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래된 향나무를 품고있는 최승효 옛집
▲ 향나무와 옛집 오래된 향나무를 품고있는 최승효 옛집
ⓒ 신남영

관련사진보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에서 "조숙해서 감흥이 일찍 메마른 예술가보다는 늙어가면서 원숙해지는 노경의 아름다움이 감명을 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어찌 사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는가. 유구한 산천이 그렇고 오래된 서화가 그렇지 않은가. 오래전에 서울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을 찾은 적이 있었다. 저물 무렵 그 옛집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 집에 안목 높은 최순우란 예인이 살아 더욱 감흥이 있었다.

가옥이 우리에게 주는 그 감흥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마치 거목 앞에서 찬탄 외에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땅의 곳곳에 그런 거목과 같은 가옥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후생으로서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닌가.

무등 아래에 자리한 아름다운 가옥

최승효 옛집 산책로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모습
▲ 무등산 최승효 옛집 산책로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모습
ⓒ 신남영

관련사진보기


멀리 무등을 보는 옛 사직단 아래에도 이런 옛집이 한 채 있다. '최승효 가옥'으로 알려진 이 가옥은 양림산의 나즈막한 구릉에 터를 잡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문화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경사진 부지를 자연상태 그대로 이용하여 좌측에 반 지하층을 형성함으로써 건물 전체에 율동감을 주고 있다. 작은 언덕과 암벽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를 끌어다가 연못을 꾸며 건물의 운치를 한결 돋보이게 하고 있다. 안채는 팔작지붕 건물로 2칸의 대청과 방, 1칸 반의 정지(부엌)을 두었다.

서향인 배면에는 마루를 두르고 미닫이 창문을 만들어 사양빛(해가 질 무렵 비스듬히 비치는 빛)을 차단 시켰다. 미닫이 창문 때문에 안방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벽면 상단에 교창(창문 위에 설치하여 열고 닫을 수 없는 채광용 붙박이창)을 뒀다. 대청을 제외하고는 다락을 두었는데 이곳에 독립운동가를 피신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루밑에 조명을 설치한 최승효 옛집
▲ 마루밑 조명 마루밑에 조명을 설치한 최승효 옛집
ⓒ 신남영

관련사진보기


편액을 감상하고 있는 탐방객. '자이당'은 청나라 서예가 옹방강의 글씨로 전해진다.
▲ 최승효 옛집의 편액 편액을 감상하고 있는 탐방객. '자이당'은 청나라 서예가 옹방강의 글씨로 전해진다.
ⓒ 신남영

관련사진보기


원래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였던 최상현(崔相鉉)씨의 집이었다. 후에 광주 MBC 창립을 주도했던 고 최승효 선생이 구입해 1999년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 중이던 최상현씨의 삼남 최인준(65)씨가 맡았다. 최인준씨는 1년 정도 공을 들여 수리를 하려 했으나 15년 넘게 혼자 힘으로 집을 가꾸게 됐다. 그러다 2014년 10월, 일반인에게 개방을 했다.

최인준씨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의 제자다. 지난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이기도 하다. 가옥과 현대미술가의 만남, 그렇게 해서 이 집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새로운 문화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대 문화의 유적지라 할 수 있는 광주 양림동에 갈 때마다 늘 문이 닫혀 있어 아쉬웠던 곳, 이제는 그 비밀의 정원이 공개된 셈이다.

개화기에서 한말에 이르는 건축사적 가치뿐만이 아니다. 이 가옥을 둘러보다 보면 곳곳이 독특한 공간감과 장인정신으로 가득하다. 세운 이와 가꾼 이의 미감과 정신이 만난다. 단아한 잔디가 깔린 앞뜰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향나무는 마치 인품 높은 선비 같다. 금목서와 매화, 아늑한 뒤뜰의 배롱나무와 수국 등 온갖 화초들에 이르기까지 느낌이 있는 풍경으로 보는 이를 불러 세운다.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 이제 시민의 곁으로

새롭게 단장한 이 가옥의 미덕은 모든 공간을 전시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가옥의 중심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자이당(自怡堂) 대청과 방에는 부친이 모아둔 작품과 최인준씨의 작품이 사이좋게 전시되어 있다. 본격적인 전시 공간은 뒤쪽 뜰에 위치한 갤러리다. 그곳에 가면 자연의 나뭇가지들을 소재로 한 그의 설치미술들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을 통해 옛날과 오늘의 대화를 듣다보면 이 가옥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묘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마루 밑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을 보면 그가 모든 것에 얼마나 세밀하게 공을 들였는지 알 수가 있다.

최승효 가옥의 또 하나의 매력은 자연을 그대로 살린 다채로운 산책길이다. 그 길마다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냥 쉽게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금붕어가 노니는 작은 연못부터 층층이 편석을 이용해 만든 아기자기한 폭포들, 특히 무등산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나무들 사이의 전망 포인트는 저절로 탄성을 나오게 만든다.

최인준씨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최승호 옛집의 방 안
▲ 최인준씨의 작품 최인준씨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최승호 옛집의 방 안
ⓒ 신남영

관련사진보기


아무리 좋은 공간도 사는 이의 정성이 닿지 않으면 박제되기 쉽다. 이 가옥은 이제 시민에게 문을 열었으니 새로운 과제가 생긴 셈이다. 안내 데스크에서 우연히 이 집의 지킴이인 최인준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운영방식과 프로그램 등이 행복한 고민거리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 가옥은 전시와 다양한 공연을 포함해 세세한 운영 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라 했다. 당장 지난 17일부터 19일까지 인문학 축제 '굿모닝! 양림'의 일환으로 '최인준의 정원 MUSEUM' 프로그램이 시민들을 만났다. 의견을 경청하던 안내데스크의 기획실장이 열심히 메모를 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말처럼 건축의 전반부는 예술가가 만들고 후반부는 기술자가 만드는 프로세스다. 또한 장인은 시대가 만들어낸 총체적인 정신을 구현하고, 그 속에서 개인의 창조성이 발휘되어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존재다.

최승효 가옥은 '아티스트' 겸 '테크니션'인 최인준씨를 만나 또 하나의 복합적인 문화 예술 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제 이 아름답고 특별한 공간은,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가꾸어 나가려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의 몫을 남겨두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최승효 가옥은 광주민속자료 제2호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태그:#최승효가옥, #최인준, #광주시민속문화재, #신남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 리뷰어. 2013년 계간 <문학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명왕성 소녀>(2023), <물 위의 현>(2015), 캘리그래피에세이 <캘리그래피 논어>(2018), <캘리그래피 노자와 장자>, <사랑으로 왔으니 사랑으로 흘러가라>(2016)를 펴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