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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도시건축과는 전혀 무관한 청년기를 살았던 영국의 21세 청년 에베네저 하워드는 친구들 두명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려던 계획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농부가 아닌 도시에서의 삶을 꿈꾸며 대도시 시카고로 이주한다.

훗날 그는 수많은 도시학자와 많은 도시계획 및 도시설계에 영향을 끼친 '미래의 전원(田園)도시'라는 책을 통해 전원도시이론을 주장한 도시계획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전원도시는 산업혁명 이후 열악해진 도시환경에 대한 대안으로 도시와 전원을 적절히 조화하여 도시의 확장을 막고 동시에 자급자족형 산업도시의 기능을 수행하며 토지의 공유화와 지역 내의 개발 이익의 일부는 지역 사회를 위해 재투자한다는 개혁적인 도시계획이었다.

땅을 판다는 소식에 '정원을 그냥 자라게 놔둬라' 청원

올해 마지막 농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 베를린 Prinzessinnengarten 올해 마지막 농작물을 수확하고 있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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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베를린의 '공주님들의 정원'(Prinzessinnengarten)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도시 농업 공간에서 작은 파티가 있었다. 파티는 참가한 사람 모두가 함께 농작물을 직접 수확하여 요리를 하고 지역에서 생산된 맥주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시작되었다.

축구 운동장 규모의 약 6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크기의 정원은 4월부터 10월까지 시즌으로 운영되며, 사회적 기업인 'Prinzessinnengarten'와 약 1000여 명의 자발적인 참여자들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매 시즌 약 6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베를린의 명소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서 구경하고, 각종 교육 과정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생산된 농작물과 씨앗들을 사고 팔며, 유기농 음식과 지역 음료를 즐길 수도 있다.

Prinzessinnengarten은 2009년 버려진 땅을 지역 주민들이 도시 농업을 위해 활용하며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베를린의 부동산 펀드회사(베를린 시의 불필요한 땅을 판매 혹은 임대하는 관리 회사)로부터 땅을 임대하여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2012년 6월 오랜기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땅이 인기가 높아질대로 높아져 가치 있는 땅이 되었고, 누군가에 팔려 사유지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정원 땅을 판매할 예정이라는 소식에 사람들은 정원을 그냥 '자라게 놔둬라!' (Wachsen Lassen)라는 온오프라인 청원 활동을 통해 약 3만 명의 서명과 약 2만5천 유로의 후원금을 모으며 여러 매체들의 관심을 끌었다. 독일의 일간지 Süddeutsche Zeitung (뮌헨을 기반으로 한 주요 일간지)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정치권의 결단을 촉구했다.

"도시의 미래는 부동산 정책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정책은 고부가 가치라고 여겨지는 사무용 건물이나 고급 주택 개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가 현재 보여주는 강점에 집중해야 한다. 문화적 다양성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도시를 가꾸는 모습은 바로 베를린의 강점이고, 그것이야말로 베를린의 도시개발과 부동산 정책을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보기이자 아이디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민들과 기존의 문화를 존중할 수 있는 빠른 정치적 결단이다. 도시를 해외 자본과 외부 자본에 팔아넘기는 것은 이제는 끝내야 한다."

자본에 팔리는 문화공간, 벌써 비싼 월세와 임대료 걱정

정원을 구경하는 사람들
▲ 베를린 Prinzessinnengarten 정원을 구경하는 사람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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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베를린 시 의원과 정부는 Prinzessinnengarten의 도시 농업 공간의 실험적 기능을 인정하고 더불어 지역 주민 중심의 참여활동과 교육활동을 유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곧 시 정부는 부동산 펀드회사로부터 땅을 되돌려 받았다. 이후 여러 토론과 회의 끝에 지난 2018년까지 정원 사용을 허가하는 계약연장을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난 금요일 열린 파티는 한해 농사를 마무리 짓는 파티이자 동시에 계약을 축하하는 파티이기도 했다.

독일 통일 이후 몰락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베를린은 도시의 빈 공간을 가난한 학생, 예술가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활용해가며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이제 베를린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현재 베를린에서는 지금의 베를린이 될 수 있었던 수많은 도시 속 문화 공간이 독일 자본뿐만 아니라 해외 자본에까지 팔려나가고 있다. 기존의 저렴했던 거주 공간과 문화 공간을 빼앗기며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 뉴욕처럼 베를린의 독특하고 멋진 도시 문화는 자본에 침식되어 가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더 비싼 월세와 치솟는 임대료에 신음하는 도시가 될지도 모른다.  Prinzessinnengarten이 계약연장을 체결하기 몇 주 전 베를린의 또 다른 상징적 공간이던 쿠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베를린의 여느 고급주택단지 공사장으로 변해버렸다(관련기사 : 베를린 시민의 선택... 월드컵 우승보다 충격).

자본주의 시대에 일어난 작은 반항

텐트들은 모두 철거된 채 공사 준비에 한창이다.
▲ 쿠브리 텐트촌 텐트들은 모두 철거된 채 공사 준비에 한창이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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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도시 역사에서 자본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이득을 취했다. 쿠브리를 그리고 Prinzessinnengarten을 인기있는 장소로 만든 것도, 베를린을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로 만든 것도, 그곳을 가꾸로 발전시켜 온 지역 주민들과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치를 높여놓은 장소를 사들이고, 기존의 거주민과 이용자들을  내쫓고, 어떤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뻔한 고급 상업 시설과 고급 주택을 짓고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오랜 세월동안 세계 유수의 대도시에서 반복되어왔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항상 자본을 지닌 사람들이 주도하던 상명하복식의 사회 현상이었다.

Prinzessinnengarten이 부동산 펀드 회사와 부동산 매각으로부터 그들의 땅을 공공화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공공 용지를 사기업에 매각하며 공공을 위한 도시를 부유한 개인과 자본이 있는 사기업을 위한 도시로 만들던 자본주의 시대에 작은 반항이 일어난 것이다. 독일의 한 잡지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제목으로 토지의 사유화를 막고 공공의 역할을 하는 정원을 지켜낸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다.

도시 설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 농업'

축제 행사를 모르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지나가다 정원을 모습을 보며 들어오곤 하였다.
▲ 베를린 Prinzessinnengarten 축제 행사를 모르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지나가다 정원을 모습을 보며 들어오곤 하였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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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농업은 단순히 도시에서 볼 수 없던 농작물을 생산하는 장소만은 아니다. 녹지를 보고 즐기는 공원을 넘어선 도시의 새로운 공공 공간이 될 수 있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장소도 될 수 있다. 또 지역 주민들의 공동 운영을 통해 잃어버린 공동체의 의미를 되찾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에베네저 하워드의 '내일의 정원도시'는 도시건축 분야에서 아주 유명한 서적이지만, 에베네저 하워드가 원래 집필한 책의 제목이 To-morrow: A Peaceful Path to Real Reform(내일을 향해: 진정한 개혁을 위한 평화로운 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에서 그리고 도시 설계 프로젝트에서 이제 도시 농업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자리잡았다. 전원 도시이론은 과거의 도시이론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도시 농업이 만들어내는 정원 도시는 진정한 개혁을 위한 평화로운 길 중 하나처럼 보인다.

* 참고로 베를린에는 Prinzessinengarten을 포함하여 2013년 기준으로 약 90곳가량 운영 중이다.


태그:#독일, #베를린, #도시농업, #공동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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