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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의 <오늘『자본』을 읽다>를 읽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해설서이자 안내서다. 지난 2012년 8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약 7개월간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을 기초로 해서 엮은 책이다.

<오늘『자본』을 읽다>
 <오늘『자본』을 읽다>
ⓒ 도서출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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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본다. 인간 사회의 본질과 진실을 통찰하게 해 주고, 이를 통해 좀 더 나은 사회로의 변혁을 꿈꾸는 이들에게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바람과 의도의 결과물이다.

지금 <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경제는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임금이 높길 바라는 노동자를 위한 경제학과 적은 임금을 바라는 기업을 위한 경제학이 그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경제를 하나로 이해한다. 그마저도 기업을 위한 경제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노동자를 위한 경제학의 절대 강자인 <자본>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12년 말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활동 인구 2550만 명 중 절대 다수인 1770만 명이 임금노동자다. 이들은, 10% 미만의 노동조합 조직률에서 알 수 있듯이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다. 분하고 억울한 일에 맞닥뜨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는 <자본>을 통해 노동자의 경제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억울함의 진정한 원인을 찾아내는 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우리가 <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

지금 <자본>을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2008년 세계 금융 공황 이후 마르크스에 대한 르네상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세계적인 흐름에도 맞기 때문이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을 유행처럼 들먹이던 때가 있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 공산권의 붕괴 때문이었다. 저자는 그 실패한 마르크스와 지금 읽을 필요가 있는 마르크스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언한다. 소련의 볼셰비키가 주도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본래의 마르크스주의를 크게 왜곡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3000쪽에 달하는 <자본>의 고갱이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준다.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하여 고등학교 윤리나 사회 시간에 배운 주요 개념들의 왜곡된 본뜻을 정확하게 이해시켜준다. 그중 인상적인 것이 '변증법'이다. 기존의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구조로 변증법을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변혁은 단순히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디딤돌로 삼아 더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47쪽)로 규정한다.

임금 부분의 설명도 많은 통찰을 가져다준다. 2012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임금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 꼴인 173만 명이 법정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저자는 개미(노동자)들에게 난감한 이런 상황이 베짱이(자본가)가 만들어낸 장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관점을 빌린 저자의 설명을 보자.

자본주의는 생산에 필요한 두 요소,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두 사람이 각기 나눠 갖고 노동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노동시간 가운데 일부를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에게 제공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노동력을 가진 사람은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손해를 본다.

이런 구조를 지속하려면 자본가는 노동력을 가진 사람이 생산수단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꺾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 '관리(management)'다. 오늘날 경영학의 명칭이 된 관리라는 용어는 말을 길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manus'가 어원이라고 한다. 사람을 태우는 습성이 없는 말의 의지를 꺾어야 말을 탈 수 있는 것처럼, 임금을 엄격히 관리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생산 수단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꺾는다는 말이다. 자본가의 임금 관리에 맞선 노동자의 임금 교섭이 중요해지는 배경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자본가의 자본 축적 과정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의 빈곤화 테제와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명료히 깨닫게 한다. '빈곤화 테제'는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간판이라고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전후 자본주의가 장기 호황을 누릴 때 이 명제는 '결정적 오류'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저자에 따르면 그 '오류'가 사실은 오늘날 마르크스가 옳았고, 지금도 여전히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됐다고 한다. 한때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수출된 것처럼 보였던 빈곤이 선진국 내에서 만연하는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싸구려 노동의 대명사가 된 미국의 맥잡(Mc Job)이나 평생을 최저 임금의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전전하는 일본의 프리터 등이 대표적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빈곤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자본 축적의 결과다. 그러므로 빈곤화 테제는 생산수단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려는 자본가들의 의지가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변증법을 통한 반전이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부를 생산하기 위한 두 요소,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모두 노동자에 의해서만 재생산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을 노동자가 홀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두 사람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데 정작 그 관계의 재생산은 한 사람만이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이 모든 책임을 진 바로 그 사람을 계속 희생시키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토대를 스스로 훼손하는 방식으로만 발전하는 체제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요? (194쪽)

왜 노동자는 손해볼 수밖에 없을까?

개미가 손해를 보는 게 당연하고, 일방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운명처럼 원래부터 정해진 것일까,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개미의 탄생을 두 가지 과정을 통해 설명해 놓았다. 생산수단을 생산자에게서 빼앗는 과정과, 이들이 노동력을 팔도록 징벌을 가하는 것이 바로 그것. 마르크스를 따라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자본주의 이전 시기의 생산자였던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와 가옥, 가축을 방목하고 땔감을 구할 수 있는 '공유지 이용권'을 가지고 있었다. 생산 수단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것을 19세기까지 꾸준히 강탈당한다.

서막은 1470년경부터 1500년대 초의 수십 년 동안에 일어났다...봉건영주가 토지에 대해 자신과 똑같은 봉건적 권리를 갖고 있던 농민을 그 토지에서 폭력적으로 내쫓고 농민의 공유지를 강탈함으로써... (<자본> 제1권 967 :199쪽)

"생활임금 보장, 노조 인정,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투쟁중인 삼성전자서비스노조원 수백명이 지난 5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앞에서 108배를 하고 있다.
▲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 조계사 '108배' "생활임금 보장, 노조 인정,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투쟁중인 삼성전자서비스노조원 수백명이 지난 5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앞에서 108배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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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이들 생산 수단을 빼앗긴 농민들이 노동력을 파는 사람이 되도록 강압적 수단을 동원했다. '거지'가 된 농민들이 노동력을 팔도록 거지를 징벌하는 법을 만들거나 거지에게 면허를 발급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른바 '거지 면허법'은 1530년 영국의 헨리 8세 때 만들어졌는데,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와 네덜란드에도 있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초기에는 대부분의 나라에 이와 비슷한 법령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포고한 '내무부 훈령 제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가 그것이다. 직업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자를 복지원이라는 수용소에 억류하고 거기에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개미로서의 노동에 종사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베짱이의 탄생도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년기"에 소규모 축적을 통해 소자본가로 성장한 초기의 수공업자들은 국가 권력이 마련한 식민제도, 국채 제도, 근대 조세 제도, 보호무역 제도 등을 통해 본격적인 자본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저자는 폭력과 횡탈이라는 인위적 방식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개미와 베짱이 구조 때문에 자본주의가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적이며 강제적인 방식으로만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타인의 노동에 의존해야 존립할 수 있으면서도, 타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가 과연 지속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단호하게 "노!"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변증법적 자연 법칙에 따라 더 나은 제도에 자리를 물려주고 소멸해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자유의 나라"라고 표현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와 같은 제도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날카로운 지적 이후에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미와 베짱이의 관계 변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틀린 것일까.

우리는 이미 이 (개미와 베짱이의-기자 주) 관계의 주도권이 노동자에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노동자의 노동이 노동자 자신과 상대방은 물론 이 관계 자체의 존립을 책임지고 있으니까요. 그것은 마치 황제가 신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 관계는 노동자가 스스로 이 관계를 끝내야만 하는 것입니다...자본주의적 관계의 핵심은 '타인을 위한 노동'이고 이것을 노동자 스스로 멈추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관계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함께 절망을 미래의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에게 남겨놓은 실천적 지렛대입니다. (207쪽)

노동 시간 단축과 여가 시간 마련이 급선무

민주노총은 지난 7일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이 판단한 연장노동 제한시간을 늘려 노동시간을 연장한 개악이자, 이에 더해 휴일수당을 아예 없애는 슈퍼개악"이라며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7일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이 판단한 연장노동 제한시간을 늘려 노동시간을 연장한 개악이자, 이에 더해 휴일수당을 아예 없애는 슈퍼개악"이라며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비판했다.
ⓒ 이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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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으로 노동계가 시끄럽다. 노동시간 연장, 휴일수당 삭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정안이 연장 노동 제한시간을 늘려 노동시간을 늘리고 임금을 삭감하기 위한 개악안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 우리나라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090 시간으로, 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최장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시간당 임금 또한 2011년 기준으로 OECD 국가들에 비해 2배 넘게 낮게 책정돼 있다.

노동 시간과 임금의 문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가장 첨예하게 맞서는 지점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관점을 따라 쉬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것, 즉 도구의 발달에 힘입은 노동시간의 단축과 이에 따른 여가 시간의 증대가 인간의 본질임을 강조한다. 저자가 지금 실천할 수 있는 대안으로 탄탄한 노동자 조직과 안정적인 교육체계, 사회적 임금과 노동조합 조성 기금 추진 등 노동자들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강조하는 이유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계단을 통해 전체를 포괄적으로 조망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오늘 <자본>을 읽다>(강신준 지음 / 도서출판 길 / 2014. 8. 25. / 378쪽 / 1만 8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오늘 『자본』을 읽다

강신준 지음, 길(2014)


태그:#<오늘 <자본>을 읽다>, #카를 마르크스, #강신준, #자본주의, #개미와 베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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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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