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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일제는 서문시장이 1919년 3월 8일 대구독립운동 발발지인 게 싫어서 지금의 자리로 강제 이전시켰다. 사진은 이전된 서문시장의 초기 풍경이다. 이 사진은 대구3.1운동로 벽에 게시된 것을 다시 촬영한 것이다.
 1928년 일제는 서문시장이 1919년 3월 8일 대구독립운동 발발지인 게 싫어서 지금의 자리로 강제 이전시켰다. 사진은 이전된 서문시장의 초기 풍경이다. 이 사진은 대구3.1운동로 벽에 게시된 것을 다시 촬영한 것이다.
ⓒ 대구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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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7일, 대구공정여행A스토리협동조합의 안내로 달성공원을 방문했던 경북 고령군 우곡중학교 학생들은 곧이어 서문시장을 찾았다. 달성공원과 서문시장은 아주 가깝다. 달성공원 정문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복개 도로를 300미터 정도만 걸으면 서문시장에 닿는다. 그만하면 대도시에서는 "바로 옆"이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그러나 해설을 맡은 정만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은 "1928년 이전까지는 더 가까웠다"고 설명했다.

"서문시장은 '대구 큰시장'으로도 불렸는데,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을 보면 대구읍성에 동문, 남문, 북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서 가장 큰 시장은 서문 앞에 있었습니다. 대략 지금의 달성공원 정문 가까이서부터 서문로까지가 시장이었지요. 어째서 대구 큰시장은 다른 문 앞이 아니라 서문 앞에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정만진 해설가는 서문시장이 동문, 남북, 북문 앞이 아니라 서문 앞에 자리잡게 된 까닭을 헤아려보자고 말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영남대로를 걸었다. 영남대로는 청도 팔조령을 넘어 대구 파동을 지나 대구읍성의 남문 앞, 지금의 현대백화점 바로 뒤 염매시장 안을 거쳐 달성공원 앞으로 나 있었다. 즉, 대구 사람이든 부산 사람이든 서울을 가려면 달성공원 앞을 지나야 했다. 따라서 인파가 붐비는 그곳에 '대구 큰시장'이 들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광경의 사진. 역시 3.1운동로 게시 사진이다.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광경의 사진. 역시 3.1운동로 게시 사진이다.
ⓒ 대구시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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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제는 서울, 평양과 더불어 전국 3대 시장 중 한 곳인 대구큰시장(서문시장)을 1928년 지금 위치로 강제 이전시켰다. 본래의 서문시장 자리는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 이후 대구 사람들은 시장에 올 때마다 1919년의 만세운동을 화제로 삼았고, 일본은 그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계성학교 옆 커다란 못을 메워 터를 닦은 다음, 서문시장을 그리로 옮겼다.

서문시장이 독립만세운동 장소로 정해진 것은 시장이 대구3.1운동의 주역인 계성학교와 가까운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태극기, 독립선언문 등 만세운동에 필요한 물품들을 일본 경찰에 들키지 않고 옮기려면 학교 근처에서 만세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월 8일이 좋다고 판단했다. 3월 8일은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동원을 하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을 독립만세운동에 동참시킬 수 있는 멋진 곳이 바로 장날의 서문시장이었던 까닭이다.

1919년 대구3.1운동 때 모두 76명이 구속되었다. 그런데 그 중 44명이 계성학교의 전직 또는 현직 교사이거나 학생들이었다. 당시 계성학교 재학생은 모두 46명이었는데 36명이 일제에 잡혀 감옥에 수감되었다. 정만진 해설가가 우곡중학교 학생들에게 "여러분들도 일제 강점기 때 살았다면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겠죠?'하고 묻자 모두들 "예!"하고 대답했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건축된 2층 학교 건물인 계성학교 아담스관의 모습. 건물 앞 왼쪽에 1919년 만세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건축된 2층 학교 건물인 계성학교 아담스관의 모습. 건물 앞 왼쪽에 1919년 만세운동 기념비가 서 있다.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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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는 1906년 개교했다. 학교 건물인 아담스관은 1908년에 지었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45호인 아담스관은 한강 이남 최초의 2층 학교 건물이었다. 그래서 전라도에서까지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왔다고 한다.

계성학교에는 아담스관 이외에도 문화재가 둘 더 있다. 1913년에 건축된 맥퍼슨관(대구시 유형문화재 46호)과 1931년 지어진 핸더슨관(대구시 유형문화재 47호)이 바로 그들이다. 맥퍼슨관은 현재 계성교회로 사용되고 있고, 핸더슨관은 도서관 등이 들어 있는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아담스관 벽에 박혀 있는 대구읍성 성벽돌들도 널리 알려진 볼거리이다. 1906년 친일파 대구부사 박중양이 "성벽 때문에 장사가 잘 안 되니 부숴달라"는 일본인들의 부탁을 받고 허물어버린 대구읍성의 성벽돌들은 계성학교 옆의 큰 호수를 메울 때 많이 사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가 아담스관 건축에 활용된 것이다.

계성학교 아담스관의 벽에 석재로 대구읍성의 성벽 돌을 설명하고 있는 정만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 일부 학생들은 손으로 성벽돌을 만져보고 있다.
 계성학교 아담스관의 벽에 석재로 대구읍성의 성벽 돌을 설명하고 있는 정만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 일부 학생들은 손으로 성벽돌을 만져보고 있다.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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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학교 건물은 6.24 전쟁 중에는 군인들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한강 이남의 국군을 통솔하는 2군사령부도 계성학교 교정에서 창설되었다. 1954년의 일이다. 지금 아담스관에서 정문으로 내려오는 길 중간쯤에는 이곳이 2군창설지라는 사실을 기념하는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우곡중 학생들은 이제 제이교회 앞을 지나 동산 언덕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곳에 설립된 병원도 동산병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동산에는 대구 최초의 서양식 주택 밀집지로 조성된 선교사주택 단지가 있고, 박태준 노래비가 있다. 또 1919년 대구만세운동 때 경북고교 등 시내 소재 학교의 학생들이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해온 3.1운동로도 있다.

"동산에 가서 <동무 생각>도 한번 불러보고, 3.1운동로에서는 '대한독립만세'도 한번 외쳐 보아야겠지요?"하고 해설가가 말하자, 우곡중 학생들은 "예"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누가 앞장서서 부를까요?"하는 질문에는 서로서로 다른 학생을 가리키며 "쟤요, 재요."하면 웃어댔다.

2군사령부가 학교 내에서 창설되었다는 표지석이 계성학교 안에 세워져 있다.
 2군사령부가 학교 내에서 창설되었다는 표지석이 계성학교 안에 세워져 있다.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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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곡중 학생들의 대구 여행은 계속됩니다.



태그:#우곡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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