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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만 앙상히 남은 각 잡힌 집의 외형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뼈대만 앙상히 남은 각 잡힌 집의 외형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 남산예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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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만 앙상히 남은 각 잡힌 집의 외형은 안락함과는 일절 거리가 멀어 보인다. 식탁이며 소파 등 배치된 가구의 외양 또한 가구라기 보단 철골구조물에 가깝다. 형광등이 쏟아내는 백색의 조명은 스산하기까지 하다. 일말의 체온도 형상도 중력도 소리 없이 사라져 절로 공기처럼 투명해져버릴 것만 같은 무대였다.

무대만으로 압도당할 즈음 걸음걸이부터 다른 극단 동의 언어가 흘러들면서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괴이하게 무너뜨린다. 그간 별 일 없이 지나갔던 아버지의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자는 아들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투명인간 놀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단순히 무시하는 행위를 뛰어넘어 점차 가장의 존재 자체를 증발시키기에 이른다.

그간 별 일 없이 지나갔던 아버지의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자는 아들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투명인간 놀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단순히 무시하는 행위를 뛰어넘어 점차 가장의 존재 자체를 증발시키기에 이른다.
 그간 별 일 없이 지나갔던 아버지의 생일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자는 아들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투명인간 놀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단순히 무시하는 행위를 뛰어넘어 점차 가장의 존재 자체를 증발시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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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가장(家長)의 존재에서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가장(假裝)놀이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마침내 진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듯한 남자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길 포기한 데 따른 처연함과 해방감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가 정말 보이지 않는 거니?"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팩을 하는 아내의 얼굴에 베개를 떨어뜨리거나 종일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방에 틀어박혀 있는 딸의 방에 불쑥 들어가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언의 냉담함과 접근금지의 날카로운 외침뿐이었다.

아내와 자신의 휴대전화를 맞댄 채 교신하듯 가족과의 접속을 시도하던 남자는 끝내 무응답 상태로 정지해있는 가족들에게 선언하듯 부여된 가장놀이를 현실로 체화한다. 모든 물건을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듯하게 정리해놓던 그는 사라지고, 비닐장갑을 낀 채 마구잡이로 케이크를 먹어대면서 휴대전화를 바지에 넣은 채 세탁통에 넣어버리는, 리모컨을 발가락 사이에 낀 채 까딱이는 걸로도 모자라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두서없이 시작된 가장놀이였건만 끝끝내 그 누구도 놀이의 끝을 외치지 않은 채 마치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남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기실 남자는 이미 그들에겐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서없이 시작된 가장놀이였건만 끝끝내 그 누구도 놀이의 끝을 외치지 않은 채 마치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남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기실 남자는 이미 그들에겐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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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시작된 가장놀이였건만 끝끝내 그 누구도 놀이의 끝을 외치지 않은 채 마치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남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기실 남자는 꽤나 오래전부터(어쩌면 가장이 된 순간부터) 그들에겐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놀이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닌, 현실 속 일상이 되어가면서 남자는 되레 완전한 투명인간으로 변신하려는 욕망에 점차 다가간다.

극의 마지막, 네 발로 걸어 다니며 짐승에 가까운 형상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는 남자의 몸짓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 했다. 암전 속 고요히 빛나는 휴대전화의 불빛 위로 흔들리는 아크로바틱한 안면의 움직임과 분절된 음절로 투명인간을 정의하는 장면은 섬뜩할 정도로 명징하다. 극단 동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 초반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사 없이 움직임만으로 극이 진행되는 터라 초심자나 타 장르에 익숙해져 있는 (대부분의) 혹자들은 공연장에 온 것을 후회하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는 기현상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게 극단 동의 언어인 것을. 이해하려하기 보다 그들이 들려주는 몸의 언어를 가만히 듣다보면 그들이 하려는 이야기가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연출자가 의도하려 했던 바를 알아내는 것이 극단 동의 언어에서는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거라 단언해본다. 어느 순간 강렬한 울림의 몸짓을 느꼈다면 아마도 그것이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였을 것이다.

극단 동의 작품을 관람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소식이 들려오면 묘하게도 반가운 마음이 든다. 고집스럽게도 묵묵히 그들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늘 경이롭게 다가오는 탓일까. 휑한 객석을 뒤로한 채 나서는 발걸음이 아쉽고도 무거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게재된 기사입니다.



태그:#극단 동, #투명인간 , #강량원, #남산예술센터, #문화공감 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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