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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건 최초 제보자 류영준씨가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상희 변호사(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부소장),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참여연대 부운영위원장), 류영준 강원대 교수, 이재명 한겨레 기자(전 참여연대 투명사회국장)
▲ 영화 <제보자>의 실제 주인공과 친구들 황우석 사건 최초 제보자 류영준씨가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상희 변호사(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부소장),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참여연대 부운영위원장), 류영준 강원대 교수, 이재명 한겨레 기자(전 참여연대 투명사회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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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스캔들 이후 10년, 공익제보자 류영준씨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제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제보 이후 겪었던 고통은 극심했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당시 그를 지원했던 이재명 전 참여연대 투명사회국장(현 <한겨레> 기자)은 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제보자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참여연대의 적지 않은 기여를 상기했다. 공익제보운동을 하고 있는 이상희 변호사(현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부소장)는 공익제보자 보호에 턱없이 부족한 제도적·사회적 지원체계에 대해서 지적했다.

지난 15일 참여연대에서는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을 밝힌 제보자와 그를 도운 사람들이 겪은 일과 애환을 이야기하는 토크쇼 '영화 <제보자>의 실제 주인공과 친구들'이 열렸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현 참여연대 부운영위원장)가 사회를 본 이날 토크쇼에서, 참석자들은 이 사건이 공익제보의 측면에서 '작지만 이기는 경험'을 보여줬다는 데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사회적으로는 대중의 맹목적 믿음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리틀 황'이 황우석을 등진 이유

황우석 사건 최초 제보자 류영준 가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 영화 <제보자>의 실제 주인공과 친구들 황우석 사건 최초 제보자 류영준 가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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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 "영화 <제보자>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은, 그리고 당시에는 말할 수 없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나눠 보겠습니다. 황우석 사단에서 류영준씨가 어떤 일을 했기에 그런 중요한 일들을 알게 되고 제보까지 하게 됐나요?"

류영준 : "저는 황우석 전 교수와 1999년에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1998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보건소에서 의사로 근무를 하고 있는 상태였고, 임상 의사를 할 것인지 기초의학자를 할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줄기세포란 걸 처음 알게 됐는데, 그것과 1997년 복제양 돌리를 만든 기술을 합치면 환자들한테 치료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당시 우리나라에는 (그런 연구를) 하시는 분이 없어서, 해외 연구소까지 찾아서 한 3군데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2군데서 답장이 왔는데, 동경대학에서 하나, 황우석 교수에게서 하나가 왔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 서울대 석사로 들어가서 황우석 박사와 만나게 됐습니다."

사회자 : "근데 거기서 인정을 받아서, 말하자면 고속승진이죠, 3개월 만에 팀장을 맡을 정도로 황우석 박사의 총애를 받았어요. 그럼에도 제보를 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류영준 : "저는 매일 아침 6시20분에 학교에 출근을 했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6시35분 되면 옵니다. 황우석 교수랑 팀원들 다 퇴근하면 보통 밤 11시, 12시 되거든요. 아침에 6시20분에 나와서 밤 12시에 가니까 그런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황우석 교수가 예뻐라 했죠. 그래서 옆에 사람들이 '리틀 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총애를 받으니까.

사실 제보라는 게 어떤 하나의 특정한 계기가 생겨서 제보를 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 연구소를 들어가면 바닥청소부터 해서 실험실 생활 적응을 한 후에, 책상에 앉아도 되는 짬밥이 몇 개월 정도 지나야 논문을 볼 수 있게 되는데요, 근데 논문(복제소 영롱이)을 찾으니 논문이 없는 겁니다. 팀장에게 물으니 자꾸 주저주저 하더라고요. 제가 계속 물었는데도 며칠간 말을 빙빙 돌리더니, 나중에는 하는 말이 '그런 거 없다' 그러더라고요.

충격을 받았지만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 정도 가지고. 뭐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리고 저건 우리 팀 일이 아니니까 내가 맡은 일만 잘해야겠다 이러고 모른 척 넘어갔죠. 그러다가 제가 있는 줄기세포팀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동물실험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 저와 황 교수가 같이 하는 프로젝트에서 논문을 쓰기도 전에 KBS 기자들이 취재를 왔는데 척추 손상된 개에게 줄기세포를 넣으니까 이 개가 다리를 질질 끌지언정 걷는단 말이죠. 근데 이게 줄기세포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병이 나은 건지 실험상의 검증을 하기도 전에 (황 교수가) 걷는다고 결론을 내려버린 거죠. 그때 저와 심각하게 틀어졌어요."

사회자 : "그 프로젝트를 하는 중에 황 교수와 이미 틀어지신 거네요?"

류영준 :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구원의 난자(채취) 사건이 터지면서 이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도 책임감은 느껴서 제가 맡은 일은 하고 나가겠다고 얘기를 했고."

사회자 : "연구원이 난자제공 했던 그 일을 말씀하신 것 같네요. 그러고 나서 동물실험을 하다가 인체실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굉장히 갈등을 하셨다고 하시던데."

류영준 : "제가 실험실을 떠난 건 2003년도거든요. 근데 2005년 4월 어느 날 친했던 동료가 저희 집에 찾아왔어요. 황우석 팀이 줄기세포 11개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길 듣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거죠. 11개를 만든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는 게 '5월 달에 임상실험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파킨슨병 환자와 척추손상 환자 두 명한테. 그걸 듣고는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임상실험 한다는 아이가 제가 아는 아이였거든요."

류 교수 찾아간 참여연대 "제보하지 마라, 다친다"

사회자 : "참여연대를 찾아오시게 된 이유는 뭔가요? 공익제보 관련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오신 건가요, 계기가 있을 텐데?"

류영준 : "계기라면, 난자 문제 때문에 처음 (참여연대를) 찾았는데요. 연구원 난자를 사용한 자체가 문제가 있는 데다 그 나머지는 매매를 해서 조달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건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찾다보니까 그중에 참여연대하고 생명윤리학회 이런 데가 있었습니다. 그쪽 사람들과 면담하면서 관계를 맺게 된 거죠."

사회자 : "사실 이런 센터에서 제보를 받을 때 고민이 되는 게, 제보자의 말만 믿을 수 없잖아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피디가 증거가 있냐고 추궁하니 선생님이 '증거가 없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면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제보를 하신 셈이잖아요."

류영준 :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하는게, 영화는 영화입니다. 당시 아이의 머리카락(DNA)과 비교세포만 없었을 뿐 증거는 충분했어요. 난자 (매매)장부가 있었고, 박을순 연구원의 편지, 그리고 미즈메디 병원의 줄기세포 라인에 관한 것들 다 있었습니다. 아이 머리카락과 NT2(줄기세포) 세포라인만 없었지, 충분한 증거가 있었어요. 영화에서는 피디를 돋보이게 하다 보니까 모든 게 없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사회자 : "그럼 이재명 기자에게 여쭤볼게요. 당시 참여연대 투명사회국장이었는데, 류영준씨가 처음 참여연대 찾아왔을 때 기억하세요?

이재명 : "류영준씨가 참여연대를 찾아온 게 아니고, 우리가 류영준씨를 찾아갔죠. 그 당시 생명윤리 연구 이쪽으로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있던 곳이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였구요. 그래서 우리에게 제보를 한 거 같고. 당시 이 문제를 계속 추적했던 김병수 전 간사랑 찾아가서 만났는데, 그게 아마 2004년 10월쯤 됐을 겁니다. 가서 얘길 듣는데 무슨 줄기세포, NT2 이러길래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그렇게 듣고서 왔는데, 머리가 아팠죠. 사실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그래도 제보를 받았으니 처리를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공부도 해야 되고. 그래서 계속 만났죠. 그렇게 만나게 된 겁니다."

류영준 : "저한테 제보하지 마라 그랬어요. 다친다고. 자기가 너무 많이 봐가지고... 인생 망가지고 싶냐고."

사회자 : 기억나요?

이재명 : "기억나죠. 저희가 공익제보 처리할 때 첫 번째가, 제보자가 찾아오면 일단 가족과 상의하라고 합니다. 가능한 제보하지 마라, 그러고.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제보한다 그래도 제보자는 다칠 수밖에 없으니까. 그 피해를 감내할 자신이 있으면 다시 오고, 아니면 그냥 가라고 하죠. 그래서 (류영준씨에게) 숙고를 하라고 그랬고, 가족과 충분히 상의를 하라고 했더니, 상의를 했다고 해서 저희가 다시 병원으로 가서 얘기를 했죠."

사회자 : "근데 참여연대는 사실 황우석 사건 때 거의 드러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안 드러난, 뭔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은 없었나요?"

이재명 :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근데 최근 들어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나의 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이라는 게 있고 수많은 우연의 요소들이 공존해가면서 해결하게 됩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류영준씨죠. 그리고 한학수 피디가 열심히 뛰었고.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이 있었어요. 순탄하게 가지 않았죠. 반격도 심했고. 당시 황우석이라고 하는 사람의 존재가 엄청났었죠.

이건 잠시 다른 얘깁니다만, 그 사건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권력과의 싸움이나 황우석과의 싸움이 아니라, 황우석을 믿는 대중들의 신뢰와 상식과의 싸움이었어요. 그걸 무너뜨려야지 해결이 되는건데. 황우석에 대한 신뢰가 워낙 견고하고 강했기 때문에... 그건 일반 대중들뿐 아니라 권력자들도 그랬고 정치인들도 그랬고 심지어 언론인들도 그랬죠. 그걸 깨는 게 가장 힘들었던 거죠."

사회자 : "그러셨구나. 참 역경이 많았죠. 근데 류영준씨가 참여연대를 처음 찾아왔을 때, 왜 류영준씨를 지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거죠?"

이재명 : "이유가 있나요 하는 일이 그건데요. 원래 제보 앞에 공익이란 말이 당연한 수식어처럼 따라다닙니다만, 사실 제보에 있어서 저희가 판단할 때 중요했던 건 그런 겁니다. 그 사람의 의도, 제보의 순수성, 그런 건 절대 보지 않습니다. 제보의 내용이 공익과 부합하느냐 마느냐만 판단하는 거죠. 제보하는 사람이 사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건 없건 그런 건 따지지 않아요."

사회자 : "그렇군요. 그러면 제보 이후에 참여연대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뭐였나요?"

이재명 : "당연히 제보자 보호죠. 이 분이 밖으로 신분이 드러나는 순간 수많은 불이익이 뒤따르기 때문에,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려 했던 거고. 그런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뉜 게,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주력했다면 참여연대는 류영준씨를 보호하면서 어떻게 이 사건을 풀어나갈 건가를 고심했던 거죠."

이상희 : "궁금한게, 저희가 제보를 받을 때 항상 드는 고민이 증거 부분이거든요. 결국 내부에 계신 분들은 내부 자료를 가져올 수밖에 없어서 절도라든가 이런 일로 문제가 생기는데, 영화 <제보자>를 보면서 눈에 띄었던 것이 주인공 부인이 연구소에 들어가서 줄기세포 하나를 빼오는 부분이 있어요. 진짜라면 절도죄 아닌가요?"

류영준 : "영화는 영화입니다. 절도는 아니지만 유사한 상황이 있었죠. 당시에 하늘이 도와서, NT2가 황우석 전 교수의 실험실 밖으로 나옵니다. 법의학적으로 DNA는 피 한 방울이 땅에 떨어질 때 생기는 흔적 정도만 있으면 찾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착안한 게 다 쓰고 버린 실험용 접시가 쓰레기장으로 나오면, 쓰레기차가 가지고 가기 전에 가져오자. 그렇게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검찰 수사에서도 절도죄가 성립이 안 됐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난자 장부를 가지고 나온 것을, 환자 정보보호 측면에서 의사로서 그럴 수 있느냐 비판하는데, 그것은 제가 작성한 실험 노트입니다. 나올 때 100%로 복사해서 황우석 전 교수팀에 전달했고 내 노트를 내가 가지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절도죄 성립이 안 됐습니다."

사회자 : "제보를 한 뒤에 굉장히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힘들었을 거 같은데 어떠셨나요?"

류영준 : "지금 보시기에 괜찮아 보여도, 처음 한 2년 정도는 실직 상태에 있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려 해도 안됐습니다. 제보할 당시 아이가 6개월이었는데 계산상으로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면 안 되죠. 그런데 제보라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 싶을 때 하게 됩니다."

사회자 : "심리적인 것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나요?"

류영준 :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비가 옵니다. 악플, 기자들의 괴롭힘, 그리고 황우석 지지자들이 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계가 오거든요. 그때 잘 넘겨야 합니다."

사회자 : "많이 힘드셨을 거 같아요. 이상희 변호사님, 공익제보자에게 오는 불이익에 대해 이야기 많이 들으셨을 텐데 이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있는 건가요?"

이상희 : "일단 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발생할 일로 공익신고를 한 경우에는 부패방지법이 있고, 민간 기업에서 발생한 공익신고에 대해서는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있습니다. 지난 10년 사이 법은 많이 정비되었지만 여전히 구멍이 많아서 사립학교 교사의 경우에는 제보를 해도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두 가지가 중요한 거 같아요. 이 사건의 경우는 정말 다행히 황우석 사태의 전모가 드러나서 진실이 규명되었지만, 실제 제보 중 진실이 규명되고 제보자가 원하는 데까지 가는 경우가 많지는 않아서 이 부분을 어떻게 정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장 큰 불이익이 징계, 해고인데, 나중에 국민권익위원회가 보상이나 포상을 준 다해도 그 금액이 미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정되기까지 이분들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작지만 승리하는 경험들이 중요하다"

10월2일 개봉한 영화 <제보자>는 황우석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 영화 <제보자> 포스터 10월2일 개봉한 영화 <제보자>는 황우석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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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 "당시에도 "진실이냐 국익이냐" 논쟁이 뜨거웠는데, 류영준씨가 제보를 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한 발 더 나간 것은 어떤 부분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두 분께서 각각 말씀해 주세요."

이재명 : "저는 작지만 계속 승리하는 경험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워낙 컸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요. 진실과 국익논쟁이라는 것은 그 때 그때 다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사건의 가장 큰 의미는) 정말 넘기 힘들었던, 넘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상식의 벽을 깼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제일 힘들었던 것이 "설마 황우석이 사기를 쳐서 여기까지 왔겠어? 뭔가 하나는 있겠지" 이런 대중의 신뢰였는데, 그런데 사실 하나도 없었던 거잖아요. 굳건한 사람들의 인식을 깨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그걸 한 번이라도 깨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100%로 신뢰하는 것은 없어졌고, 의심하는 경험들을 하게 된 것이죠.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던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많은 역경에도 끝까지 제보자를 지켜냈다는 것이에요. 중간에 제보자를 공개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류영준씨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진실이 규명되었고 학계로 돌아갔고 연구자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공익제보자의 롤 모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이기 때문에요."

류영준 : "제보를 하고 나서 사회가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예상할 수도 없고, 제가 제보한 이유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물어봐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바뀐 건 없는 거 같아요."

사회자 : "마지막으로 이재명 기자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공익제보자를 도와주면서 느꼈던 감정은 무엇인가요?"

이재명 : "제가 참여연대에서 <한겨레>로 이직한 것이 2006년인데 그 당시 류영준씨가 황우석 사건의 제보자라는 것을 평생 밝히지 않기를 바랐어요. 진실이 규명되었으니까 굳이 밝혀야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 본인을 드러내고 싶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의 기사를 쓰겠다고 했어요.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였어요. 그것은 류영준을 영웅으로 그리기 싫어서. '당신은 영웅이 아니다' 류영준도 인간이고 뭔가 약점을 가지고 있고 그걸 그대로 써주고 싶었던 욕심 때문에요."

<참석자 질문>
- 당시 청와대에서 압력과 협박이 있었습니까?
류영준 :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저희가 안 끌려가고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와대에서 직접적인 압력은 없었습니다."

- 황우석씨가 왜 동물조작을 했습니까? 노벨상 때문인가요?
류영준 : "처음에는 노벨상을 꿈꾸지는 않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에 두 가지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하나는 UN사무총장을 내는 것이고, 하나는 황 전 교수 노벨상을 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노벨상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노벨상이 아른거린 거죠."

- 제보를 안 했을 경우, 황우석 사기극 결말은 어떻게 났을까요?
류영준 : "재밌는 상상을 많이 해봤어요. 황 전 교수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웃음). 아마 중간에 아이(척추손상 환자)한테 세포가 들어갔겠죠. 들어가서 사고가 났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이유를 대며 계속 갔겠죠."

- 당시 제보자를 매도하고 황 전 교수를 비호했던 기자 중 기자 상을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류영준 선생님도 진실이 밝혀진 뒤 사과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류영준 : "저를 제일 괴롭힌 것은 <조선일보>입니다. '제보자는 누구다' 하면서 다 공개하고. 황우석 전 교수가 그 기자한테 흘린 거죠. 이후에 그 기자한테는 사과를 받았습니다."

- 줄기세포 연구가 해외나 국내에서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류영준: "난치병, 희귀병을 앓고 계신 분들에게 참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의사 입장에서는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되는 것은 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 전 교수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을 막는 것도 저희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원은 하지 않고 자꾸 로비를 해야 지원금을 주니까 이런 분위기로는 노벨상 타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참여연대 홈페이지(www.peoplepower21.org)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본 토크쇼는 참여연대 팟캐스트 <참만세>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8005



태그:#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공익제보자, #류영준, #황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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