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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대회'라 하면 긴장감 넘치고 시끌벅적한 이미지를 떠올리는가?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여줄 대회,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무기력한 대회가 열린다. 바로 제1회 멍 때리기 대회다. 일종의 속어인 '멍 때리다'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음'을 뜻한다.

27일 낮 12시부터 약 3시간 동안 서울광장 잔디밭에서 열리는 이 대회에서는 가만히 앉아 누가 더 잘 멍 때리는지를 겨룬다. 물론 스마트기기를 사용거나 자는 것 등은 금지되어 있다.

제 1회 멍 때리기 대회, 왜 만들었을까?

글씨도 멍을 때리고 있는 것 같은 모자이크 처리의 '멍'자가 눈에 들어온다.
▲ 제1회 멍때리기 대회 포스터 글씨도 멍을 때리고 있는 것 같은 모자이크 처리의 '멍'자가 눈에 들어온다.
ⓒ 전기호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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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는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대회 개최에 도움을 준 서울시청의 친절한 직원 이름을 본따 지은 이름이다)에 속한 저감독(34)과 웁쓰양(38)의 첫 번째 작품이다. 전기호는 자칭 '도시놀이 개발자'라 한다. 도시 놀이라니? 삭막한 이 도시에서 제대로 된 놀이라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멍 때리기 대회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2일 웁쓰양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웁쓰양은 "도시의 놀이라는 게 사실 제대로 노는 거라고 볼 수 없죠. 그 흔한 영화 보기나 쇼핑도 다 돈이 들어가잖아요. 우리는 그냥 소비 활동을 할 뿐이고 그것을 논다고 착각하는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소비 활동을 빼고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유희에 대한 본능을 깨워, 도시에서도 놀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던 중 멍 때리기 대회, 일명 '멍림픽(멍 때리기+올림픽)'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멍 때리기 대회는 단순히 놀이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건 또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해주자는 게 기본적인 취지였다. 그녀는 현대인들을 '좀비'라고 묘사했다.

마치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무척 바쁘게 생활하는 현대인들. 그들이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데이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인데, 늘 수준 이상으로 과잉된 상태라는 것이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그저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뿐, 뭔가를 하지만 하고 있는 게 아닌 딱 그 상태다.

이렇게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는 바쁜 세상 속에 살다보니 잠시라도 쉬는 시간엔 "너 멍 때리냐?" 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웁쓰양은 멍 때리는 행위가 핀잔을 받는 데서 심오한 의문을 가지게 됐다.

"정말로 멍 때리기가 그렇게 가치가 없고 쓸모없는 일이라면 이걸 한 번 가치 있게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기반한 목적 지향적인 형태니까요. 멍 때리기를 대회로 만들어서 가치 전복을 해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깊은 뜻에서 기획된 대회인 만큼 심사 방법도 나름대로 철저했다. 첫 번째는 시민 참여 투표. 일단 시각적으로 멍 때리는 모습도 중요하기 때문에 대회를 구경 온 시민들이 직접 자기가 보기에 멍 잘 때리는 선수에게 스티커를 붙일 예정이다. 스티커를 많이 받을수록 우승 후보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학적 장치로 몸의 이완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멍 때리다보면 일종의 명상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심신이 이완 상태로 돌입한다. 이를 측정해 외부의 영향에 구애받지 않고, 가장 자유롭게 심신을 이완하는 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멍 때리는 행위 가치 없는 것 아니야... 사회가 만든 부정적 이미지"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의 저감독(좌)과 웁쓰양(우)
시크한 이미지와 신비주의 전략의 그들, 멋있다.
▲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 프로젝트 듀오 전기호의 저감독(좌)과 웁쓰양(우) 시크한 이미지와 신비주의 전략의 그들, 멋있다.
ⓒ 전기호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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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상품은 역설적이게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양 트로피. 트로피는 색깔만 황금색일 뿐 금 성분은 단 1%도 함유되지 않았다고 웁쓰양은 거듭 강조했다.

혹자는 이런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뇌를 쉬게 해주어 스트레스를 완화해준다는 취지와 달리 가만히 있는 순간 자체가 스트레스인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 대표적으로 이 글을 쓰는 필자를 포함한 이 시대의 취업 준비생들과 수험생들, 이들에겐 자유롭게 멍 때리는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부정적인 여론에 대해서도 웁쓰양은 말끔하게 정리해줬다.

"막상 저만 해도 멍 때리고 있을 때는 나만 그러는 것 같아서 되게 불안했거든요. 그게 요즘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지 않아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멍 때리는 시간을 불안하다 생각하죠. 멍 때리는 것 자체가 결코 가치가 없고 불안한 행위는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 사회로부터 멍 때리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이식받은 거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살고, 쫓기지 않고 살고 있다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불안하지 않아요. 근데 막 바쁘게 살고 뭔가 스펙을 쌓아야만 사는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 있는 환경에서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불안한 거예요. 철저히 시대가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뿐이죠. 그 부분에 있어 같이 생각을 해보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멍 때리기 대회도 만들어본 것이고요."

이런 기획 취지에 동감하는 건지, 그냥 단순히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멍 때리기 대회는 이미 SNS상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웁쓰양은 이 점에 대해서도 무척 우려했다. 앞서 말했듯이 멍 때리기는 세상에서 가장 심심하고 고요한 대회다. 의도치 않게 SNS에서 화제가 되었지만 그만큼 떠들썩하거나 흥이 나는 대회는 아닐 것이다.

다만 행사 당일 소소한 이벤트(?)와 웁쓰양이 기대하는 관전 포인트는 있다. 웁쓰양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대회 시작 시간인 낮 12시는 바로 도시의 사람들이 굉장히 바쁘게 사는 하루 중 딱 중간이죠. 그 시간에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멍 때리는 집단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 넓은 서울 광장 한복판에서 바쁘게 다니는 도시인들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단의 대비, 저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을 때 뭔가 통쾌하고 짜릿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리꾼들은 대부분 자기가 멍 때리기 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 멍 때리다가 참가신청 기한을 놓쳤다는 한 지원자는 '자신이 정말 이 대회의 적임자 아니냐'라며 추가 접수를 요구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기본 룰이 굉장히 쉬워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필자도 집에서 시도해봤지만 정확히 4분 만에 좀이 쑤셨고, 7분쯤 접어들어선 "그렇게 있을 거면 차라리 방에 기어들어가 잠이나 자라"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와 실패로 끝났다.

가장 쉬워 보이는 듯하면서도 어려운 멍 때리기. 모두 핀잔을 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 행동을 대회 종목으로 만들어 가치 전복을 해보겠다는 전기호의 용기 있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주변에서 멍 때리는 친구를 본다면, "너 이 자식, 멍 때리냐?" 하고 핀잔을 주기보다는 "기특한 녀석, 뇌를 쉬게 하고 있구나" 하고 넘어가 주자. 그때가 아니면 또 언제 쉬어보겠는가. 요즘 세상처럼 '바쁨'이 곧 미덕인 사회에서.


태그:#멍때리기 , #멍때리기 대회, #전기호,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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