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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서정홍 시인이 새로 펴낸 동시집 제목의 시다. '드라마 보조 출연자 진수 삼촌'이 부제로 붙어 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몇 초만 나와도 뿌듯해진 '진수 삼촌' 이야기다.

'진수 삼촌'은 유명 배우들의 그늘에 가려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밥벌이조차 쉽지 않은 어느 보조출연자다. 그러나 서정홍 시인은 그이한테서 '땀의 철학'을 배웠다.

"드라마 보조 출연자를 엑스트라라고 해./어떤 사람들은 노가다라고도 해./그냥 일용직 노동자야./날마다 일거리가 있는 게 아니거든. … "야, 주인공은 아니래도 /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기분은 좋다야."("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부분).

서정홍 시인의 시를 읽으면 드라마 한 편의 주인공을 떠나 인생 드라마에서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시처럼 이번 동시집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서정홍 시인이 동시집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를 펴냈다.
 서정홍 시인이 동시집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를 펴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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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인은 창원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살며 시를 쓰다가 지금은 합천 황매산 기슭 산골마을에 귀농해 산다. 그는 직접 논밭을 갈고, 두엄을 내고, 뙤약볕 아래서 김을 맨다. 그리고 밤에 시를 쓴다.

노동현장에 있을 때 노동자 시를 써서 '전태일문학상'도 받은 그가 지금은 농사짓는 이야기와 농사짓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쓰고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 '기록영화'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며칠 전엔 어떤 할머니한테서/안방 천장에서 비가 샌다며/갑자기 연락이 왔어/그날이 우리 집안 제삿날인데도/밤늦도록 수리를 다 해 주었지/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어찌나 좋아하시는지…"("다시 태어나면 무얼 할까" 부분).

풋풋한 이야기에서 감동이 묻어나고, 시골마을의 정겨움이 한껏 배여 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은 돈을 주고도 느낄 수 없는 삶의 맛이다.

서 시인의 시에는 방수 페인트 기능사 아저씨,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이모, 담배 앞에서 금연 계획을 수도 없이 수정했을 아버지, 호미만 보면 냉장고에 보관하는 새미 할머니,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곶감을/새들이 쪼아 먹는 바람에/할머니는 진지만 잡수시면/밖에 나가 새를 쫓습니다 … 삼식이 아재가 찾아와/죽은 새 한 마리/처마 밑에 걸어두면/새들이 안 온다기에//할머니와 나는/죽은 새 한 마리/처마에 걸어두었습니다//원, 세상에 이런 일이!/동네방네 새들이 모두 날아와/죽은 새 곁을 빙빙 돌며/야단법석을 떱니다 … 할머니와 나는 죽은 새를/얼른 땅에 묻어 주었습니다("새들도 문상을" 부분).

어떤 죽음도 가벼울 수 없다. 그 대상이 짐승일지라도 말이다. 삼식이 아재의 말이 '과학'인양 믿은 할머니의 순진함도 재미있다. 죽은 새를 찾아온 다른 새들의 모습을 보고 '문상'이라 직감한 시인의 감성도 돋보인다.

"고모할머니는/지나가는 영구차를 보고도/머리 숙여 인사를 하신다//야속한 세상/다 잊으시고 편안하게 가시오//고모할머니는/자동차에 치인 개구리를 보고도/머리 숙여 인사를 하신다//부디 다 용서해 주고/잘 가시게."("고모할머니" 전문).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숱한 생명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신다. 그런 시를 읽는 사람의 가슴까지 따스함이 전해진다.

서정홍 시인은 동시집 1부에서 택배기사, 목수, 목욕탕 주인 등 주로 노동자들의 삶을, 2부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시인 자신과 가족의 다채로운 일기를, 3부에서 이웃들의 애환과 소망을, 4부에서 사람과 뭇생명의 공존에 대한 성찰을 소박하게 풀어놓았다.

서정홍 시인은 서문에서 "시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만 쓰고 읽는 것이 아니고, 돈보다 사람과 자연을 섬기는 사람,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사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쓰고 읽는 것"이라며 "아이고 어른이고 누구나 쉽게 읽고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이 시집 속에는 우리 식구들과 둘레에 사는 소박한 이웃들의 삶과 꿈이 들어 있고, 모진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웃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이웃들"이라며 "마음을 열고 시를 읽다 보면 우리 둘레에 살아가는 이웃들이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라고 밝혔다.

김영은 시인은 이 동시집에 대해 "서정홍 동시는 오래 묵은 장맛처럼 우리 동시의 가벼움을 극복하는 역할을 하고, 기교주의가 보여주지 못하는 웅숭깊고 진솔한 삶의 세계를 현실주의 문학으로 그려낸 것"이라며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우리 토박이말을 찾아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고 소개했다.

서정홍 시인은 동시집 <윗몸일으키기> <우리집 밥상> <닳지 않는 손> <나는 못난이>, 시집 <58년 개띠> <아내에게 미안하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등이 있고, 마창노련문학상과 전태일문학상, 우리나라좋은동시문학상, 서덕출문학상을 받았다. 이번 동시집의 그림은 정가애 작가가 그렸다.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서정홍 지음, 정가애 그림, 문학동네어린이(2014)


태그:#서정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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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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