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공통으로 드러나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완벽한 관계'에 대한 열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대표적이다.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어릴 적 친구였던 남녀와 함께 소박하지만 행복한 관계를 형성하다가, 그중 한 명의 죽음 이후로 각자 크게 방황한다.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던 세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한 축이 쓰러지자 결국 평형을 잃고 무너지는 삼각대처럼 보였다.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결여된 자신의 일부를 찾는다"는 구절이 담긴 <해변의 카프카>도 마찬가지다. 전혀 상대방을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서로 애타게 찾던 남녀, 아오마메와 덴고가 '두 개의 달'이 뜨는 가상의 세계에서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1Q84> 역시도 그랬다. 목숨을 건 위기상황 끝에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만남'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관계'가 된다.
지난 2013년 발간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유사한 설정을 깔고 있다. 이 책은 유년시절 작은 도시에서 딱 맞는 퍼즐처럼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며 행복하게 지내던 다섯 명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던 중 스무 살이 되어 주인공이 대학입학을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나자, 그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표현 못 할 허전함'을 품고 살아간다. 성인이 된 그들의 삶은 나름 행복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과거의 무결한 아름다움을 잃은 상태이다.
'
결핍'을 통해 '관계'를 그려내다
올해 출간된 하루키의 단편 모음집 <여자 없는 남자들>도 같은 선상에 있다. 각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여자가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란 '여성성을 가진 존재'라기보다 마음을 나눌 상대를 뜻하는 듯하다.
본문에 담긴 단편 '독립기관'의 주인공은 때로 하룻밤 상대를 만나기도 하지만 진심을 공유하는 사이는 없다. 성형외과 의사인 그는 높은 수입에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여러 여자를 동시에 만나기도 하면서 육욕을 충족하지만,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며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단숨에 마음을 빼앗긴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는데 그녀는 이미 결혼한 상태의 유부녀다. 상사병에 걸린 그는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차갑게 버림받고 좌절하여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은 조연을 주로 맡는 중견 배우이다. 그는 아내와 원만한 부부생활을 해왔지만, 그녀가 자신을 속인 채로 다른 남자들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부부 사이가 망가질 것을 우려하여 '출중한 연기력'을 발휘하며 마치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맡은 자상한 남편의 '역할'을 유지한다.
동시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아내를 바라보며 내심 깊은 절망에 빠진다.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매력'을 가진 남성이 아내의 마음을 끌어당겼을 거로 생각하며, 그에게는 결핍된 그 '매력'이 무엇인지 몰라서 자괴감에 휩싸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아무런 기억도 없이 침대에서 눈을 뜬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잠자'라는 자신의 이름이 전부인 그는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은 상태이다. 텅 빈 건물에서 정신을 차린 직후에 그는 '전쟁이 발발한 세상'을 홀로 마주하게 된다. '사랑을 주고받을' 존재인 가족은 집에 그를 남겨둔 채로 모두 대피를 위해 떠나버렸다.
결국 본문에 실린 짧은 이야기들을 하나로 꿰뚫는 핵심은 '결핍'이다. 주인공들은 각자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관계에 있어 모두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뼈아픈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이다. '잃은 뒤에서야 빈자리를 깨닫는' 역설적인 상황의 나열은, '결핍'을 통해 '관계'를 그려내는 작가의 재치가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보았을 그런 일들로 말이다.
하루키가 보여주는 이야기의 흡입력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매력 중 하나는 '이야기의 흡입력'이다. 자신의 작품 커리어와 함께 꾸준히 쌓아올린 이 능력은 최근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빛을 발했다. 줄거리를 풀어내는 일에 있어서, 구심점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하루키의 힘은 상당히 강했다. 그의 이야기는 전개가 매끄럽고 마무리가 깔끔하다.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제대로 아는 듯하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 포함된 '기노'를 읽으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아내와 이혼한 뒤 자신만의 작은 가게를 차린 중년 남자 기노의 이야기가 중심인데, 담백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주인공의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판타지 같은 사건이 연출되는 데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가게를 자주 찾아오던 길고양이가 어느 날 발길을 끊고 여러 마리의 뱀을 발견한 순간, 단골손님이던 의문의 남성이 기노에게 말한다. "위험하니 어서 피하라"고. 되도록 자주 거처를 옮기라는 말에, 계획에 없던 여행을 떠난 기노는 삶을 잃은 채로 방황하며 처절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최근 몇 년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듭 언급되었다. 이에 국내 문학팬들 중 일부는 그를 두고 "메시지가 없는 작가"라거나 "알맹이 없이 흥미 위주의 이야기로 인기를 끄는 것이 고작"이라 혹평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할만한 작가가 아니며, 그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이처럼 국내에서는 하루키의 높은 인기와 상반되는 분위기로 작품성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루키의 글이 강한 끌림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삶에 대한 통찰'보다 자극적인 부분으로 그의 작품이 인기를 얻는 것이 거품으로 보일지라도, 독자를 책으로 이끌고 책장을 멈춤 없이 넘기게 만드는 것은 확실히 강한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뛰어난 작가라는 평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꾸준히 마라톤을 즐기는 취미생활처럼 하루키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중이고, 그의 나이를 두고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많은 글을 더 쓸 것이라 기대된다. 이런 가운데, 그가 위대한 작가인지는 아직 더 지켜볼 문제가 아닐까.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결핍'을 담은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완벽한 작품은 아닐지라도, 그의 다음 장편소설을 기대하는 이에게 충분한 기다림의 이유를 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여자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씀 |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08. | 1만3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