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12일, 연극 <민중의 적 : 2014>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 이문원 연출과 출연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시 무대에 섰다.

지난 12일, 연극 <민중의 적 : 2014>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 이문원 연출과 출연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시 무대에 섰다. ⓒ 곽우신


"우리에겐 하늘이 있다.
빼앗길 수 없는 저 하늘 있다.
하늘이여 내려오라.
철탑에 빼앗긴 이 땅이 되어주오."

캄캄한 소극장. 관객석에서 배우의 시큼한 땀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좁다. 80석 규모의 관객석은 꽉 찼다. 관객들은 모두 공연 시작 전에 나눠 받은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았다. 관객 앞에 배우들이 서서 노래를 부르며 연극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배우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밀양 용회마을에서 연극을 보러 올라온 고준길(70) 할아버지와 구미현(65) 할머니도 눈가를 훔친다. 노래가 끝났을 때, 극장 안은 정적 가운데 관객들의 훌쩍거리는 소리만 메아리쳤다.

밀양 송전탑 문제 고발 위해 '돌직구' 날리는 연극

지난 12일 오후 3시, 극단 'C 바이러스'가 주관하고 <오마이뉴스>가 후원한 연극 <민중의 적 : 2014>가 마지막 무대에 올랐다. <민중의 적 : 2014>는 3일부터 10일 간 대학로 소극장 천공의 성에서 관객을 만났다. 단 열흘의 공연을 위해 극단 C 바이러스의 배우와 스태프는 지난 8월 말부터 구슬땀을 흘렸다.(관련 기사 : "밀양 송전탑 '방해세력', 제대로 고발합니다") 12일 공연은 이 모든 노력을 갈무리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민중의 적이 완전히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공연을 연출한 이문원 연출은 "<민중의 적 : 2014>는 끝났지만, <민중의 적 : 2015-1>과 <민중의 적 : 2015-2> 그리고 <민중의 적 : 2016>으로 계속 찾아뵐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극단에게 있어, 12일의 마지막 공연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다.

<민중의 적 : 2014>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릭 입센의 고전 <민중의 적>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시공간은 바뀌었다. 19세기 말, 노르웨이 남부의 온천 마을은 2014년, 밀양 '용두마을'로 옮겨졌다. 하지만 헨릭 입센의 주제의식은 그대로 가져왔다.

용두마을 보건소의 의사 '성도일'은 용두마을에 들어설 송전탑이 주민들의 건강을 해칠 것이라 믿는다. 그는 나름의 조사를 통해 송전탑이 유해하다는 근거 자료를 발굴한다. 그리고 '최귀웅' <도민의소리> 기자와 협력하여 이를 기사화하고 현실을 고발한다. 그러나 마을 이장이자 도일의 형인 '성창일'은 다른 마을보다 더 많은 보상금을 얻어내며 마을 주민을 설득한다.

잠시나마 희망에 부풀었던 성도일은 이제 '민중의 적'으로 매도된다. 언론의 사명에 대해 외치던 최귀웅은 성도일을 배신한다. 다수의 주민은 갈등을 빨리 마무리하고 배상금을 받으려 한다. 민중을 위해 헌신하겠다던 도일은 오히려 그 민중에 의해 버려진다. 자신의 가족을 제외하면 완전히 포위된 절망적인 상황, 그 가운데 목에 핏대를 세우며 끝까지 분투하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다. 군더더기 없이 날카롭게 벼려진 시나리오는 밀양의 문제를 표적 삼아, 파국을 향해 거칠게 진행된다.

 지난 12일, <민중의 적 : 2014>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밀양 용회마을 주민 고준길(70), 구미현(65) 부부가 관객과의 대화에 나섰다. 연극 배우들이 뒤에서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지난 12일, <민중의 적 : 2014>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밀양 용회마을 주민 고준길(70), 구미현(65) 부부가 관객과의 대화에 나섰다. 연극 배우들이 뒤에서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 곽우신


"가만히 있으라"고 외치는 창일을 향해, 도일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맞선다. 연극은 '민중이란 무엇인가', '단순 다수를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다수에서 배제된 소수는 민중이 아닌가', '진정한 민중의 적은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묵직하게 던진다. 곁가지는 철저하게 압축하고, 하나의 큰 주제의식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연극 내에 있는 거의 모든 구성요소는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고 있다.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는 이와 반대하는 이 모두 실제 무대 밖에서 제시되는 찬반 논거를 그대로 털어놓는다. 어느 할아버지의 분신, 감금되어 대소변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할매의 고통, 밀양 할매와 할배를 조롱하는 경찰의 언어 모두 실제 발생한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연극 속에 배치되면서 마치 각색되고 극화된 것 같지만, 무대 밖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은 별다른 변형 없이 대사와 영상, 음악을 통해 튀어나온다.

연극이 끝나고 이문원 연출은 "밀양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 우리 모두의 문제다"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골치 아픈 연극을 끝까지 관람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아울러 이 힘든 작품을 위해 헌신해 준 모든 배우와 스태프에게도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더 약자들, 더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찾아뵙도록 노력하겠다"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밀양 할배 "이 싸움은 정당하고 정의로운 싸움"

 지난 12일, 밀양 용회마을 주민 고준길 할아버지가 연극 <민중의 적 : 2014>가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지난 12일, 밀양 용회마을 주민 고준길 할아버지가 연극 <민중의 적 : 2014>가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 곽우신


 밀양 용회마을 주민 구미현 할머니가 연극 <민중의 적  : 2014>가 끝난 가운데 관객과의 대화에서 마이크를 붙잡았다.

밀양 용회마을 주민 구미현 할머니가 연극 <민중의 적 : 2014>가 끝난 가운데 관객과의 대화에서 마이크를 붙잡았다. ⓒ 곽우신


연출의 인사가 끝난 후, 밀양 단장면 용회마을에서 올라온 고준길 할아버지와 구미현 할머니를 무대 앞으로 모셨다. 의자에 앉은 밀양 할배·할매의 뒤로 연출과 배우들이 섰다. 울먹이는 배우들 앞에 밀양 현장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소회가 이어졌다.

눈물이 맺힌 채로 무대로 나선 고준길 할아버지는 "우리에게는 이 싸움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싸움"이라고 강조했다. 할아버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인데, 국가가 하지 않으니 우리가 나선 것"이라며 "질 수 없는 싸움"이라고 말했다. 고 할아버지는 이어 "투쟁 현장 대부분을 할매들이 지키고 있고, 할배들이 별로 없어서 많이 미안하다"고 밝혔다.

구미현 할머니는 "대사 하나하나가 참 가슴에 박힌다"며 "참 많이 울었다"고 감상평을 밝혔다. 구 할머니는 "밀양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다"며 "실제 밀양에서 우리가 겪었고, 겪은 사건들"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정말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무대인사 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구 할머니는 "성도일이 완전히 혼자 남았을 때, 다 떠나버린 후 그가 느꼈을 막막함과 무력함이 나한테도 옮겨졌다"며 "밀양에 대해 왜곡된 기사가 나갈 때마다 우리가 느꼈던 그 심정"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이어 "농번기라 너무 바빠서 많은 할매들과 함께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며 "다음 기회에는 더 많은 밀양 할매·할배들과 보러 오겠다"고 밝혔다.

실제 밀양에 연대하러 다녀온 경험이 있는 김성빈(25)씨는 "실제로 밀양에 갔을 때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꼈다"며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이날 공연 후 행사는 고준길·구미현 부부가 밀양 연대자들과 함께 자리를 가지며 마무리됐다. 극단 'C 바이러스'의 <민중의 적 : 2014>는 오는 2015년에 다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민중의적 연극 밀양 송전탑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