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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배우면 계속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회사 그만두면 대안학교 교사를 하려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사가 좋겠다는 생각으로 알아봤는데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래도 농촌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2년 동안 돈 쓰지 않고 모으면서 귀농 준비를 했다."

포털 사이트 협력회사에서 블로그, 카페 등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금칙어, 음란물 등을 감시·검색해 조치하는 프로그램 운용자로 일했던 김좌웅(38)씨. 그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귀농하지 않았다. 도시에서의 삶은 인생에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마음을 움직였다.

독한 마음으로 2년간 4천만 원 모아

귀농은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삶이라는 김좌웅(38)씨
 귀농은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삶이라는 김좌웅(38)씨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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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했던 일은 새로운 기술이 계속 나오기에, 제 때 배우지 않으면 바로 뒤처진다. 그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관련 기술에 대한 스펙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마다 연봉도 오르고 삶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잦은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는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관리하는 포털 시스템 서버에 문제가 생기면 퇴근 이후와 휴일은 물론 새벽에도 호출이 왔다. 그때마다 어디에서라도 컴퓨터 앞에 앉아야 했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소모적인 삶에 회의가 들었고, 자신이 죽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회사에서 2년 넘기기 어려운 것이 그쪽 일이다. 그만큼 업무 스트레스가 많았다. 나도 1년 6개월 정도 다니면 그만두고 두 달 가량 쉬었다가 다른 회사에 들어가곤 했다. 7년 동안 몇 군데 회사에 다녔지만,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직장 시스템을 견디기 어려웠다."

처음 직장 다닐 때는 돈을 버는 대로 쓰는 생활이었다. 옷, 술값, IT기기 등 일상 생활에서 신용카드 사용이 많았다. 몇 년을 그렇게 살다 보니 통장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귀농을 결심하고 나서는 소비에 제동을 걸었다. 독한 결심으로 2년 동안 최소한으로 돈을 쓰면서 월급을 모으니 4000만 원이 쌓였다.

시골교회, 정농회에서 농부의 삶을 배우다

귀농 정보와 공부를 시작했다. 백두산 여행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가 일하고 있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귀농학교에 신청서를 내고, 본격적인 귀농 준비를 시작했다.

"귀농학교에서는 농사 기술에 대한 교육은 별로 없고, '왜 귀농하려는가?'라는 물음의 인문학적인 교육이 많아 조금은 답답했다. 하지만 농촌을 다녀 보니 결과적으로 그때 받은 교육이 농촌을 이해하고 귀농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회사에 사표를 냈다. 2013년 3월에 지인의 소개로 강원도 화천의 임락경 목사의 시골교회에서 공동체 식구들과 8개월 동안 처음으로 농사를 지었다.

"시골교회에 갔더니 농사일이 아주 힘들어 보였다.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이 아닌 귀촌을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며칠 뒤에 임락경 목사가 '농사는 중요하다. 제대로 배우려면 1년 이상 걸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일 주일만 지내면 충분하니 돌아가라'고 했다. 농사일은 힘들었지만 임 목사님이 있어서 잘 지낼 수 있었다."

시골교회에 머무는 동안 동네 주민들과 친밀하게 지낼 만한 시간은 부족했지만,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또한, 정농회(正農會) 농부들을 안 뒤 귀농 자신감이 커졌다. 시골교회에서 나온 뒤에는 정농회의 농사교육과 현장실습을 다녀오고 귀농한 농부들을 찾아다녔다.

전국으로 귀농 탐방을 다니며 서울에 잠깐 머물 때다. 시골교회 있을 때 알게 된 귀농인에게 '집들이를 하는데 꼭 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집들이에 가보니, 둘레에 사는 마을주민들이 다 있었다.

"그 전에도 한두 번 듣기는 했었다. 그날따라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면 어떻게든 (도움) 된다며, 빈 방이 하나 생겼으니 한두 달 머물면서 정착할 곳을 찾아보면 어떻겠냐고 적극적으로 호의를 보여서 다시 화천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마을에 스며들겠다"

집을 짓기 전까지는 컨테이너에서 생활한다
 집을 짓기 전까지는 컨테이너에서 생활한다
ⓒ 오창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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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으로 올해 2월에 내려와 임시로 쓸 수 있는 빈 집에서 살았다. 주민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밥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주민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마을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주민들 속에서 농사일도 돕고 마을 일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은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인근에 구입한 400평의 땅에 집을 짓고 자급 농사를 할 계획이다. 혼자 지내는 지금은 생활비라고 할 것도 없이,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농사에 들어가는 자재비와 막걸리 등 간식비가 쓰는 돈의 전부여서 한 달 생활비가 10만 원을 넘지 않는다. 조금 더 땅을 구입할 계획이라는 그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궁금했다.

"살림집을 짓고, 농사는 쌀과 밭농사 등 자급하는 정도만 할 것이다. 현금은 마을 안에서 벌 수 있다. 토마토, 고추 등 큰 농사를 짓는 마을이라서 일당 돈벌이는 많다. 마흔 살 전에 (배우자가 생기면) 결혼을 했으면 좋겠고, 아이들과 소박하게 살고 싶다."

그는 청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도 누군가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농산물 통조림'을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통조림 재료는 농사 지어야 나온다는 것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식량주권과 식량위기 등을 알게 됐고,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귀농을 컨테이너에서 시작했지만, 좋아서 선택한 삶이라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한다. 귀농인들을 찾아다니고, 시골교회에서 생활하며 도시와 농촌의 문화는 크게 다른 것을 알았다. 그는 어떤 일에서라도 섣불리 나서거나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마을속으로 스며들어가겠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1일 화천군으로 귀농한 김좌웅씨를 찾아가서 귀농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태그:#귀농, #시골교회, #식량주권, #임락경, #정농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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