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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상 작가의 '폭탄 날개 연작'(2003년 작)
 임옥상 작가의 '폭탄 날개 연작'(2003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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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부터 번쩍, 우르릉 쾅쾅 요란스러운 천둥·번개를 동반한 가을비가 16일 서울 하늘에 내렸다. 갑작스러운 비는 다행히 한두 시간 뒤 그쳤다. 애초 계획대로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梅香里)를 향해 출발했다.

서울에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매향리를 찾아가는 동안 천둥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새벽잠을 설치게 했던 천둥소리보다 54년간 마른 하늘에서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비 오듯 쏟아부었던 포탄이 심어준 굉음과 화약 냄새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그것은 불과 10년 전까지 매향리 주민들이 겪은 죽음의 소리였다.

1시간 30여 분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매화꽃 향기' 마을에서 '평화'가 보일 거라 확신했다. 이런 기대는 우선 찾아간 화성시 매향리평화생태공원추진협의회 사무실 앞에서 무너졌다. 매향리 평화마을 건립추진위원회 간판과 함께 녹이 슬 데로 슬어버린 미 공군의 사격잔재물인 폭탄 더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2003년도에 제작된 설치미술가 임옥상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사실, 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어촌마을의 풍경을 마음에 그렸다. 왜냐하면 2005년 8월 주한미군이 매향리 미 공군사격장(일명 쿠니사격장)을 폐쇄한 이후 매향리는 2007년 국방부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이후 화성시가 우리 군으로부터 관리권을 이전받은 관리해오던 중 지난해(2013년) 비로소 마을주민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포탄의 잔재가 여전히 존재하는 2014년 매향리

최오진 매향리평화생태공원추진협의회 사무국장.
 최오진 매향리평화생태공원추진협의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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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를 찾은 주된 이유도 주민들에게 돌아간 '평화의 땅'의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특히 죽음의 땅에서 평화의 땅, 생태의 땅으로 탈바꿈하는 첫발이 사격장 폐쇄 1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열리는 '2014 매향리평화예술제'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17일~18일) 하루 전날 그 현장을 찾았다. 

이번 행사에 대해 최오진 매향리평화생태공원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 사무국장은 "앞서 두 차례 열렸던 평화예술제는 (화성)시 주도로 가수 등을 불러 평화음악회 형식으로 열렸으나, 정작 폭격 피해자인 매향리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며 "올해에는 14개 피해 마을 주민들이 마음을 나누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조용한 잔치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특히 최 사무국장은 "행사 첫날(17일) 오후 방송인 김미화씨가 진행하는 토크콘서트는 주민들이 힐링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이번 예술제의 핵심인 예술가와 함께하는 평화생태설치미술전 '보다 전(展)'은 매향리 사격장 부지를 평화생태공원으로 만드는 기초 작업이란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10명의 작가가 실험적으로 예술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화성시에서) 지원받은 예산 1천만 원을 갖고 진행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면서 "대부분 작가들이 거의 봉사한다는 개념으로 진행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재선에 성공한 채인석 화성시장은 지난 6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시민적인 합의를 통해서 매향리 평화생태조각공원을 조성하게 됐다, 아주 의미가 큰 공원이 될 것"이라며 폭격장에 투하된 포탄으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조각가들이 평화조각물을 만들어 기증, 전시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간 매향리. 이곳은 한때 '한국 평화운동의 메카' 또는 '반미운동의 성지'로 불렸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땅에서 신성불가침의 성역을 이루고, 치외법권을 누리던 주한미군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승리를 이뤄낸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불평등한 한미동맹에 경종을 울렸으며, 올바른 한미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미리 보는 10주년, 매향리의 미래를 보다

굳게 닫힌 철문. 여전히 매향리는 버려진 땅이었다. 행사 하루 전날(16일)임에도 국방부 쪽에서 굵은 쇠사슬과 큰 자물쇠로 걸어 잠가놨다.
 굳게 닫힌 철문. 여전히 매향리는 버려진 땅이었다. 행사 하루 전날(16일)임에도 국방부 쪽에서 굵은 쇠사슬과 큰 자물쇠로 걸어 잠가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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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하루 전날(16일)임에도 국방부 쪽에서 굵은 쇠사슬과 큰 자물쇠로 걸어 잠가놔 작업하는 작가들이 철문 틈새로 들어가 작업을 해야만 했다.
 행사 하루 전날(16일)임에도 국방부 쪽에서 굵은 쇠사슬과 큰 자물쇠로 걸어 잠가놔 작업하는 작가들이 철문 틈새로 들어가 작업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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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칠재 매향리평화예술제 예술팀장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평화생태공원 조성지'였다. 이곳은 주한미군이 사용했던 막사와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지상 사격장이었다. 포격으로 3분의 1만 남은 농섬이 멀리 보였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선 순간, 여전히 매향리는 버려진 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행사 하루 전날임에도 국방부 쪽에서 굵은 쇠사슬과 큰 자물쇠로 걸어 잠가놔 작가들이 철문 틈새로 들어가 작업을 해야만 했다. 군은 항상 문을 열어놓지 않고 연락을 해야만 열어주기 때문에 미리 물품을 안에 넣어놓고 그때 그때 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이날도 오후가 돼서야 문이 열렸다.

이칠재 예술팀장은 "작가들이 현장에 머무르며 (매향리) 주민들과 호흡하면서 작업하고 있다"면서 "매향리 주민들의 아픈 기억을 창작자의 시각에서 찾아내고 형상화해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붉은 바탕에 “위험 폭발물 보관소” 등 문구 그대로 남아 있는 미군 사격장.
 붉은 바탕에 “위험 폭발물 보관소” 등 문구 그대로 남아 있는 미군 사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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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곳엔 포탄의 잔재는 없다. 하지만 붉은 바탕에 쓰여진 "위험 폭발물 보관소" 등의 문구, 사격장을 관리하던 미군들이 사용했던 텅 빈 막사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리고 주변에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매향리 사격장에 박힌 쇠포탄들이 흙이 되고 생명수를 흡수해 나무가 되어 싹을 틔우는 형상을 담은 정혜령 작가의 ‘매향리의 나무’.
 매향리 사격장에 박힌 쇠포탄들이 흙이 되고 생명수를 흡수해 나무가 되어 싹을 틔우는 형상을 담은 정혜령 작가의 ‘매향리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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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는 생명을 담지 못하고 있는 붕 떠 있는 땅이란 메시지를 담은 김해심 작가의 ‘떠도는 땅’.
 매향리는 생명을 담지 못하고 있는 붕 떠 있는 땅이란 메시지를 담은 김해심 작가의 ‘떠도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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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에서 설치미술가의 손에 의해 매향리 주민들의 염원을 담은 작품들이 하나 둘 생명을 얻고 있었다. 매향리 사격장에 박힌 쇠포탄들이 흙이 되고 생명수를 흡수해 나무가 되어 싹을 틔우는 형상을 담은 정혜령 작가의 '매향리의 나무', 여전히 매향리는 생명을 담지 못하고 붕 떠 있는 땅이란 메시지를 담은 김해심 작가의 '떠도는 땅'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외에도 불탄 나무에 사람을 형상화해 절규가 아직도 들리는 듯한 모습을 표현한 작품과 길게 자란 잡초가 바다를 상징하고 그곳을 헤엄치고자 하는 물고기를 표현한 작품, 사격장의 거친 흙을 채로 걸러내 고운 생명의 흙으로 기운을 불어넣는 작품 등도 눈에 띄었다.

이들 작품을 뒤로 하고 다시 들어왔던 철문의 문틈을 헤집고 나서는데, 깃발을 세웠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사격장의 거친 흙을 채로 걸려내 고운 생명의 흙으로 기운을 불어넣는 작품.
 사격장의 거친 흙을 채로 걸려내 고운 생명의 흙으로 기운을 불어넣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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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리 평화예술제의 마지막 순서로 폐쇄된 미군 숙소 앞에 있는 국기 봉에 다시 깃대를 세우고, 예전에 포격 신호였던 황색 깃발을 걸었다가 내리면서 태극기를 다시 올리는 퍼포먼스를 이칠재 예술팀장이 준비하고 있다.
 매향리 평화예술제의 마지막 순서로 폐쇄된 미군 숙소 앞에 있는 국기 봉에 다시 깃대를 세우고, 예전에 포격 신호였던 황색 깃발을 걸었다가 내리면서 태극기를 다시 올리는 퍼포먼스를 이칠재 예술팀장이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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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술팀장은 "이번 예술제의 마지막 순서로 숙소 앞에 있는 이 국기 봉에 다시 깃대를 세우고 예전에 포격 신호였던 황색 깃발을 걸었다가 내리고 태극기를 다시 올리는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1955년부터 폐쇄되기 전 2005년까지 1년에 250일, 하루 600회에서 700회가량 사격훈련이 계속됐던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다시 새롭게 선언하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매향리의 미래를 전하고자 하는 작품들은 오는 31일까지 매향리를 찾는 이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짧은 한나절 일정이었지만, 매향리를 둘러보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한 가지 소망을 담아왔다.

'지난 60년 차디찬 죽음의 쇳덩어리의 잔재 대신, 눈발 날리는 겨울에 매화 향기만이 가득한 마을로 기억되길….'

정혜령 작가의 '매향리의 나무'.
 정혜령 작가의 '매향리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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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자세한 행사 일정은 매향리 홈페이지(http://www.maehyangri.or.kr)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태그:#매향리, #매향리평화예술제, #생태, #화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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