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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확장공사를 마치고 첫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
 작년 이맘때 확장공사를 마치고 첫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
ⓒ 김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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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2009년 봄, 나는 1년 동안의 지중해와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강만수 경제팀은 '기업 프렌들리'라는 정책을 내세우며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이로 인해 수출기업은 큰 이득을, 해외에 자녀를 유학 보낸 부모나 여행 중인 사람들은 큰 손실을 봐야만 했다. 귀국 당시 내 수중엔 돈은 한 푼도 없었고, 오히려 빚만 조금 늘어 있었다.

이탈리아 식당을 여는 것을 목표로 떠난 여행이었으니, 슬슬 창업할 준비를 해야 했으나… 내겐 창업을 하는데 필요한 돈도,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난 일단 국비가 지원되는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사실 난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요리를 배우기보단 그곳의 문화와 식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경험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당장 제대로 칼을 쥐는 방법도 몰랐다.

한식과 양식을 적절히 섞은 과정에 수강 등록을 하고 매주 5일 수업을 들었다. 수강 열기는 뜨거웠지만, 요리수업은 어디까지나 조리사자격증 취득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작 궁금한 점들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운전을 하려면 면허증이 필수지만, 요리는 조리사자격증이 필수가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학원들이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 수강생들의 자격증 취득률을 높이는 데만 교육의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이후로는 학원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학원 사업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홍대 중심가에 즐비한 '권리금 1억, 보증금 5천'

나와 스태프가 반죽한 생면을 라자냐면으로 자르고 있는 모습
 나와 스태프가 반죽한 생면을 라자냐면으로 자르고 있는 모습
ⓒ 김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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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학원도 때려치운 마당이라 마냥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대체 임대료는 얼마나 할까'라는 궁금증을 풀 목적으로 홍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홍대 중심가에 위치한 부동산 입구에는 '권리금 1억, 보증금 5천'이라고 시작되는 숫자들이 적힌 전단들이 쭉~ 붙어 있었다. 차마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도 못 내다가... 밀리고 밀려 한가로운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가 '가게 자리가 있냐'고 물으니 중개인은 "여기 옆 철물점이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100만 원에 나와 있다"라고 했다. 부동산 중개인은 "그냥 지나가면서 봐라"라며 다소 시큰둥하게 일러줬다. 그 정도 가격이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지나가면서 조심스레 살폈다. 10평이 조금 안 되는 비좁은 공간에 이가 빠진 듯 물건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었고, 먼지도 뽀얗게 앉아 있었다.

건강이 안 좋아 보이는 철물점 주인아주머니는 권리금 2천만 원을 요구했다. 권리를 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건만... 주인은 "A급 상권 인접지역에는 '바닥 권리금'이란 게 존재한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잠시 '밀당'의 시간을 가질 겸, 다른 가게 터도 알아볼 겸 시간을 두고 생각키로 했다. 시간은 구매자 쪽에 유리할 거라 생각했다. 한데 며칠 지나지 않아 주인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다른 임자가 나타나서 계약하고 싶다는데 어쩔 거예요? 생각 없으면 이 사람과 계약서 쓸게요."
"잠시만요! 제가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결국 어머니께 돈을 빌리기로 했다. 어머니의 29평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5천만 원을 대출받아 권리금, 보증금을 지불하니… 내 수중엔 달랑 1500만 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가게 인테리어와 각종 집기를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모든 것들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것들이 빠르게 닥쳐왔다.

#장면①
"천장은 노출로 할 겁니다."
"덴조(천장) 없이 간다고요? 그럼 연부(6mm합판)는 5장 주문하시고 다루끼(각재)는 1벌만 주문하세요. 그럼 마감은 후끼(분무페인트)쏘실 건가?"
"?……."

#장면②
"이 오븐은 가격이 어떻게 됩니까?"
"이건 삼상(330V)입니다. 승압공사 하시기 전에 삼상 전봇대부터 확인하시고 구매하셔야 하는데..."
"??……."

#장면③
"바닥에 바르는 에폭시 사러 왔는데요…."
"자~  이건 상도, 이건 하도예요. 헷갈리시면 안 돼요. 3만5000원."
"???……."

인테리어 업자와 나누는 대화도, 낯선 물품을 사는 것도, 서울 중구 황학동 주방거리를 헤매는 것도 모두 모두 낯설었다. 그러나 결정은 신속해야 했다. 치밀한 계획은 없었고 하루나 이틀 전에 계획한 것들을 정신없이 치러냈다. 당시 하루하루는 룰도 모른 채 말에 뛰어올라 버티는 로데오 같았다. 그래도 신기하고 즐거웠다. 비록 빚이어도 돈쓰는 재미가 있었고 미지의 공간을 하나씩 정복해간다는 쾌감이 날 행복하게 만들었다. 또 오래 전부터 그리던, '내 가게를 갖는다'는 희열이 내내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이탈리아 식당 사장은 슈퍼맨 아니라, 심부름꾼

주방에서 스태프들이 일하는 모습
 주방에서 스태프들이 일하는 모습
ⓒ 김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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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던 한국인 셰프가 오픈조로 주방에 합류했다. 주방이 빠른 속도로 세팅되기 시작했고, 가게 오픈날을 정했다. 2009년 11월의 마지막 날 저녁, 가게를 정식 오픈했고 이내 2명의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불이 당겨지고 팬 위에 기름이 튀었다. 어설픈 솜씨는 차츰 안정됐고 그렇게 다섯 번째 가을이 찾아왔다.

#장면①
"셰프님, 이 스테이크 템포(익힘) 좀 확인해주세요."
"음... 오븐에 넣고 2분만 더 익혀 내보내. 오븐 온도 230도 맞지? 중간에 문 열지 마."

#장면②
"김 사장, 전기용접기 좀 빌려줘. 의자 다리가 부러졌어."
"저런... 그냥 의자를 가져오세요. 장비 이거저거 들고 옮기느니 의자 하나 가져오는 게 낫겠네요."

#장면③
"정훈아, 연어 좀 남는 거 있냐?  우리 가게 점심 장사 마치니 연어가 똑 떨어졌다."
"마침 지금 한 마리 손질했다. 뱃살하고 꼬리 쪽 살하고 섞어서 빌려줄게."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속담이 있지만, 홍대장사 5년이면 '장사의 신'이 될 가능성은 있다. 빅뱅처럼 수많은 가게들이 태어났다 사라지기를 빠르게 반복하는 이곳 홍대는 창업시장의 살아있는 교과서나 다름없고 그 현장을 꾸준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토마토 파스타와 바질페트소 파스타 그리고 가운데는 엉뚱하지만 타이요리 쏨땀
 토마토 파스타와 바질페트소 파스타 그리고 가운데는 엉뚱하지만 타이요리 쏨땀
ⓒ 김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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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더 이상 파스타를 만들지 않는다. 종종 설거지를 하고 가끔 스테이크를 굽는다. 이탈리아 식당 주방에서 이른바 '서열'은 그렇게 정리된다. 신참은 싱크, 그 위로 콜드(샐러드나 에피타이저를 통칭), 다음이 파스타, 그리고 마지막이 메인으로 생선이나 스테이크로 대표되는 육류 요리를 다룬다. 엄격히 분업된 주방 현장에서 사장은 모든 영역에 간섭하는 슈퍼맨이 아니라 구석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심부름꾼이고 그것이 주방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스테이크를 굽고 설거지를 마치면 모든 생각은 제주도로 건너간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곳에서의 삶을 생각해왔으나 마냥 미뤄오던 터였는데 최근 상수동의 폭등하는 지가와 임대료가 그 결심을 재촉하고 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임차인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영업자는 언젠가 다른 곳에서의 창업을 준비해야 하는, 불안 속의 또 다른 예비 창업자다. 그리고 홍대라는 상권은 그런 사이클이 좀 더 빠르고 냉혹하게 진행되는 곳이다.


태그:#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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