되는 판이니 다른 일을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잘못된 전쟁답게 월남에서 전투에서 죽는 사람은 죽고 조금이라도 힘을 이용하여 08(헌병 주특기가 80으로 시작되는 것에서 연유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는 군대 은어, 즉 헌병은 '도둑'이라는 의미)을 쳤다. 국가는 국가대로 미국을 상대로 08을 쳐서 막대한 군사 장비를 한국으로 빼돌렸다.

장교 사병할 것 없이 돈을 만질 일이 전혀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전투원들을 빼놓고는 조그마한 특권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대로 이용해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긁거나 뜯어서 한 살림 장만하기에 급급했다. 차만큼 흔해빠진 헬리콥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주야로 높은 사람들의 구두나 닦고, 아침이면 치약까지 짜서 바치며 입맛 없는 장교를 위하여 땀을 흘리며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팬티까지 다림질을 해서 줄을 세우던 딱까리(당번병) 들의 머릿속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갈까?"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원들은 귀국할 때가 되서야 겨우 본국의 은행에 송금한 몇 백 달러짜리 저금통장을 손에 쥐거나, 눈치껏 모은 일본제 전자제품 몇 점을 베니어로 짠 귀국 상자에 넣어서 배에 싣고 돌아가게 된다.

월남에서 물자와 함께 들어온 것이 바로 '짜웅' 문화이다. 베트남에서는, 할아버지나 손윗사람인 남자에게 인사를 할 때, Chao(안녕하세요) Ong(할아버지) 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짜오 옹'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인에게 좀 더 발음하기 편한 한국화(?)된 베트남어로 변해서 '짜웅'이 된 것이다.

미군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대민 사업을 진행하였지만 소수 부정부패한 권력층에게만 혜택이 집중적으로 돌아갔다. 한국군도 대민사업을 했지만 가난한 사정을 알기에 주로 초등학교 설립, 교량/배수구 공사, 도로건설, 의료사업 등 주로 지역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유익이 가는 것으로 위주로 대민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아무렇게 해도 이러한 대민사업에서 '떨어지는' 각종 콩고물(?)을 챙겨보고자, 몇몇 베트남 관료나 지방 유지들은 끊임없이 한국군 요새를 드나들었다. 콩고물을 챙겨먹기 위해서라도 이들 베트남 인들은 한국군에게 무조건 잘 보일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요새에 드나드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한국 병사들에게 나이와 계급을 불문하고 계속 "Chao Ong! (짜오 옹, 안녕하세요 어르신!)"이라는 인사를 던졌다.

대민사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담당자에게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 지긋한 아버지뻘 되는 베트남 사람이 20대 초반 한국 병사들에게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고 기분을 맞추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아서 병사들은 "저 쌔기 또 짜웅하러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각종 아첨, 부패, 비리, 뇌물의 상징어인 '짜웅'이란 말은 월남에서 돈을 만지다 돌아온 한국 군대에 급속하게 퍼진 부패와 함께 '공용어'(?)로 확산이 된 것이다.


태그:#월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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